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등학생·대학생과의 대화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 현실이라는 마음의 병 (1)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이리 날뛰고 저리 후리고 다니던 지난 세밑에 나는 미디어행동네트워크(미행) 취재진과 함께 경상북도 구미와 경산에 내려갔었다. 취업을 앞둔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이 시대 청춘들은 무엇을 고민하며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 영상으로든 글로든 기록해 보자는 계획이었다. 영상 찍는 재주 없이 수첩과 사진기만 달랑 든 채 미행 취재진을 따라갔던 날은 남쪽 지방답지 않은 찬바람이 씽씽 볼 살을 썰어 대던 어느 추운 날이었다.

취재를 끝낸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 세밑의 남은 날들을 이런저런 송년회로 겪어 치우다 보니 몸이 영 못쓰게 되어 가기 시작했다. 수첩에는 괴발개발 기록한 것들이 산더미였지만 나는 글 한 편 제대로 써 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내리 술만 퍼먹었다. 술 퍼먹다 보니 여기저기서 말 실수도 숱하게 했고, 지금껏 조심스레 다져 왔던 몇몇 인연들도 무심히 저버리고 말았다. 몸이 망가진 것보다 마음속이 흉측하게 일그러져 버린 것이 더 큰일이라고 생각한 나는 글쓰기고 뭐고 손을 놓아 버리고는 수첩을 가방 속에 처박아둔 채 술을 끊고 몇 주일을 보냈다.

오랜만에 다시 수첩을 펴고 며칠에 걸쳐 내용 하나하나를 정리하면서,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몸담고 있는 글쓰기 모임에서는 새 작업을 시작한다며 꼭 나오라고 거푸 연락이 왔다. 나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어쩌면 모임이든 작업이든 거리낌없이 집어치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선 묵은 빚을 마음속에서 후련히 비워 내야 했다.

수첩에 적힌 내용을 조금씩 컴퓨터로 옮기며 그때 만났던 학생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미행 취재진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 와서 미행의 이름으로 글을 내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그냥 내 이름 붙이고 내키는 대로 글을 쓰기로 했다. 정리해 보니 제법 많은 양이 나왔다. 학생들이 했던 말을 한줄 한줄 되짚어 옮겨 쓰다 보니 내가 그때 수첩에 바삐 볼펜질을 하며 떠올렸던 생각들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지방에서 살고 있는 학생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기획한 취재였지만 서울 지역 학생들과는 따로 만나지 않았기에, 서울과 지방에서는 청춘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비교해 볼 수는 없다. 이는 경북 어딘가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진솔한 이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취재진과 고등학생들

2008년 12월 26일, 경북 구미 전교조 사무실, 19:00
XX 공업고등학교 학생들 4명, 선생님 1명
학생들은 고3 여학생 1명, 고2 남학생 2명(각각 ㄱ과 ㄴ으로 구분), 고3 남학생 1명

고3 남 : 학교에서 ‘맞춤형 프로그램’이라는 걸 하거든요. 10월부터 취업했어요. 나간 지 두 달 정도 됐나? 조그만 중소기업이에요. 지금은 수습기간이구요.

맞춤형 연계 프로그램은 공업고등학교와 지역 중소기업을 교육부가 짝지어 주어서 학생이 바로 중소기업으로 취업할 수 있게끔 도와 주는 프로그램이다. 중소기업 명단은 학생들이 내미는 의견을 받아들여 정한다고 한다.

고2 ㄱ : 저는 내년에 취업 준비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고3 여 : 다른 일 좀 하다가 몇 년 후에 대입 준비하려고 해요.

