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펑펑 내리던 날, 저녁밥을 먹다가 SNS에서 웹포스터 한 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싱그러운 봄날 연두 빛 나무를 배경으로 서서 수줍고 고운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 속 주인공들은 18년 째 사과와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는 과천 철거민 방승아 씨(전국철거민연합 과천철대위 위원장)와 김이옥 씨(과천철대위 부녀부장)였다. 혹시 ‘투쟁승리보고대회’ 소식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포스터 밑에는 “과천철거민대책위원회 방승아 님의 벌금노역을 막아주세요!”라고 쓰여 있다.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차곡차곡 성실하게 쌓이는 눈 위로 철거민들의 서러움과 한이 소복하게 쌓인다. 다음날 아침, 방승아 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좌초지종을 물었다. 가보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자 방승아 위원장은 괜찮다고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잘 지냈냐며 반갑다고 한다.
“나는 미운 사람으로 찍혔나봐. 딴 사람들은 더한 거 했어도 안 거는데, 딱 두 시간 집회 한 걸로 소음 갖고 경찰이 고발했어요. 집회하기 전부터 경찰이 협박을 하더니 내가 집회신고 했다고 내가 주최자라고 나만 처벌받아야 된다네.”
삼성 김용희 씨의 고공농성과 삼성생명 암보험 피해자 투쟁 등 삼성 피해자들의 투쟁으로 서울 강남 삼성 본관 앞이 북적이던 작년 5월, 삼성준법감시위원회 회의가 있던 날이었다고 했다.
“너무 외롭고 잊히는 거 같으니까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에 우리 연대 좀 해달라고 요청해가지고 40~50명이 집회를 했어요. 예전에는 구속도 각오하고 투쟁했는데, 16년이나 되다보니 사람 맘이 알게 모르게 늘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집행유예 기간이었는데, 벌금을 때려서 다행이다. 우리 부녀부장님하고 둘이 약식명령서를 받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랬다니까.”
과천철대위 방승아 위원장은 구속이 안 되고 벌금도 예전보다 적어 다행이라고 웃으면서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과천철대위 김이옥 부녀부장(왼쪽)과 방승아 위원장. 2020년 4월 [출처: 연정] |
그저 묵묵히 몸으로 감내하는 철거민 투쟁
“철거민들이 벌금 낼 돈이 어디 있어요. 철거민들은 다 몸으로 때워요. 철거민들은 원래 누구한테 후원받거나 이런 투쟁 안 해. 우리 전철연 동지들은 더 열악해요. 사회봉사가 참 자존심은 상하고 이러지만 그렇게라도 갚을 수 있는 게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사회봉사도 5만 원에서 10만 원으로 늘었으니 할 만 하지 않냐. 우리는 하도 힘들게 싸워서 그러는지 그게 별로... 이걸 너무 당연시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긴 한데... 호들갑 떨 일도 아니고 벌금이 오늘 나오고 내일 나오고 매일 이런 삶을 살았잖아요. 철거민 투쟁은 누구한테 의존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몸으로 감내하면서 정면충돌 하는 거잖아요. 발전기, 천막 그런 것도 없어요. 우리는 그런 세월이 이미 지났는데, 우리 투쟁이 나약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해요.” (방승아 위원장)
철거민 투쟁은 권리와 생존권 요구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노동자들의 투쟁과 비슷하지만, 그 과정은 많이 다르다. 보통 민주노총에 소속된 장기투쟁 노동자들의 경우만 해도 집회 등 투쟁과정에서 발생한 벌금이나 투쟁 비용을 노동자 개인이 부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철거민들은 주거문제나 상가세입자 문제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에도 당사자들이 오롯이 다 부담해야 한다. 심지어는 민주노총 투쟁에 연대갔다가 나온 벌금이나 재판도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했다. 연대하러 오는 이들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철거민 말고는 거의 없다. 삶터와 생계터를 빼앗긴 철거민들이 벌금 앞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몸으로 때우는’ 노역과 사회봉사다.(현재 생계가 곤란과 관련하여 벌금 5백만 원 까지 사회봉사로 대체 가능하게 되어 있다) 과천 철거민 두 명은 지금까지 가사도우미 등 아르바이트를 해서 1인당 매월 30만 원 정도의 투쟁 경비를 내가며 투쟁을 해왔다고 한다.
재건축 세입자들은 맨몸뚱이로 쫓겨나도 당연하다?
2000년 대 초반, 방승아 씨는 과천 주공3단지 상가에서 카드 대출을 받아 동생과 함께 옷 가게를 시작했다. 함께 투쟁하고 있는 김이옥 씨도 비슷한 시기에 김밥과 떡볶이를 파는 작은 분식집을 차렸다. 당시 과천3단지는 주거용 아파트 3150세대와 상가 157개 점포로 이루어져 있었고, 상가 대부분에서 상가세입자가 장사를 하고 있었다. 2004년 10월 29일, 2년 조금 넘게 장사를 하며 이제 좀 할만하다 싶었을 때였다. 갑자기 6개월 만에 과천시 주공 3단지 재건축사업시행 인가가 났다.
