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기고] 누군가는 살아남길 바라며, 거리로 나간다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당시 지내던 사무실에 다시 앉아 있다.

5월 24일 종각 네거리에서 연행되고 갈비뼈가 부러져 입원하면서는 할만큼 했다는 생각이었다. 주변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몰아세우기도 했다는 생각에 잠깐 동안은 빠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간절했다.

5월 8일 청와대 앞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1박 2일 동안 꼬박 날을 샜다. 세월호 유가족분들, 그리고 죽었다고 믿을 수 없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학생들의 영정 앞이었다. 150여명의 학생들의 영정이 와 있었는데 딱 한 학생과만 눈이 마주쳐보고는 그 어떤 영정의 얼굴도 쳐다볼 수 없었다. 5월 17일, 18일, 19일까지는 2박 3일을 잠 한 숨 잘 수 없었다. 5월 17일, 청와대로 향하는 안국동 사거리에서 115명의 사람들이 끌려가며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음산하던 밤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기륭전자에서 94일을 단식했던 김소연도, 65일을 단식했던 유흥희도 끌려갔다. 기아자동차비정규직 투쟁을 책임지고 3년을 살다 나온 김수억도 끌려갔다. 6월 10일 다시 연행되어 지금은 구속된 촛불시민 김창건도 끌려갔다. 무수히 많은 친구들이 끌려갔다. 나 혼자 산자가 되어 안경도 잃어버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채 혼자 절뚝거리며 아무 일 없이 붐비는 종로 네거리를 걸어오는 내내 하나의 시만을 줄곧 생각했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로지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을
그러자 지난 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그 밤새 내내 민변에 연락을 하고, 인권단체들과 소통하고, 긴급하게 보도자료를 내고, 소식들을 알리며 날을 샜다. 18일날은 광주 5.18민중항쟁 서른 네 돌이 되는 날이었다. 청계광장에서, 그리고 광화문 현판 아래 모여 만민공동회를 열던 날이었다. 그날은 더 끔찍한 날이었다. 광화문에 있는데 서울의료원 강남분원 장례식장에서 삼성전자서비스 염호석 열사의 시신이 탈취당하고 있다는 속보와 빨리 와달라는 문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황급히 이동하는 도중 도중에 17일날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친구들의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 중간 중간 장례식장에서 연행들이 되고 있다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수고했다고, “축하축하!” 한껏 톤을 높여 이야기하다가 전화가 바뀌면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예 알겠습니다. 가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도착한 장례식장은 이미 상황이 끝난 폐허였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누구 하나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모두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곁에 잠깐 앉아보기는 한 것 같다. 이내 일어나 조용히 나왔다.

그런 날은 서로 무슨 이야기도 할 수 없는 그런 날이었다. 소주라도 한 잔해야 하나, 함께 간 쌍용차, 코오롱, 기륭, 세종호텔의 해고노동자들, 빈민해방실천연대의 000, 인권운동사랑방의 명숙 등과 어느 늦은 밥집에 앉았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광화문 네거리였다. 세월호 정국 내내 침묵시위로 우리의 마음을 전했던 ‘가만히 있으라’ 학생들과 시민들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연행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숟가락을 놓고 다시 한달음에 달려 간 광화문에서는 3차 연행이 진행되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경찰벽 너머에서 끊임없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총 65명이었다. 의료원에서 끌려간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은 30여명이었다. 지금은 6월 10일 청와대 만인대회 건으로 구속되어 있는 오래된 벗 정진우도 연행되었고, 오진호도 연행되었다. 다음날엔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위영일과 라두식과 김선영이 끌려갔고, 그들 역시 구속되었다.

나는 다시 내 자신이 싫어졌다. 나는 다시 이 세상이 싫어졌다. 다시 밤을 새워 사실을 알려야 했다. 5월 24일에는 나와 구속된 민주노총 사무총장 유기수, 공무원해고자 안현호를 포함해 30명이, 그리고 6월 10일엔 69명이 연행되었다. 그때마다 비명소리들이 들려왔고, 나의 영혼은 몇 번씩이고 까무러쳤다.

이런 비극 정도는 따라갈 수 없는 참혹한 일이 세월호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친구들이 여기에서, 저기에서 지르는 비명소리가 그 좁은 선실 안에 가득했을 것이다. 쇠문을 할퀴는 손톱 사이로 피가 번지고, 두드리는 손마디마디에 멍이 져 갔을 것이다. 눈앞에서 친구들이, 사람들이 내지르는 통곡소리가 서로의 가슴을 찢었을 것이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친구들을 봐야 했을 것이다. 엄마, 아빠, 누구야를 부르는 소리들로 온 사방이 가득 찼을 것이다. 우리 손 놓지 말자며 잘 가, 잘 가라고 마지막 생의 인사들을 나누었을 것이다. 서로 웃어 보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아니다. 돌아보면 모두 그런 고통에, 아픔에 함께 해보려는 몸부림들이었다. 이런 푸닥거리, 넋풀이를 통해서라도 잠든 넋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넋들이, 남겨진 그 부모형제자매들의 마음이 조금은 풀리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들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진 우리 모두가 그러하였다.