선생님 : 요즘 공업계 고등학교 학생들 취업이 어려운 시기입니다. 70% 정도는 2년제 대학으로 진학합니다. 교육부가 주관하는 ‘맞춤형 프로그램’을 통해 중소기업과 연계돼서 학생들을 보내고 있어요. 소수 학생들은 삼성 같은 대기업 생산직으로 가고, 대부분은 전문대로 가죠. 빨리 돈을 벌어 가계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 학생들이 주로 공업계 고등학교로 와요. 근데 취업을 원해도 여건 때문에 포기하는 학생들도 있고, 의욕이 없어서 진로에 대한 뚜렷한 방향 없이 주변 학생들 따라서 대학에 가 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셈이죠.

취재진 : 취업을 하려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고3 남 : 사회에 빨리 진출하고 싶어요. 사회로 나가서 무엇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깨달은 다음에 대학에 가고 싶어요.

취재진 : 흔히들 대학에 가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정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사회 통념과 반대인 것 같은데?

고3 남 : 인문계 학생들은 기술이 없으니 대학 진학 말고는 길이 없어요. 저희는 어느 정도 기술 수준이 있으니 취업을 일찍 할 수가 있죠.

취재진 : 그럼 왜 취업을 일찍 하려고 하나요?

고3 남 : 가정 형편도 어렵긴 어려운데, 처음부터 취업을 목적으로 학교에 입학했고, 지금도 후회는 없어요. 어차피 대졸자들도 실업자 많은데......

고3 여 : 저는 학교에서 피부 미용을 전공하고 있는데, 제 적성에 별로 안 맞아요. 그래서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까지 일을 하면서 나중에 대학을 가려고 해요. 대학 진학은 중요한 거니까 좀 더 오래 고민을 하려고 시간을 벌고 있어요.

취재진 : 요새 아르바이트는 어때요? 어떤 경험들이 있나요?

고3 여 : 메이커 있는 식당에서 서빙 했었고, 전공 살려서 미용실에서도 일했었어요. 다른 곳은 최저 임금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데 미용실 같은 경우는 최저 임금이고 뭐고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용돈 벌이도 안 되니까 얼마 안 돼서 그만두는 경우가 많죠. 서빙 시급은 3800원이었구요. 미용실은 경력에 따라 다른데, 경력이 있으면 3000원, 없으면 2600원 줬어요.

고2 ㄴ : 2년 전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전단지 돌리는 알바를 했었어요. 한 장에 5원씩 받았는데 하루 종일 돌려도 5000원 정도밖에 못 받았어요. 1주일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뒀어요. 모집 공고에는 시간제로 돈 준다고 했는데 막상 가서 일하니까 장당 5원씩 쳐주더라구요. 면접도 봤는데, 전단지 버릴 건지 안 버릴 건지를 물어봤어요.

취재진 : 친구들 중에 알바 하다가 부당하게 해고 당하거나 임금을 체불 당한 경우가 있나요?

고2 ㄴ : 제가 전단지 종일 돌리고 5000원 받았는데. (웃음)

고2 ㄱ : 그런 경우 생각보다 많아요.

취재진 : 학생들 같은 경우는 노동 상담을 받을 기회가 없을 텐데 혹시 어디서 상담을 받아 본 적이 있나요?

고3 여 : 그런 건 각자 알아서 하는 거죠 뭐. 수습 기간 끝나면 시급을 올려주겠다고 했는데 나중엔 그런 말한 적 없다고 하고, 또 그러면 관두고, 학생들이라 무시하고...... 미용실에서 일하던 친구가 5개월 지나면 시급 올려주겠다고 분명히 들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원장이 그런 말한 적 없다고 하고......

취재진 : 근로계약서는 쓰나요?

고3 여 : 학생들은 그런 거 안 써요. 부모님 동의서랑, 보건소에 가서 받아 오는 건강진단서가 전부예요. 메이커 있는 곳에서는 건강진단서랑 부모님 동의서 다 받아요.

취재진 : 정직원과 아르바이트생 사이에 차별이 있나요?

고3 여 : 정직원에 비해 차별이 있죠. 알바는 돈 주고 내보내고 다시 구하면 되는데 정직원은 잘 안 구해져요.

취재진 : 또 다른 알바 경험이 있다면?

