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도, 국민에 대한 신의도 없는 노무현 정부"

한미FTA 재협상 가시화.. 민망하니 조건부 수용인가

한미FTA 재협상이 가시화 되고 있다.

미국 측은 재협상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고,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여전히 ‘재협상 불가’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허세욱 열사의 분신, 다수 국민들과 수많은 노동사회 단체들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협상을 강행하며, 48시간 연장의 초치기 협상에, ‘美TPA 시한 내 묻지마 타결’을 선언했던 한국 정부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미국의 신통상정책 합의.. 재협상 논의 점화

지난 주 미국 행정부와 미 의회가 신통상정책(The New trade Policy)에 대한 합의 내용이 공개됨에 따라 한미FTA의 재협상 논의도 구체화 되고 있다.

미국의 신통상정책은 노동, 환경, 의약품, 정부조달(노동 관련), 항만 안전, 투자, 근로자 훈련지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나아가 미국과 FTA를 맺거나 맺으려는 국가에 대해 국제노동기구(ILO) 노동 기준 준수 의무화를 강제하고 이를 위배했을 때 대상국가에 무역 보복 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페루와 파나마를 구체적으로 언급했으나 현재 협상이 완료 돼 미 의회에 계류 중인 FTA 대상국은 페루, 파나마, 콜롬비아, 한국 등 4개국이다. 사실상 한미FTA '재협상 요구'는 정해진 수순인 셈이다.

그리고 한미FTA 협상에서 메신저 역할을 했던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15일 "한. 미 양국은 노동과 환경기준 글로벌 리더로서 신통상정책을 FTA에 반영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며 "몇 주 안에 재협상에 착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상 ‘한미FTA 재협상’이라는 미국 측의 요구를 가시화 시켰다.

정부의 입장은 여전히 ‘재협상 불가’로 강경하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은 16일 외교부 청사에서 가진 내외신 브리핑에서 "우리는 재협상 사안이 아니라는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종훈 수석대표도 16일 머니투데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미국 측이 협상의 균형을 깨는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협상을 깰 수도 있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지난달 2일 타결한 한미FTA 내용은 공식서명이 담긴 협정문이 아닌, `사실상 합의 발표`로 법적 구속력은 없다.

결국 한미FTA의 실질적 타결은 미국 의회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한국 정부가 이런 미국의 '재협상' 요구를 거부 해, 미 의회가 한미FTA 비준을 거부할 경우 한미FTA 타결은 표류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결국 정황 상 한국 정부가 협상에 나설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어떤 명분을 갖고,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가이다.

스리슬쩍 등장한 조건부 재협상 기류

그러나 16일 '재협상 불가'의 강경 일변도 이었던 정부 관계자들이 입장 변화의 조짐들을 곳곳에서 드러냈다.

동 인터뷰에서 김종훈 수석대표는 “미국 측에서 아직 재협상에 대한 공식적인 요구를 해오지 않았음”을 전제 한 뒤, "힘들게 균형을 맞춰 타결한 협상에 대해 미국 측이 재협상을 요구하더라도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재협상은 없다’가 아니라, ‘조건부 재협상’으로 정부의 입장이 선회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재협상 불가‘에서 ’일방적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으로 무게가 옮겨졌기 때문이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도 마찬가지다. 16일 가진 기자 브리핑에서 “재협상 불가”에 대한 “확고한 입장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정부는 FTA 협상 결과의 균형이 반드시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익의 균형’이라는 전제를 달며 재협상의 가능성을 열어 둔 셈이다.

또한 일각에서는 ‘과감한 개방을 통해 경제구조를 고도화하기 위해 우리 정부와 국민 모두 한미FTA를 제대로 봐야 한다’며 재협상 거부로 한미FTA가 좌초돼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정부가 ‘재협상 불가’의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자처하고, 고위 관계자들의 발언을 통해 표면적으로 ‘재협상 불가’를 공언했지만 사실상 ‘조건부 재협상’으로 선회하고 있는 기류를 감지할 수 있다.

실제로 16일 오후 복수의 언론들은 정부가 재협상 요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응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실상 정부는 ‘재협상’의 테이블에 이미 나가 앉은 셈이다.

무릎 꿇은 정부, 왜 그렇게 ‘재협상 불가’를 외쳐왔을까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도본부(범국본)는 16일 논평을 통해 “재협상에 나서는 자존심도 없고, 국민에 대한 신의도 없는 노무현 정부”를 강하게 질책했다.

범국본은 “‘재협상 불가’에서 ‘재협상 수용’으로 번복하기는 민망하니, ‘조건부 수용’을 경유해서 결국 미국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며, “한미FTA는 ‘재협상’이 아니라 원천 무효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선범 범국본 언론국장은 정부가 지금까지 ‘협상 불가’를 외쳐온 이유에 대해 "면피용을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해석했다. 이어 “재협상의 사안들이 국내 자본들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방점을 찍었다.

자동차나 쇠고기 등은 제외하더라도 사실상 현재 미국의 신통상정책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인 노동기준 강화 등은 국내 재벌들도 분명히 반대할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국내 분위기를 무시하고 미국의 재협상 요구를 순순히 나섰을 경우 일게 될 내부 반발이 한국 정부도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해석이다.

사실상 미국의 신통상정책 원칙에 근거해 합의할 경우 삼성과 같이 무노조를 주창해온 재벌들의 반발이나, 현재 합법노조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교수노조나 공무원 노조들에 대한 재논란이 불거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선범 국장은 “재협상에 들어가면 한미 양국은 지금까지 스스로도 지키지 않아 왔던 노동기준이나 환경기준에서는 ‘면피성 합의’를 하고, 실제로는 쇠고기와 자동차 분야에서 미국 측의 추가 이권을 논의하는 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노동권과 환경권은 FTA 추진 여부와는 관계없이, 어느 나라나 지켜야 하는 보편적 기준이며, 이는 한미 양국이 즉각 이행해야 할 사안이지, FTA 협상과정에서 논의될 ‘거래’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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