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문화생활을 누릴 권리

[기획연재] 비정규직 사회헌장(17) 밥 한술 뜨고 노래 한 자락 듣고

[편집자주] 비정규직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이하 비없세)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가 무시되고, 기업의 이윤만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세상에 문제제기하기 위해,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 스스로가 법적인 권리를 뛰어넘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는 길에 함께하기 위해,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헌장’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참세상과 함께 사회헌장의 내용을 하나씩 이야기하면서 그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고자 합니다.

“16조. 노동자는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노동자는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만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풍요로운 문화를 누릴 수 있어야 하고 책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관계도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때로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두려워합니다. 관계를 잘 맺으려면 경조사도 잘 챙겨야 하는데 임금이 너무 적기 때문에 부담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도 ‘돈’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쉽게 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단지 돈 때문만은 아닙니다. 워낙 장시간 노동을 하거나 노동강도가 센 일을 다보니 너무 피곤하여 쉬는 날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쉬고 싶은 맘뿐인 노동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니 문화생활이라는 것은 사치로 여겨집니다.

문화를 반드시 돈으로 구매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라도 자유롭게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문화를 위한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하는 이들이 지쳐서 쉬고 싶은 것이 아니라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체육활동을 하면서 관계를 다지기를 원하도록 노동시간이 더 많이 줄어들어야 합니다.

대구의 성서공단은 주거지역과 공단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노동친화적일 수밖에 없는 곳이지만 우리가 노동친화적으로 만들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지역 주민과는 친밀하게 만나기 위해, 그리고 지역 노동자와는 노동기본권 확대를 주제로 만나기 위해 매주 수요일의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2001년부터 공원에서 <수요공연>이라는 이름으로 여름 한철 지역 주민들과 함께 공연을 했으며, 2003년부터는 공단 골목 모퉁이에서는 점심시간에 <짜투리 노래공연: 밥 한술 뜨고 노래 한 자락 듣고>라는 이름으로 봄·가을 노동자를 만났습니다.

또, <수요공연>은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 ‘공감’”이라는 명칭으로, 공연만이 아니라 다양한 만남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성서공단 노동자들의 노동권도 이야기하고 대구지역에 잇는 사회문제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장이기도 했습니다. 선전물 배포, 산재 등의 전시물 게시, 노무사의 무료 노동상담,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진료도 공연 공간에서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짜투리 노래공연: 밥 한술 뜨고 노래 한 자락 듣고>를 진행하기 위해 공단 곳곳을 돌면서 노동자들과 함께 하다보면 반응은 각양각색으로 나타납니다. 관리자의 눈치를 피해 가수 앞을 지나가다 손짓으로, 깜빡이는 눈인사로,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로, 얼굴에 핀 잔잔한 웃음으로, 식당에서 후식으로 주는 설탕 맛 나는 음료 한잔으로, 박카스 한 박스로 응답합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하는 싯구처럼 성서공단의 노동자라고 해서 문화생활을 모르겠습니까. 흔하디 흔한 콘서트, 생색내며 폼 잡고 볼 뮤지컬, 이것도 안 돼 하다못해 영화관에라도 가려면 돈에 짓눌리고 시간에 꺾여 버립니다. 특히 몇 년 전부터는 아예 대놓고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고 염장까지 지릅니다. 별보고 출근해서 별보고 퇴근하는 공단 노동자들의 현실 속에서 ‘문화생활’을 하라는 것은 상대적 박탈감만 키울 뿐입니다. 최저임금이거나 최저임금보다 몇 백 원 더 받는 임금으로는 잔업·특근을 안 하고는 못 배깁니다. 노동자들은 저임금이기 때문에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쳇바퀴를 열심히 굴리고 있습니다.

[출처: 뉴스민]

이처럼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은 철저하리만큼 공단의 노동자를 소외시킵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문화생활이냐’고 냉소로 일관하거나 체념합니다. 원래부터 문화적 소양이 부족해서가 아리나 구조적으로 문화생활을 하지 못하게끔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노동자에게 생각할 시간, 여유부릴 시간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저임금과 장시간의 벽을 깨부수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책 읽을 시간, 친구 만날 시간도, 연애할 시간도, 집회 나갈 시간도, 혁명을 꿈꿀 시간도 없습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깨부수는 것을 시작으로, 집요하게 시간단축 투쟁을 해야 하고, 8시간 일하고 먹고 살 수 있는 생활임금 쟁취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과정 속에서 누릴 노동자 문화를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만든 마이크로, 기타로 노동자들과 노래하고, 노동자들이 만든 노동자를 위한 책을 읽고, 노동자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며 노동자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런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물질만능주의가 만들어 놓은 문화의 덫에 걸려 진탕 소비하고 다시 죽어라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서울 대학로나 번화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자 스스로가 만들고, 즐기고, 누리는 것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재미있다고 느끼며 그것을 같이하는 겁니다. 그간 노동자 스스로의 고유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문화를 누릴 자세와 노동자 문화가 풍성하게 나올 토대를 지금부터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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