고3 남 : 엄마 친구 도와드린 적 있어요. 6시간 일하고 4만원 받았어요. (웃음)

취재진 : 학교 선생님에게 아르바이트에 대해 상담하는 학생들은 없나요?

선생님 : 거의 없습니다. 돈 못 받았다고 말하는 학생들은 없어요. 잘 얘기 안 합니다.

취재진 : 왜 선생님이나 학교에 말을 안 할까요?

고3 여 : 학교와 알바를 아예 별개로 생각해요. 대부분 부모님에게 이야기하죠.

취재진 : 그럼 부모님은 어떻게 하세요?

고3 여 : 그쪽에 전화 걸어서 많이 싸우시죠. 그러다 보면 해결될 때도 있어요.

선생님 : 졸업 후 취업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있는데 재학 중 알바에 대해서는 그런 게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알바에 대해서도 저 역시 별로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취재진 : 왜 알바에 대해선 부모님에게 이야기할까요?

고2 ㄴ : 그건 학생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인 것 같아요.

고3 여 : 선생님들도 학교 바깥 일은 저희들 일, 저희들 생활이라고 생각하세요. 근데 폭력이나 흡연 같은 경우는 학교에 신고가 들어오거든요. 학교에 피해가 오는 선까지만 학교가 관심을 가지고, 알바 같이 학교에 아무런 피해가 없는 건 신경 안 써요.

(여기서 새로운 고2 남학생이 끼어들어 함께 앉음. ‘고2 ㄷ’으로 적음.)

취재진 : 알바 할 때 호칭은 뭐라고 해요?

고3 여 : 미용실에서 일할 땐 점장님, 원장님, 디자이너 선생님 뭐 그렇게 불렀어요. 정직원 또래는 오빠랑 언니라 불렀고. 서빙 할 때는, 보이는 곳에서는 이름을 부르고 안 보이는 곳에서는 언니 오빠라 불렀어요.

고2 ㄷ : 저는 여러가지 알바를 했었어요. 술집 서빙도 했고, 일용직 노가다도 했고, 슈퍼마켓에서도 했고...... 사장님은 사장님이라 부르고 과장님 이하는 형이라 불렀어요.

취재진 : (고2 ㄷ에게) 알바는 어땠어요?

고2 ㄷ : 급여는, 이 정도 힘드니까 얼마는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정해진 일보다 더 많이 시키기도 하고...... 정해진 임금이 없는 것 같아요. 장사가 안 되면 기본 임금만 주고, 잘 되면 더 주고...... 편의점 시급이 3500원, 술집이 4000원 정도? 술집 같은 곳은 학생인데 몰래 일하니까 어디다가 하소연할 곳도 없어요.

취재진 : 주인이 미성년자인 걸 모르나요?

고2 ㄷ : 알면서 모른 척하죠. 학생이니 돈을 덜 줘도 되니까.

취재진 : 미성년자 고용은 법적으로 고용주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

고2 ㄷ : 그래요? 근데 그런 걸 가르쳐주는 데가 없어요. 가르쳐주는 데가 없으니 다들 모르죠. 학교에서는 공부를 해야 하니 일에 대한 것들을 가르쳐주지도 않고...... 그런 자세한 걸 어디서 교육 받아야 하는지 애매해요. 일에 대해 미리 인지를 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한 것 같아요.

취재진 :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게 뭘까요?

고2 ㄷ : 경찰들이 밤에 순찰 돌듯이 시민단체에서 정기적으로 알바 현장을 둘러보고 저희 같은 학생들과 얘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부당한 게 있느냐, 뭐 그런 것도 물어보면서 조치를 취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에겐 그런 얘기 못 해요.

취재진 : 성인 정직원들과 차별이 있나요?

고2 ㄷ : 같은 일을 해도 시급이 적어요. 처음엔 똑같이 준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저보고 어른보다 못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돈을 덜 줘요.

