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현상은 비제도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최근 미래구상, 다함께를 중심으로 아무런 좌파적인 원칙도 없이 진보대연합이라는 신기루가 정치권 안팎으로 번져가고 있다. 이명박-박근혜의 선거캠프 출범이 임박했다느니, 신당창당 시기를 가늠하고 있다느니, 4.13 조치에 따라 생길 정치적 반사이익을 고려하며 제도권이든 비제도권이든 대어낚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양극화 해소를 빌미로 하든 평화세력을 빌미로 하든 4 .13 조치를 미끼로 하든 남북정상회담을 미끼로 하든 한미자유무역협정 반대를 빌미로 하든 기존의 정치적 헤게모니 샅바싸움을 하며 정치가 대어낚시용 이전투구에 올인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가관인 것은 무늬만 신자유주의 반대를 외치는 민주노동당의 행태다. 이 행태는 한미자유무역협정 반대를 제2의 6월항쟁이라고 주장하는 민생정치모임의 행태와 별반 다를 게 없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의 타결 혹은 부결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문제는 신자유주의라는 불길에 기름을 붓기 시작한 한미자유무역협정이고, 이로 인한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이 파탄날 미래일 뿐이다. 3불정책 고수든 한미자유무역협정 타결이든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며 좌충우돌하기 일쑤고 한미자유무역협정 피해를 정부가 부풀린다고 회의 도중 퇴장한 노무현 정권에게도 싹수는 그저 노랄 뿐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좌파는 현 지형에서 정치적 공간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가? 반신자유주의 전선 구축을 위한 입질이라도 할 준비는 되어 있는가? 전 지구적으로 미-영-일-한국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전선이 압박을 가하고 있는 지금, 한국의 좌파는 엄숙주의와 이데올로기적 혹은 담론적인 비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권력쟁취를 향한 여러 정파들의 낚시대회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하지만 정치적 공간의 확보는 현 시점에서 난망해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1997년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자본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고 노동 스스로 이제는 자본이 되고 말았다. 성장은 자본의 성장이면서 동시에 노동의 성장이었고 임금의 상승이었을 뿐이다. 쌍용자동차노조의 경우처럼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이제 노동운동의 적대가 아니다. 노동운동의 적대는 바로 노동이므로 노동운동은 자본이 아니라 이제 노동 스스로에게 일침을 놓아야 한다. 자본을 매개하는 노동, 자본의 촉매제인 노동이 아니라 자본으로도 노동으로도 매개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양산되는 현실에 주목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좌파가 적대를 발견하는 첫 번째 길이다.
이러한 계급적 인식 위에서 좌파는 범국본의 일부라도 조직적 혁신을 이루어내는데 매진해야 한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좌파를 제외한 다른 정파들이 입질해대는 수은중독의 대어일 따름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올 한 해 한미자유무역협정이 만들어낼 파장 안에서 반신자유주의 전선연대체를 구축하는 것이다. 진보대연합이 신기루라면 반신자유주의 전선연대체는 신기루를 몰아낼 구체적인 정치적 몸체가 될 것이다.
좌파 앞에는 다양하고 강고한 적대전선들이 형성되어 있다. 자본의 분신으로 전락한 노동, 자본의 집행위원장인 국가, 시장전체주의를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자본, 규제완화를 요구하는 국내외의 자본, 주권이라는 미명 하에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를 은폐하는 소비자 및 소비물신주의 등 적대의 지점들이 좌파 앞에는 널려 있다.
자본주의사회 안에서 적대의 지점을 명확하게 하고 좌파의 전투지도를 그리며, 그 전투를 구체화할 좌파의 프로그램과 아젠다를 결정하고 액션플랜을 조직하는 일은 좌파의 임무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을 계기로 반신자유주의 전선체 구축에 나서자. 좌파는 이제 운동의 초기설정 단계에 돌입해야 한다.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시대는 끝났다. 한국사회의 노동운동,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변혁의 물꼬를 터야 한다. 기존의 구태의연한 방식으로가 아니라,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길을 열면서’ 노동자-다중이 수평적으로 참여하는 네트워크 방식으로 운동체가 구축되어야 한다.
그리고 내침 김에 좌파의 수사학을 마련하자. 분배와 성장이라는 이분법, 양극화 해소같은 정부와 민노당이 똑같이 사용하는 담론시스템을 과감하게 버리고 사회적 공공성, 행복 등을 좌파의 수사학으로 사용하자. 사회정책을 중시하는 사회투자국가 등 신자유주의 공세로 구멍난 솥을 땜질하는 수준을 벗어나자. 신자유주의 공세로 말미암아 복지국가가 복지체제로 변한 시점에서 뜬금없이 복지국가를 주장하며 땜질을 시도하는 모든 시도들에 저항하자.
서유럽에서 사민주의는 붕괴했다. 남미에서는 좌파정권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이러한 국내외적인 이념지형의 변화를 고려하며 왜 좌파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자. 좌파는 과연 행복하고 이 땅의 노동자-농민은 행복한가라는 기본적인 질문부터 던지자. 이것이 좌파가 입질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다. 초기설정의 성패 여부가 좌파의 5년, 10년, 15년 후의 미래를 결정한다. 좌파들이여, 총단결하여, 입질을 시작하자!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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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재 님은 대구카톨릭대 교수로 본 지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