구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방기한 이 정부의 책임만 묻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진짜 국민의 대통령이라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이토록 큰 슬픔을 만든 책임을 지고 내가 물러나겠다고 해야 맞다. 아무도 그걸 묻지 않는다 해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책임을 진 사람으로서 이토록 큰 참사와, 그 참사에 따라 온 사회가 이토록 큰 슬픔과 아픔에 휩싸였다면 본인이 물러나서라도 책임을 지겠으니, 이제 그만 우리 모두를 용서하자고 해야 옳다. 그게 어느 당의 대통령이었더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통령과 이 정부는 아랫사람들만 탓하며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어버이날 자식들의 영정을 품고 찾아 온 유가족들을 만나주지조차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추모객들만 연행하고 구속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350여명의 청년학생노동자시민들이 끌려갔다. 그 모든 곳에서 인권은 다시 실종되었다. 세월호의 아픔이 조금 가셨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이젠 노동자민중들 탄압에 나섰다. 100명의 추모객들을 막기 위해, 150명의 추모객들을 막기 위해, 300명의 추모객들을 막기 위해 6천명, 7천명, 1만명의 경찰들을 동원해 꽉꽉 막아두었던 광화문을 활짝 열어 대형스크린을 켜두고 축구 경기나 보며 세월호를 잊으라 한다.

그 사이, 경부고속도로변 옥천나들목 광고탑에서 고공농성을 하던 유성기업 영동지회장 이정훈은 시나브로 잊혀졌다. 하늘에 뜬 그 외로운 세월호에서 몸도 마음도 모두 기울어 이젠 일어설 수조차 없다 한다. 당장 내려오라고 기름밥 동료들이 애원해도 그 몸으로도 28일 내일까지는 기다렸다가 민주노총 총궐기날 내려오겠다고 한다. 자신의 분노도, 새로운 각오도 함께 실어 가달라는 뜻일 터이다. 언젠가 그 고공농성장 아래에서 그의 아내가 울먹이며 말했었다. 남편은 늘 그렇게 지킬 게 있다며 집을 나갔었다고, 87년에도 그랬고, 97년 노동법개정투쟁 때도 그랬고, 2000년대에도 몇 번이나 그렇게 집을 나갔었다고 했다. 목이 메어와 그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민주노조를 차라리 몰랐더라면 좋았겠었습니다.”라고 울먹이며 친구인 김주익열사 추도사를 읽던 김진숙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왜 우리의 처지는 이리 맨날 똑같냐고, 저들의 연대는 저리 강고한데, 왜 우리는 단결하지 못하느냐고 울부짖던 김진숙의 울음과 다르지 않았다. 내일 아침 일찍인 8시에 대한문에서 모여서 함께 내려갔다가 다시 서울로 오자는데 어떻게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5월 8일 학생들의 영정 그 어느 눈 하나도 마주칠 수 없던 마음과 같다. 1차 유성 희망버스 후, 다시 오겠다고 했던 약속을 나는 끝내 지키지 못했다. 너무 미안한 마음으로 어쩌다 전화를 했을 때마다 그는 몇 번이고 자신은 괜찮으니 세월호에서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하곤 했다.

전교조 6만 조합원들만이 아니었다. 얼마전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도 길거리 생활 8년 만에 끝내 이 세상의 법 밖으로 내몰렸다. ‘미래에 올 경영상의 위기’만으로도 해고가 가능하고, 적법하다는 대법원의 판결이었다. 1700만 노동자 가족들 모두의 삶을 급격히 기울게 하는 우리 시대 가장 잔인한 판결 중 하나였다. 이 세상 어디에 깃들 곳이 있다고, 여행이라도 한번 다녀오라고 노래패 꽃다지의 정윤경 형이 주변 이들과 함께 여비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도대체 어디에 그들이 깃들 안식의 터가 있을까. 사랑했던 장석천은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 연락이 닿질 않고, 누구는 끝내 가족과 헤어져야 했고, 어떤 이는 나라고 무슨 생각을 해보지 않았겠냐고 한다. 세월호를 기억하라고, 지난 봄과 초여름 내내 청와대를 향해 갈 때마다 내 마음 속에는 항상 사는 내내가 세월호와 다름없었던 그들과 함께 하며 가졌던 분노가 함께 있었다.

어떻게 그 수많은 아픔과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1%의 자본가들과 특권층들 외(그들마저 포함해) 모든 인간가족들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아비규환을 어떻게 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세월호만을 가지고 대통령 퇴진을 외치기엔 부족하다고 했다. 맞다. 너무나 부족하다. 대통령 퇴진만을 외치기엔 우리 시대 모두의 고난이 너무 크다. 대통령 퇴진만을 외치기엔 너무 부족하다. 자본가 타도만을 외치기엔 우리들의 아픔이 슬픔이 너무 크다.

내일 다시 ‘민주노총 총궐기’와 농민대회, 시국대회 등과 함께 긴급하게 ‘2014 대한민국 세월호버스’들이 출발한다. 일주일도 남겨두지 않고 제안된 일들이었다. 누가 더 올지 알 수도 없다. 누가 더 오지 못하더라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임을 안다.

나는 다만 내가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서, ‘강한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살아남지 않기 위해서 나갈 뿐이다. 나 대신 누군가는 살아남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갈 뿐이다. 나는 소망한다. 누군가 살아남게 되더라도 괜한 부채감에 시달리지 않기를. 부채감에 시달려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삶과 자연을 착취해 독점하고 있는 저 소수일 뿐임을 확인하기 위해 나갈 뿐이다. 이제야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는 어떤 세월호의 아비규환을 잊기 위해, 씻기 위해 나갈 뿐이다. 저들이 조장하는 공포로부터 나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나갈 뿐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일상의 작은 행복이라는 것을.
“물론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보다는 좀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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