취재진 : (고3 남에게) 수습 기간 급여는 어느 정도예요?

고3 남 : 기본 급여의 80% 정도를 받아요.

취재진 : 수습 기간이 끝나면 정규직이 되는 거죠? 공장 안에 비정규직도 있나요?

고3 남 : 제가 다니는 공장엔 비정규직이 없어요.

선생님 : 대부분 영세 사업장이라 정규직으로 해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3 남 : 제가 다니는 공장엔 한 60여 명이 일을 해요.

취재진 : 근로계약서에 혹시 언제까지 근무한다는 얘기가 있나요?

고3 남 : 글쎄요. 제 기억으로는, 1년 뒤 재계약 한다고 했었나?

취재진 : 그러면 그거 비정규직인데?

(순식간에 고3 남학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림. 재계약 기간이 명시돼 있으면 100% 비정규직이라고 설명해 주니 학생은 안절부절 못 하다가 기어이 자리를 뜨고, 취재진은 그게 기간제 고용이 아니라 고용조건 갱신 조항일 것이라 애써 수습함. 하지만 고3 남학생은 끝내 돌아오지 않음.)

취재진 : 비정규직이 뭔지는 다들 아시죠?

고2 ㄱ : 뉴스에서 비정규직이 파업하는 거 많이 봤어요. 정규직은 쉽게 해고 못 하는데 비정규직은 해고할 수도 있고, 단기로 일 시킬 수도 있고......

취재진 : 정규직으로 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어요?

고2 ㄱ : 맞춤형 프로그램 취업 말고 일반 취업이라는 게 있어요. 그거 하려면 성적이 좀 좋아야 해서 준비를 하고 있죠.

선생님 : 일반 취업이라는 용어는 삼성전자 같은 곳에 취업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취재진 : 비정규직이 뭔지는 어떻게 알게 됐어요?

고2 ㄱ : TV 보고, 주변에서 말 듣고.....

고2 ㄴ : 부모님에게 들었어요. ‘비정규직 할 바에야 차라리 노가다를 해라’ 이렇게 말씀하세요. 아버지는 건설 쪽에서 일하시고 어머니는 휴게소에서 일하시는데요. 예전에 어머니가 다른 곳에서 정규직으로 일하실 때, 정규직이어서 함부로 해고 못 하니까 아예 출근하는 차편을 끊어 버려서 자진 퇴사를 유도하더라구요. 그래서 지금은 휴게소에서 일하시는데…… 직장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건 못 할 짓이라고, 정말 사람 미친다고 말씀하세요.

(아까 자리를 떴던 고3 남학생이 붉어진 얼굴로 다시 돌아옴.)

고3 남 : 저는 정규직이라고 분명히 알고 있는데요. 면접 볼 때도 분명 그쪽에서 정규직이라고 말했어요.

취재진 : 왜 그렇게 비정규직이 될까봐 흥분하는 거예요?

고3 남 : 정규직이라고 알고 들어갔는데 비정규직일지도 모른다니까, 언제 잘릴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들죠. 제 주변에도 잘려서 학교로 돌아온 애들이 있어요. 저는 취업을 목적으로, 절대 돌아올 일 없다고 하고 나갔는데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니까.....

취재진 : 주변 선배들 중에서도 비정규직이 있어요?

고2 ㄷ : 많죠. 보통 취업을 나가면, 맞춤형 연계 취업은 정규직으로 된다고 저도 알고 있는데, 대학 들어가서 취업하는 사람들 보면 다 비정규직이에요. 근데 막상 보면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별 차이도 없고.....

고2 ㄴ : 제가 알고 있는 선배는 맞춤형 취업 나갔다가 수습 기간에 박스만 접고 한 달에 80만원 받았어요. 2년 후에 재계약이었구요.

