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를 요구하는 열기로 온 사회가 뜨겁게 달아올랐던 80년 대 중반, MBC에서는 '제5열'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이 드라마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냉혹한 킬러(한진희 분)와 이를 쫓는 형사(이영하 분)의 대결구도로 진행된다.
제목이 '제5열'인 이유는, 킬러는 허수아비일 뿐 이를 배후에서 조종하며 사회전복을 노리는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Z'(이근형 분)라는 등장인물에서 유래된다. 이 드라마의 결말 부분까지 'Z'는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변조된 전화 목소리만 나올 뿐이다. 만화 '가제트 형사'의 숙적 '클로 박사'와 같은 캐릭터다. 이 드라마는 'Z'가 이영하의 상사였음이 밝혀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드라마에서처럼 '제5열'이란, 배후에서 조종하는 인물 혹은 내부의 첩자를 의미한다. '제5열'이 이런 의미로 쓰이게 된 건, 1930년대 발생한 스페인 내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시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에 대항해 4개 부대를 이끌고 마드리드 공략작전을 지휘한 파시스트 반란군 측 에밀리오 몰라 장군이 "마드리드에 위장 잠입해 우리들과 내응하는 제5부대에 의해 마드리드는 점령될 것"이라고 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학생들까지 이용해 광우병 괴담 조장".. 누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을 비판하는 전국민적 저항이 거센 요즘, 한국에도 '제5열'이 판을 치고 있다고 한다. 정부와 보수언론의 주장이 그렇다. 이들이 최근 광우병 파동의 배후로 지목하는 세력은 한나라당을 제외한 다양한 세력이지만, 예의 '좌파'는 특히나 자주 언급된다.
지난 7일 열린 청문회를 통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이계진 한나라당 의원은 "순진한 어린 학생들까지 이용해서 (광우병) 괴담을 조장하고, 정치적 선동거리로 접근하려는 일부세력이나 야당의 행태는 과유불급이라고 본다"며 "책임을 느껴야한다"고 '일부세력'이 청소년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동아일보'는 지난 5일자 '다시 촛불로 재미 보려는 좌파세력' 제목의 사설을 통해 "(좌파 단체들은) 미국 소를 전부 광우병 소로 단정하며 '미친 소 미친 협상 광우병 쇠고기는 청와대로' 등 원색적인 표어를 외치는가 하면 '중고생이 촛불 집회에 자발적으로 참가하고 있다'며 청소년들의 동참을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이어 "좌파진영이 '반 미국산 쇠고기' '반 이명박'의 깃발 아래 다시 뭉치려 하고 있다"며 "이들은 국민을 걱정하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퍼뜨려 오히려 사회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앙일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중앙일보'는 촛불집회를 제안한 '미친소닷넷' 등 일부 웹사이트 운영자들을 추적해 이들의 성향이 '진보좌파'라고 보도했다. 어떻게든 '진보좌파'와 엮어보려는 이들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노력이 지나치다 보니 중앙일보는 황당한 오보까지 내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지난 7일 '미친소닷넷, 수입 개방 후 결성... 중고생 참여 끌어내, 촛불집회 주도 세력은' 기사를 통해 "(미친소닷넷) 사이트를 처음 개설한 윤 모 씨는 2005년 진보좌파 성향의 언론 매체인 '민중언론 참세상' 창간 발기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른 오보로, 윤 모 씨는 '민중언론 참세상'의 창간 발기인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 지난 5월 9일 촛불문화제, 이 많은 촛불의 배후는 누구일까?[참세상 자료사진] |
"정부, 거짓말을 해도 거짓말 나름이지.."
정부와 보수언론이 이처럼 황당해 보이는 '배후설'을 제기하는 데에는 무슨 근거가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9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미 쇠고기 수입 개방 반대 촛불집회에 나가봤다. 이날 청계광장에는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한목소리로 '미친소 너나먹어'를 외쳤다.
"태어나서 집회는 물론이고 촛불문화제에도 처음 참석해봤다"는 직장인 김현석 씨, "어떻게 나오게 됐냐"고 묻자 "황당해서 나왔다"고 짧게 말했다. "무엇이 황당하냐"고 다시 묻자, 김 씨는 "거짓말을 해도 거짓말 나름이고, 변명도 변명 나름 아니냐"며 "처음부터 끝까지 정부가 어떻게 그렇게도 당당하게 광우병 소가 안전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지, 이에 대해 너무 화가 나서 나와 봤다"고 답했다.
"배후세력"에 대해 물어봤다. 김 씨는 그냥 피식 웃었다. 그는 "언론에서 이번 광우병 반대에 배후세력이 있다고 얘기를 하는데, 그게 사실이면 배후세력도 다 밝히고, 조종당한 사람들이 누군지도 다 밝히면 될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아이들 눈동자 보면서 거짓말하면 안 되잖아요"
아이들과 함께 이날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주부 이소영 씨는 "배후 세력이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라며 질문을 던지자마자 "그건 억지죠"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내가 누구한테 끌려나온 게 아니고, 당연히 마음이 끌리는 대로 나왔다"며 "(인터넷) 검색해서 어디서 모이는지 (직접) 알아보고 나왔다"고 덧붙였다.
이소영 씨는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없냐"는 질문에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착한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이들 눈동자 보면서 거짓말하면 안 되잖아요"라고 말했다.
직장인 김현묵 씨도 "나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의미 있는 행사에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나왔다"며 "정부나 소고기 수입 결정한 사람들은 그렇게 (배후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누구한테 부탁 받고 나온 거 아니다"고 말했다.
김현묵 씨는 "미국 아이들이 먹는 급식도 24개월, 20개월 미만 소만 먹는다고 하고, 세계적인 기준으로도 30개월 이상은 문제가 있다고 한다"며 "그런데 그걸 우리 아이들한테 먹인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청소년들의 반응 역시 비슷했다. 이름을 밝히길 꺼려한 중3 여학생은 "(배후설) 너무 어이없어요. 왜 학생들을 그렇게 (어리석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미국인들도 못 믿고 못 먹잖아요. 근데 우리가 왜 먹어야 돼요?"라고 반문했다.
▲ [참세상 자료사진] |
정부, 솔직히 얘기하라... '무섭다'고
이날 청계광장에서 기자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이들은 10여 명에 불과했다. 3만여 명 중에 10여 명을 만나서 정부가 얘기하는 '배후'의 정체를 밝히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또 진짜 '제5열'이라면 이런 곳에 나오지도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시민들을 만나면서 기자는 이들을 모이게 한 배후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단, 그것은 정부 여당과 보수언론이 주장하는 그런 정치세력은 아니었다.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이 지적했듯, 그같은 주장은 자신들의 분수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얘기다. 강 의원은 7일 청문회에서 이계진 의원을 향해 "정치인들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국민이 없다"며 "얼마나 정치인들을 불신하는데, 정치인들이 선동한다고 나오겠냐"고 일갈한 바 있다.
아마도 정부와 보수언론도 '진짜 배후'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얘기를 하지 않는다. 정부는 터무니없는 '괴담'으로 국민들을 바보 취급할 게 아니라 이제라도 솔직히 고백해야한다. 그 '진짜 배후'가 무섭다고, 자신들을 정조준하고 있는 '국민들의 분노'가 무섭다고 말이다. 그리고 사죄해야한다. 그것만이 자신들이 비난하는 이전 정부와 같이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