“법적으로 재건축 세입자들은 맨몸뚱이로 쫓겨나도 당연하다고 되어있어요. 법적으로 누구도 책임이 없는 거예요. 투쟁을 하느냐, 여유가 돼서 딴 데로 가느냐. 두 가지 밖에 방법이 없어.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올 수밖에 없었어요. 장사하는 사람은 그게 생계고 생활 터전이잖아요. 월급쟁이는 월급만 깎이고 재산권이 날아가진 않지만, 우리는 작든 크든 재산권에 직장까지 잃는 거잖아. 그래서 어찌 보면 더 절실한 거야.” (방승아 위원장)
시공사인 삼성물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건축 사업을 진행했고, 6개월 만에 3150세대가 다 나가버렸다. 건물주와 시공사, 과천시는 상가세입자들에게 이주비나 이주대책은커녕 들어올 때 투자한 권리금과 시설비 체인비 등 피해보상 한 푼 없이 보증금만 받고 나가라고 했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서는 개발 사업을 재개발과 재건축으로 나누고 있다. 도로, 상하수도, 공원, 공용주차장 등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공급하는 기반시설인 공공 인프라의 양호 여부가 재개발과 재건축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그 기반시설이 열악한 노후 단독주택이 밀집한 지역에서 추진하는 재개발은 공공개발 사업으로 분류된다. 반면, 기반시설은 양호하나 노후·불량건축물에 해당하는 공동주택이 밀집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재건축 사업은 민간개발로 분류된다. 공익사업에 속하는 재개발은 토지보상법에서 규정하는 손실보상에 따라 세입자 보상규정이 적용되지만, 공익사업의 범주에 들지 않는 재건축사업은 토지보상법이 준용되지 않아 세입자 손실 보상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둔 같은 동네에서도 개발 사업 이름에 따라 보상을 받는 세입자들이 있는가 하면, 보상 한 푼 못 받고 쫓겨나는 세입자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원호, 「재건축지역 세입자 대책」, <재건축 지역 세입자 대책 마련을 위한 토론회> 참조)
▲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 본관 앞 과천철대위 농성장. 2020년 4월 [출처: 연정] |
그 젊은 아가씨가 청바지에 오줌을 쌌어요
“(용역들이) 책상 위에다가 칼 꼽아놓고, 우리 방에다가는 냉장고에서 고추장 꺼내다가 부어놓고 담배 꽂아놓고 이불 꺼내고 옷 꺼내서 물 부어놓고. 우리가 밖에 투쟁하러 가면 가스 불 다 열어놓고 그랬어. 안 나가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에는 유리창 깨고 창문으로 넘어와서 끌려 나갔지.” (김이옥 부녀부장)
이주비 50만 원이라도 받을 생각에 영업하던 가게에서 시작한 투쟁이 17년 까지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백여 명이 시작했던 투쟁을 지금은 두 명이 이어가고 있다. 50대 중반에 투쟁을 시작한 김이옥 씨는 70대 초반이 되었고, 30대에 투쟁을 시작했던 방승아 씨는 김이옥 씨가 처음 투쟁을 시작했던 그 나이가 되었다.
“난 나보다 우리 부녀부장님 보면 더 가슴이 아파요. 젊었을 때부터 할머니 되는 모습까지 지켜본 거잖아요. 투쟁한 날보다 살날이 훨씬 짧다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고, 생활고까지 겹치시고 하니까 그게 참...”
두 사람은 지난 17년 동안 시공사인 삼성물산 용역과 삼성에스원 직원, 경찰들로부터 셀 수도 없이 많은 폭력과 고소·고발을 당했다. 2012년에는 방승아 위원장과 함께 옷가게를 했던 방 위원장의 동생 방준아 씨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취임 25주년 기념 행사장 앞에서 삼성 경비들에게 폭력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삼성 경비들은 가죽장갑 낀 손으로 방준아 씨의 입을 틀어막고 끌고 가 인도에 쓰러뜨리고 머리와 몸통 다리 등을 짓누르고 목을 조르며 시간을 쟀다.