선생님 : 2년이 뭐냐 하면, 군복무까지 감안해서 2년간 유예 기간을 둔다는 거예요. 회사에서 제대 후 안 받아주지는 않는데 학생들이 회사로 복귀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취재진 : 장래희망이나 꿈 같은 것 없이 자신이 현실을 너무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고2 ㄴ : 장래희망이나 꿈 같은 말은 현실적이지 않잖아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요. 하나만 열심히 해도 잘 되기 어려운데 허황된 꿈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겠죠.

고3 여 : 어떤 기술을 배우면 그쪽에서 최고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현실적으로 안정을 생각하게 되죠. 결혼하고 애 낳은 다음에도 할 수 있는 일...... 지금 정규직도 불안한데 아무래도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하니까요.

고2 ㄷ : 제가 며칠 전까지 마트에서 일을 했는데 사장님과 취업에 대해 얘기하니까, 역시 장사하시는 분들은 오히려 냉정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네가 그 일을 했을 때 나중에 네 인생이 편할 것 같아?” 그런 질문을 들었죠.

취재진 : 그 ‘안정적’이란 것은 뭘까요?

고3 여 : 아직은 결정된 게 없어서...... 지금은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일하고 있어요. 형편이 어려우면 대학 갈 수도 없을 테니.

취재진 : 자아실현이나 꿈, 뭐 그런 것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고3 여 : 나쁘다고는 생각 안 해요. 제 주변에도 연예인 꿈꾸는 사람들이 있고, 대기업 사장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도 있고...... 제 꿈은 평범하게 사는 거지만 그런 꿈들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고2 ㄴ :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려고 해도 제도적인 이유나 경제적 이유 때문에 못 하는 경우가 많아요. 뭘 하려고 해도 돈이 걸려요.

고2 ㄱ : 현실을 조금 일찍 알았죠. (웃음) 뉴스를 즐겨 보다 보니까 알게 되더라구요. 제가 이건희 회장처럼 될 수도 없고......

고2 ㄷ : 저희는 학교 현장에서 서로가 라이벌이에요. 서로가 서로를 밟아야 위로 올라가요. 꿈을 꿔도 막상 해 봤는데 자기에게 안 맞으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꿈이 자기와 맞아야 꿈이지.....

취재진 : 그럼 꿈이 뭔데요?

고2 ㄷ : 저는 제 사업을 하는 게 꿈이에요. 내가 따라가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하는 사업이요.

취재진 : 정말 친구들이 라이벌이고 경쟁 상대인가요?

고2 ㄱ : 삼성전자에 원서를 쓰려고 해도 성적순이잖아요. 시험 때 보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서로 무진장 눈치를 봐요. 쟤는 얼마나 잘 봤을까.

고2 ㄴ : 교육제도가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아요. 친구를 자꾸만 라이벌로 보게 만들어요.

취재진 : 청년 실업 시대가 닥친 이유는 뭘까요?

고2 ㄷ : 일이 없지는 않아요. 자기 의지가 부족한 거죠. 돈이 필요한데 이 정도 받고는 못 하겠다고 생각하고선 일을 안 해 버리는 거죠. 일단 한 단계 눈을 낮춰서 취업을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고2 ㄴ : 제가 공장에서 일하고 고졸이면 누가 저랑 결혼하겠어요? 많이 배운 사람들은 ‘사’자 붙은 일만 하려 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힘든 일하고......

취재진 : 주변 친구들도 다 그렇게 생각해요?

고2 ㄴ : 네.

취재진 : 여러분들에게 비정규직이란 무엇인가요?

고2 ㄷ : 저는 막상 차이가 없다고 봐요. 일하는 목적이 돈 버는 거잖아요. 나쁜 사업체에서 비정규직을 대우 안 해 주는 거지, 비정규직 자체를 대우 안 해 주는 건 아니잖아요.

취재진 : 근데 현실은 비정규직이 제일 먼저 잘려 나간다는 건데......

고2 ㄴ : 비정규직은 보험도 안 되잖아요. 회사에서는 비정규직이니 다쳐도 보상 같은 건 안 해 주겠죠. 정규직이면 보상 받고 다른 일 준비할 수도 있는데.

