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전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했음에도 국가 권력기관의 개입으로 한평생 해고자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김진숙 한진중공업 마지막 해고노동자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힘겹게 투병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개인적으로 15일까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산에서 1차 오체투지를 했고, 좀 더 절박한 마음으로 오늘하고 내일 두 곳에서 오체투지를 할 예정입니다.”
12월 17일, 여의도 산업은행 앞.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복직과 쾌유를 바라는 오체투지 행진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서영섭 신부(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소속)가 이번 오체투지의 취지를 설명한다. 이날은 김 지도위원의 복직투쟁 178일, 한진중공업 앞 천막농성 32일, (문철상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장과 심진호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한진중공업지회장)단식농성 23일 째가 되는 날이다. 영하 10도의 한파가 예보된 날이었으나 따스한 햇살이 잠시 추위를 잊게 한다.
▲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자회견 [출처: 연정] |
“신부님마저 오체투지에 나서야 되는 어이없는 현실 입니다. 전국의 많은 동지들이 우리 김진숙 동지의 쾌유와 복직을 위해 굉장히 애달파 하면서 간절하게 그리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많은 노력과 연대로 쾌유와 복직이 이뤄질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이 한걸음이 오체투지로 엎드려 땅에 닿는 우리의 마음이 반드시 그러한 성과를 이루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김진숙이 한진중공업 멋진 작업복을 입고 환한 웃음으로 정문을 통과해 현장에서 동지들과 도시락을 먹고 웃으면서 함께 시간을 보낼 날을 위해 끝까지 함께 합시다.”
지난달 말, 일주일 간 2차 암수술을 앞둔 김진숙 지도위원의 쾌차를 기원하는 3천배를 진행하기도 했던 김 지도위원의 오랜 친구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이 오체투지에 함께 하는 결의와 바람을 이야기한다. 박문진 지도위원은 올해 초까지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 복직 등을 요구하며 227일 간의 고공농성을 했다. 지난해 말, 김진숙 지도위원은 암투병 중임에도 부산에서 박문진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영남대의료원까지 일주일간 도보행진을 한 바 있다.
이날은 한진중공업의 주채권은행이자 매각 권한을 위임받은 한진중공업의 실질적인 사용자라고 할 수 있는 여의도 산업은행에서 출발해 김진숙 지도위원을 해고하고 복직 이행을 하지 않고 있는 한진중공업까지 간다. 그동안 많은 시민들의 김진숙 지도위원 복직 요구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의 권고(2009년 11월), 부산시의회의 특별결의안(2020년 9월) 등이 있어왔다. 그러나 한진중공업은 김 지도위원의 복직이 업무상 배임에 해당한다는 주장을 하며 복직 이행을 하지 않고 있다. 한진그룹 故 조양호 회장 일가의 수백억 대 횡령·배임·사기, 온갖 갑질과 폭력 등의 문제로 우리 사회가 떠들썩했던 게 불과 2년 전이라는 걸 생각하면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김진숙 해고노동자가 해고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는 국가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역사에 대해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이 반드시 책임을 지고, 이 부분에 대해 진정어린 반성과 사과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의 정부가 늘 강조하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한 부분입니다.”
서영섭 신부가 둘째 날에는 청와대 책임 있는 사람과 면담을 통해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도록 하겠다는 의지도 밝힌다. 오체투지 주최 측은 김제남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에게 면담 요청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김진숙 복직이 정의
“김진숙 복직이 정의입니다. 그 정의를 이루는 마음으로 오체투지 첫 번째 절을 합니다. 일하다 죽지 않게 차별받지 않게 비정규직 철폐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번째 절을 합니다. 해고는 살인 입니다. 해고 없는 세상을 위하여 세 번째 절을 합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바라는 마음으로 10만의 마음을 모았습니다. 이번 국회 내에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되기를 바라며 네 번째 절을 합니다. 노동이 존중되고 노동이 우선되는 사회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섯 번째 절을 합니다.”
여의도 LG트윈타워 빌딩 앞, 오체투지 참가자들의 간절한 마음을 모아 5번의 절을 올리며 오체투지를 시작한다.