”세상에 오죽하면 젊은 아가씨가 오지게 틀어막고 다리를 잡고 저기 하니까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치면서 청바지에다 오줌까지 쌌어요. 기자들이 수십 명이 있는데... 그 상황을 보니까 너무 기가 막히고, 인간으로서는 진짜 할 수도 없는 짓을... 사람이 저렇게까지 할 수 있나...” (김이옥 부녀부장)
그 뒤로 방준아 씨는 자살충동을 느끼는 등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결국 시골에 내려가게 된다. 방승아 씨는 ‘생명력 없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 같은 동생 생각만 하면 너무 가슴 아프다고 했다. 삼성은 이러한 폭력을 집회 때 이야기하는 철거민들을 명예훼손죄와 업무방해 등으로 고소했다. 철거민들은 벌금 낼 돈이 없어 양로원 청소·설거지와 임대아파트 청소 등의 사회봉사를 해야 했고, 그 금액이 1500만 원 가량 된다. 투쟁 초기부터 빚을 내가면서 낸 벌금만 5천 만 원 이상 된다.
진짜 반성할 사람은 안하는데 자신이 한심한 거 같아
한번은 명예훼손죄 벌금 건으로 삼성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 하던 중에 두 명이 같이 검찰 유치장에 잡혀간 적이 있었다.
“구치소로 넘어가기 직전에 동지들에게 문자를 날렸어요. ‘동지들, 저희 갔다 오겠습니다. 당당하게 삼성과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 한 달 뒤에 뵙겠습니다.’ 근데 그 소식을 들은 지인이 대신 내주겠다고 나오라는 거야. 우리는 둘 다 그냥 당당하게 살다 나오려 했는데, 울면서 사정을 하시는 거야.”
그 지인은 열심히 싸우라며 두 사람을 다시 삼성 본관 앞에 데려다 주고 갔다. 그런가하면 너무 힘든 기관에서 사회봉사를 하다가 절반만 하고 나머지 절반은 빚을 내서 낸 적도 있다. 방승아 위원장은 사회봉사를 받는 대상은 열악한 환경에 있는 힘든 분들인데,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벌금형을 맞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이 ‘사회봉사’는 사실 강제노역이나 다름없는 거라고 했다.
“서류도 되게 복잡해요. 사회봉사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 재산이 없고 수입이 없어야 되니까 재산공개 내역도 떼어야 돼요. 그것도 자존심 상하고. 어디로 보내 주냐에 따라 다른데, 저는 찍혔는지 양로원도 제일 센 데를 배정 받아갖고 대형 식당에서 매일 의자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혼자 청소를 했어요. 노동 강도가 얼마나 센지 보호관찰소에서 보기에도 큰 일 나겠다 싶어 적당히 하라는데 적당히가 돼요? 나중에는 너무 힘들다고 오죽하면 다른 데로 빼주더라고요. 식당에서 일을 해도 밥을 내가 사먹어야 돼. 죄인이라고 식권도 안줘요. 진짜 반성할 사람은 안하는데... 내가 술을 먹었어? 사기를 쳤어? 우리가 투쟁하면서 어디 가서 점거를 한 것도 아니고 요기서 이 형태로 집회한 거예요. 다 그거에요. 그렇지만 저도 우리 부녀부장님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사회봉사를 했어요.” (방승아 위원장)
“(사회봉사를 할 때) 한겨울에도 있을 데가 없어가지고 점심시간이나 잠깐 쉬는 시간에 주차장에 있어야 돼. 아, 생각을 해봐요. 아침 9시에 가서 카메라 앞에 서서 사진 찍고, 2시에 또 사진을 딱 찍어서 보호관찰소로 보내요. 6시에도 사진 또 찍어 보내고. 그게 제일 비참하더라고. 중간에 한번씩 일 잘 하고 있는가 보려고 보호관찰소에서 사람이 나와. 그거.. 아유.. 자신이 엄청 좀 그렇잖아요. 이것도 오래 허다 보니까 너무도 자신이 좀 한심한 거 같고. 아유. 그냥 좀 누구한테 얘기 하는 것도 그렇고.“ (김이옥 부녀부장)
방승아 위원장은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 나온 벌금도 사회봉사로 대체하려고 검찰청에 사회봉사 신청을 하러 갔다고 했다. 그러느라 ‘삼성피해자공동투쟁’ 회의 참석을 못하게 되면서 그 사유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삼성피해자공동투쟁’에 함께 하는 이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생각보다 벌금이 적게 나와 다행이라는 방위원장의 말에 ‘삼성피해자공동투쟁’ 활동가들은 웃을 수가 없었다.
“17년 투쟁하는 동안 삼성과 경찰에서 수없이 많은 고소 고발을 당하셨다고 해요. 그동안 그 벌금 때문에 양로원이나 복지관처럼 일이 제일 어렵다는 곳에 가셔서 화장실 청소, 설거지 등을 하셨다는 이야기가 너무 가슴 아팠어요. 이제 더 이상 그런 힘든 일은 안하셨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벌금 후원을 제안한 조이희 씨(‘평등교육실현을위한전국학부모회’ 소속, 삼성피해자공동투쟁 활동)는 과천 철거민 벌금 문제 해결과 함께 이 투쟁을 알리는 계기도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이야기한다.