고2 ㄱ : 저는 비정규직이 싫어요. 100만 원 받고 계속 일하는 것과 80만 원 받고 내일 잘리는 것, 이 둘 중에서 어떤 걸 택하시겠어요?

취재진 : 보험이나 임금 같은 어떤 논리적인 조건 때문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비정규직이 어떻게 다가와요?

고2 ㄱ : 제가 비정규직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어요. 근데 끌리진 않아요. 제가 비정규직이 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면 받아들여야죠.

고2 ㄷ : 비정규직과 정규직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거 같아요. 뉴스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나쁜 점을 부각시켜서 그런 게 아닐까요?

고3 여 : 비정규직이 불안하긴 해요. 사회가 더 발전하면 불안한 게 없어지긴 하겠죠.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어떤 점에서 다른지 학생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넘어감.)

취재진 : 만약 비정규직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면?

고2 ㄱ : 해야죠. 근데 일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계속 고민하게 되겠죠.

고2 ㄴ : 막상 정규직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보고 결정해서 거기 들어가겠죠.

고2 ㄷ : 저는 그냥 그 삶에 만족하며 회사 다닐 것 같아요. 사람이 사는 데 돈이 많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요. 다니다가 나랑 안 맞으면 나오면 되고......

고3 여 : 피치 못할 사정이면 하겠는데, 나중에 재계약 안 될까봐 불안하겠죠.

(고3 남학생은 끝내 고용 조건에 대한 의혹을 풀지 못함.)


학생들이 진지한 얼굴로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받아 적으며 마음속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어수선해지던 생각이 났다. 수첩에 적힌 내용을 컴퓨터로 옮기던 나는 그때로부터 시간이 적잖이 흘렀음에도 몹시 착잡해졌다. 현실과 비현실이라는 두 단어가, 실체도 개념도 의미도 알 수 없는 두 단어가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뭐가 현실이고 뭐가 현실이 아닐까? 아직 스물도 넘지 못한 학생들이 말하는 현실이란 무엇이고 내가 나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는 현실이란 무엇일까? 그 둘은 어떻게 다를까? 비정규직이라는 고용 형태와 그것을 마구 만들어 내고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얼개에 대해 하나도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은 제쳐 두더라도, 돈벌이가 되는 것 말고는 모조리 ‘허황된’ 꿈이라 여기며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청춘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가닥을 잡을 수 없었다. 제발 좀 현실적으로 평범하게 살라고 내게 늘 말씀하시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왜 현실이라는 말은 오로지 일자리와 돈과 집과 차와 결혼과 안정만을 뜻해야 할까? 나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동시에 내가 틀어쥐려 애쓰고 있는 이 현실은 그럼 현실이 아니고 무엇일까?

  취재진과 대학생들

2008년 12월 26일, 꽤나 늦은 밤, 민주노총 경북 경산 지구 협의회
경북대학교와 대구대학교 학생들
대구대학교 4학년 남학생 1명(사회학과), 4학년 여학생 1명(유아교육과)
경북대학교 3학년 남학생 2명(각각 사학과, 법과) : 사학과는 ㄱ, 법과는 ㄴ으로 적음.
(학년은 정확히 확인하지 않았음. 3학년 아니면 4학년. 남학생들은 군대를 마친 복학생.)

취재진 : 졸업 후 뭐 하고 먹고 살 거예요?

대구대4 여 : 저는 유아교육을 전공했는데 처음엔 부모님이 말리셨어요. 중노동인데 거의 최저 임금밖에 못 받으니까요. 더구나 임고(임용고사) 경쟁은 피 터지고......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해요. 보육 노동자로 살고 싶은데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경북대3 ㄱ : 사학과 입학할 때부터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선배들한테 많이 들었어요. 저보고 사학과 왜 들어왔냐고 했죠. 요새 사학과 학생들 중 90%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어요. 저는 근현대사 쪽으로 대학원을 가 볼까 생각 중이에요. 근데 대학원을 나오면 뭘 먹고 살아야 할지......