LG트윈타워 안에는 집단해고 철회와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청소노동자 80여 명의 파업농성이 진행되고 있다. 이번 오체투지를 총괄하는 한경아 씨(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 집행위원)는 이들이 안에서 파업을 하고 있어 나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청소노동자들이 이곳에서 일하면서 인격적인 모욕을 많이 당했는데, 노동조합을 만들고 동료들 간에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것에 무척 행복해 했다고 한다. 대한조선공사 사번 23733 용접사 김진숙 또한 그런 마음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고, 민주노조를 꿈꾸며 목소리를 냈으리라.
▲ LG트윈타워 앞에서 5배를 올리는 오체투지 참가자들 [출처: 연정] |
“한번 치면 절을 하시고 또 한 번을 치면 일어나시는 거예요. 두 번을 치면 행진을 하는 거고. 이렇게 하면 10보 1배로 가는 거고, 이렇게 하면 20보 1배, 이렇게 하면 30보 1배 사인으로 가겠습니다.”
김경봉(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씨의 간략한 오체투지 진행 방법 소개에 이어 본격적인 오체투지가 시작된다. 기타를 만드는 콜텍 공장에서 근무하다 해고돼 13년간 복직투쟁을 했고, 정년을 목전에 둔 지난해 명예복직으로 투쟁을 마무리한 그는 어쩌다보니 억울하고 서러운 노동자들의 오체투지 ‘전문 북잡이’가 됐다.
경봉 씨의 북소리에 맞춰 박문진 지도위원, 서영섭 신부, 한선주 전 공공운수노조 교육실장, 김진억 전 희망연대노조 나눔연대국장 4명의 오체투지가 시작된다. 그 뒤에서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현수막을 들고 함께 한다.
▲ 오체투지로 서강대교를 건너고 있는 오체투지 참가자들 [출처: 연정] |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
“둥~”
“둥~”
“두둥~”
북소리에 맞춰 오체투지 참가자들이 두 손을 모으고 10보 1배 행진을 한다. 땅에 이마와 손을 대고 절을 하고, 다시 땅을 딛고 일어나 행진하고, 또 다시 절하기를 반복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지난번보다 좀 더 절박한 마음으로 하고 있는데, 복직 꼭 됐으면 좋겠다는 그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죠. 그 하나만 생각한 거 같아요.” (서영섭 신부)
“울분과 분노와 속상함... 만감이 교차해요. 김 지도가 작년 이맘때 고공투쟁 지원해주러 왔던 생각도 나고,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에 대한 비애감도 느껴지고. 저는 건강 빨리 회복하라는 기도를 많이 했어요. 이렇게 아픈데, 복직투쟁까지 해야 하는 너무 어이없는 현실이 속상해요. 그래도 전국의 많은 동지들이 안타까워하고 애달파 하는 기운들이 어떤 큰 길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박문진 지도위원)
오체투지단을 따라 걷는다. 손을 모으고 열 걸음을 걷고 멈추고 다시 열 걸음을 걷고 멈춘다. 세상에 오직 ‘김진숙 복직’과 ‘김진숙 쾌유’ 기도만 있는 것 같은 오후. 높은 건물과 아파트 사이로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는 따스한 햇살이 고맙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 이문재, <오래된 기도> 중에서
회사는 산업은행 가라 산업은행은 회사 가라, 핑퐁게임
오체투지 여정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서강대교를 건너던 중에 경찰들이 갑자기 사진 촬영을 하던 취재진과 참가 시민들에게 1m 가량의 난간을 넘어 인도로 넘어 갈 것을 요구하며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이 밀어 넘어지면서 이혜란 감독(여성영상집단 움)이 다치고 카메라가 파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위험해 보이는 것은 마스크 착용과 거리두기 등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오체투지에 참여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감염예방법에 따라 집회 참가인원을 9명 이하로 제한하겠다며 본인들끼리 거리두기도 하지 않고 집회 참가자들에게 바싹 붙거나 접촉을 하며 제지하는 경찰들이 더 위험해 보였다.