“동지들은 벌금 목적도 있지만, 우리한테 힘내라고 해주시는 건데요. 벌금 모금을 해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다른 우리 철거민 동지들한테 죄송하기도 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마음이 편치 않기도 하고. 철거민은 투쟁기금을 모은다는 자체가 없다보니까 이게 너무 낯선 거야. 우리는 세금은 못 내더라도 투쟁 관련해서 먼저 돈을 감당해가면서 온 거니까. 여전히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철거민 동지들이 너무 많아요.” (방승아 위원장)
▲ 과천철대위 벌금 모금을 위한 웹포스터 [출처: 삼성피해자공동행동] |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봐도 포기할 수 없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데, 강산이 두 번 바뀌는 20년이 다 되어가건만 문제가 해결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과천3단지 재건축 시공사로 과천시청의 중재 하에 철거민들에게 두 차례나 해결 약속을 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삼성물산은 이제는 자신들과 무관한 일인 양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과천3단지 재건축 인허가를 해주었던 과천시청도 마찬가지다. 김종천 현 과천시장은 과천시청 앞에서 피켓팅 하는 과천 철거민들에게 다가가 먼저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시장 면담을 요구하자 절차 운운하며 면담을 회피하는 것에 격분한 철거민들이 거세게 항의를 하자 마지못해 시장 면담이 이루어졌지만, 김종천 과천시장은 삼성이 아무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며 삼성 핑계만 댔다고 한다.
“과천 정부청사 앞마당에다 정부에서 저렴한 임대아파트 짓는다 그랬더니 과천에 집 가진 사람들이 집값 떨어질까 봐 똘똘 뭉쳐 못 짓게 하고 있어요. 지금 서민들이 내 집은커녕 전세도 못 들어가고 있는데, 과천시장이 천막 본부까지 차리고 같이 반대를 하고 있어요. 우리가 천막 치면 용서하겠어요? 가만 안 놔두지. 우리가 겨울에 밥 해먹으려고 접어다 폈다 하는 천막 하나 치니까 용역 불러다가 다 짓밟은 게 과천시청이거든. 있는 사람들은 참 단합도 잘 하더라고요. 여기 세입자들은 움직이면 세도 안줄까봐. 목소리도 못내요. 이렇게 기가 막힌 세상이 되어 버렸어.” (방승아 위원장)
말 하면서도 ‘이게 내 얘기인가?’ 싶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17년 투쟁했는데, 이제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이제 70대 50대인데 몸도 아프고 힘든데 언제까지 할 거냐고. 투쟁할 기력과 비용으로 다른 일 하면 되지 않느냐고.
“아니 어떻게 17년을, 그 생각만 하면 끔찍해요. 지금은 3년 허라 그런다 해도 못 할 거 같어. 우리가 당한 일은 남편한테 얘기를 허고 자식한테 얘기를 해도 안 믿어요. 어디 삼성이 그럴 수가 있냐고 그려요. 애들한테 특히 우리 딸한테 미안해요. 당뇨에 갑상선에 몸이 많이 피곤하고 힘들어요. 요즘처럼 눈 와서 길이 미끄러우면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너무 무서워요. 요즘은 옛날 같으면 투쟁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피곤하냐 피곤하냐 하면서 ‘아, 70이지. 아이구.’ 나이 먹어놓으니까 얼마나 더 살 수 있을라나 그런 생각이 들면 서글퍼. 내가 어떻게 이렇게 투쟁을 했나. 투쟁헌거만큼 살수 있을라나. 그래도 해야죠. 못 물러나지요. 물러날 수가 없지.” (김이옥 부녀부장)
“정말 내가 일상생활을 언제 해봤는지 잘 모르겠어요. 가족들한테 미안하니까 집에 가면 또 최선을 다해야 되고. 평범한 삶을 좀 살았으면 좋겠어요. 근데 아무리 돌이켜 생각을 해봐도 포기할 수는 없어요. 우린 단 몇백만 원이 없어 빚내서 너무 절실하게 장사해서 먹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에요. 17년 동안 내가 억울했던 거 그래서 주장하고 투쟁했던 그 모든 걸 포기한다는 건 내가 잘못된 길을 걸었다는 게 되잖아요. 투쟁을 포기하는 거는 우리 삶을 포기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를 못하겠어요. 우리는 특별한 새해보다 제발 이 문제가 좀 해결됐으면 좋겠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옆에서 투쟁하는 보암모(보험사에대응하는암환우모임)나 다른 피해자들도 똑같은 입장이니까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결단을 좀 내렸으면 좋겠어요.” (방승아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