경북대3 ㄴ : 법과대학 들어갈 때만 해도 제가 뭐 하고 먹고 살지는 결정이 나 있는 줄 알았어요. 후배들에게 왜 법대 들어왔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공무원 시험에 도움이 될까 해서 들어왔다고 해요. 실제로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후배들 보면 전공 서적이 반, 공무원 시험 서적이 반이에요. 저도 법조계로 갈까 하고 들어왔는데 복학하고 보니까 막막해요. 공부도 부족한 상태에서 사법고시를 보느니 차라리 더 열심히 공부해서 다른 길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해요.

취재진 : 다른 길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길인가요?

경북대3 ㄴ : 로스쿨을 가든 뭘 하든, 지역 사회 시민 운동 같은 분야에서 뭔가를 하고 싶어요. 로스쿨에서 공부한 분야로 시민 사회에 진출해 제가 공부한 걸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어요.

취재진 : 주변의 다른 학생들은 어떤 선택을 하나요?

경북대3 ㄴ : 제 주변엔 취업자가 별로 없어요. 두세 명 정도? 한 명은 서울 금융계 쪽에 있고 나머지는 지방 금융계에 있어요. 그리고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고.....

대구대4 남 : 사회학과 동기들 중에는, 전공과 관련이 없는 통신사 같은 곳에 들어간 애도 있고 백화점에서 구두 판매를 하는 애도 있어요. 내 길이 아닌 것 같아도 집안 형편상 하는 거죠. 언제까지 이 길을 갈 수 있을까 많이 고민하더라구요. 대체적으로 직장이라는 조직과 자신이 가려고 하는 방향이 많이 엇갈리는 편이에요. 아무래도 집안 형편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대구대4 여 : 취직한 애들 얘기 들어보면, 아이들 만나는 건 좋은데 동료 선생님들과의 관계가 너무 힘들대요. 막 텃세도 부리고 임금 문제도 있고...... 임고도 일단 쳐 보고, 떨어지면 다른 길을 알아보는 편이에요. 40여 명 동기들 중 10여 명만 계속 공부하겠다고 하죠.

취재진 : 대학 사회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의식은 어떤가요?

경북대3 ㄴ : 나는 비정규직이 안 될 거다. 열심히 안 하니까 비정규직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죠. 제 동기 한 명은 제가 비정규직 관련 토론회를 같이 가자고 하니까 “나랑 상관 없는 일인데 내가 왜 가? 난 열심히 해서 정규직 될 거야”라고 말하더라구요.

취재진 :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삶에 대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나요?

경북대3 ㄴ : 아무래도 비정규직의 삶이 기다리고 있겠죠.

경북대3 ㄱ : 제 주변엔 두 부류의 학생들이 있어요. 사학과 전공 공부를 안 하고 취직이 잘 되는 다른 과를 복수 전공하는 부류가 있고, 사학과 공부를 계속하려는 부류가 있죠. 근데 공부만 하려는 애들도 앞으로 비정규직 되기는 싫고, 대학교수가 되려면 경북대 나와서는 안 되고...... 과에서 취업 설명회라도 하면 여군이나 교도관 같은 공무원 선배들이 와요. 대학생들이 비정규직 문제에 가장 민감할 것 같은데 막상 그 문제에 관련해서 뭔가를 같이 하자고 하면 안 한다고, 그냥 현실에 만족하며 살겠다고 해요.

대구대4 여 : 비정규직 집회에서 외치는 구호들이 언젠가부터 가슴에 확 와닿게 되더라구요. 제 미래 이야기니까요. 왜 보육 노동자들은 이런 대우를 받나 화도 나요. 임고 50대 1이라는 경쟁률을 이길 자신도 없고. 사립 유치원 같이 갑갑한 곳으로 갈 수도 없고. 차라리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현실과 싸우는 게 낫지 않을까......