오체투지 행진 중에 마포역과 효창공원역에서 짧은 휴식을 취하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준비한 따뜻한 물과 초코바, 초코파이 등의 간식을 먹었다.
▲ 용산구 원효로를 지나고 있는 오체투지 참가자들 [출처: 연정] |
“핑퐁게임 하는 거라. 회사에서는 산업은행 가라, 산업은행에서는 회사 가라. 사람 목숨이 달려있는데... 한진은 바지사장이고, 실소유자 산업은행이 해결해야죠.”
마포역에서 부터 북을 치고 있는 김병철 부지회장(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이 내용을 묻는 경찰들에게 이야기한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3박 4일 휴가를 내고 올라와 청와대 노숙농성을 하고 이날 오체투지 일정에 함께 하고 있다.
“진짜 마음이 아픕니다. 저희들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너무 마음이 아프고, 오체투지 하시는 분들한테 죄송합니다.”
김진숙 지도위원보다 1년 늦게 한진중공업에 입사해 김 지도위원과 같은 부서에서 용접 일을 했던 남주현 씨는 내년이 정년이라고 했다.
“현장에서 대의원 하면서 도시락 문제 개선 활동하는 걸 봤습니다. 35년 동안 복직이 안 된다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저희들이 같이 열심히 했어야 되는데, 그동안 저희들만 챙긴 것 같고...”
김진숙 지도위원이 입사하던 즈음 태어났다는 조기문 씨는 2006년 입사한 이후 김 지도위원의 연설을 많이 듣고 회사에서 보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했다.
“(한진중공업) 바지사장이 앉아있으니까 아직 결단을 못 내리고 있는 거 같아요. 정년이 며칠 안 남으셨는데 그전에 잘 해결 돼서 복직되셔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정년퇴직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4천, 4만, 40만, 400만의 응원이 느껴졌어요
오후 4시. 남영역에 도착해서 마지막 휴식을 취한다. 남영역을 출발한 오체투지 행진 참가자들이 5보 1배로 이날 마지막 목적지인 한진중공업 서울 본사를 향해 간다.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하여 첫 번째 절을 합니다. 비정규직 철폐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하여 두 번째 절을 합니다. 해고는 살인 입니다. 해고 없는 세상을 위하여 세 번째 절을 합니다. 일하다 죽지 않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하여 네 번째 절을 합니다. 김진숙이 우리의 희망이고 우리의 정의 입니다. 김진숙의 복직이 곧 평화입니다. 그 평화를 위하여 다섯 번째 절을 합니다.”
한진중공업 본사 앞에 도착해 마지막 5배를 하고 참가자들끼리 서로 반절 인사를 나누며 첫날 일정을 마무리한다. 오후 5시, 어느새 해가 보이지 않는다.
“저희 노동조합 만들 때 조합원들 교육도 많이 오셨었고, 저 투쟁하는데 지원을 많이 해주셨었어요. 만날 일도 많이 있었고요. 정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대로 그냥 있을 수 없다. 뭐라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꼭 복직 됐으면 좋겠어요. 복직이 돼야 건강도 더 빠르게 회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복직과 쾌유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오체투지를 함께 했고, 또 추가로 할 수 있는 걸 우리 조합원들과 함께 뭐든 하겠다는 생각 입니다.” (김진억 전 희망연대노조 나눔연대국장)
“오늘 신부님하고 박문진 동지가 하게 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서 감사할 따름이죠. 제가 체중이 44kg인데, 힘들지가 않았어요. 오늘 비록 4명이 했지만, 외롭지가 않고 큰 울림이 됐어요. 4천, 4만, 40만, 400만의 응원이 느껴졌어요. 그 마음들이 다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되게 든든하고 힘 있게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어서 복직되고 완치가 돼서 건강하게 현장 들어가서 노동자들과 얼싸안고 자기 발로 출근해서 자기 발로 걸어 나올 수 있는 날. 그게 사람의 평생 여한이잖아요. 그걸 한진에서 책임 있게 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선주 전 공공운수노조 교육실장)
▲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한진중공업 서울 본사 앞에서 마지막 5배를 올리고 있는 오체투지 참가자들 [출처: 연정] |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이문재, <오래된 기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