취재진 : 졸업생들은 뭐 하고 살아요?

경북대3 ㄱ : 학원 강사 정도? 학원 선생님 하면서 돈 좀 버는 선배들이나 과에 오지 취직 안 되는 선배들은 후배들 잘 안 보려고 해요.

대구대4 남 : 언어 치료사나 특수학교 교사 정도?

경북대3 ㄴ : 졸업을 해도 자신은 비정규직이 안 될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경북대3 ㄱ : 세 가지 정도의 요인이 있는 것 같아요. 첫번째로, 자기는 비정규직이 결코 안 될 거라고 믿어요. 경쟁에서 이기면 된다는 거죠. 두번째로, ‘우리는 대학생이니까’ 하는 식으로 대학에 대한 환상 같은 걸 가지고 있어요. 그래도 대학생인데 어떻게 비정규직으로 일하냐 뭐 그런 식이죠. 세번째로는, 현실이 너무 비참하니까 아예 마주하고 싶지 않다, 등록금 4년 동안 삼사천만 원 쓰면서 비정규직 되려고 대학 들어온 거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있죠.

취재진 : 조중동과 이명박이 “일자리에 대한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경북대3 ㄱ : 사람들 눈높이가 높은 게 아니라 최소한도로 안정적이게 살고 싶은 거겠죠. 그걸 눈높이로 표현하는 건 굉장히 몰상식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취재진 : 등록금은 어떻게 해결해요?

경북대 3 ㄴ : 사회에 나가서 학원 수학 강사를 하는 선배가 있는데 자기가 가르치는 애들한테 이런 말을 한대요. “국공립 대학에 가는 게 효자다.” 아무래도 경북대는 국립대니까, 사립대인 대구대보다는 등록금 사정이 아주 조금 괜찮죠. 과외 하면서 돈 버는 학생들도 있고......

대구대4 여 : 2006년에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시급 2500원 받았어요. 요샌 학자금 대출은 기본이죠. 한 학기 등록금은 320만 원 정도구요.

경북대3 ㄴ : 알바 사장한테 최저 임금법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 매장 사정이 어렵다는 식으로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더라구요. 그러고는 하기 싫으면 나가라는 식으로 말하고......

대구대4 남 : 등록금이 너무 빨리 오르니까 군대도 미루고 무조건 빨리 졸업하려는 애들이 많아요. (자리에 있는 대학생들 모두가 자기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임) 2003년에 등록금이 220만 원이었는데 2008년엔 320만 원이 됐어요. 제대를 하고 보니 후회가 들죠. 아, 등록금 내고 군대 갈 걸!

경북대3 ㄴ : 입학할 때 입학금까지 합쳐 총 140만 원 정도 냈는데 지금은 200만 원 내요.

취재진 : 부모님들께서는 좀 어떠세요?

대구대4 여 : 우리 자식은 꼭 될 거라 생각하시고 공부 시키시는 거죠.

경북대4 ㄴ :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사람 구실이나 해라, 처자식 먹여 살리고…… 그렇게 말씀하세요.

대구대4 여 : 저희 부모님은 이젠 포기하셨어요. 처음엔 임고 보라고 하시다가 이제는 너 살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하세요.

취재진 : 취업 때문에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주변에 혹시 있나요?

대구대4 남 : 우울증까진 아닌데요. 술 먹고 담배 피우고 하는 애들은 있어요.

경북대3 ㄴ : 고시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그런 슬럼프가 있어요. 나이 먹고 고시 공부 빼고는 할 것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선 폐인처럼 살게 되는 사람들도 있어요.

대구대4 남 : 고시도 고시지만 4년 동안 공부만 죽어라 했는데 막상 이루어 놓은 건 없고, 그렇다고 제대로 놀지도 못했고, 낭만이 남은 것도 아니고, 되게 많이 허탈해 하죠.


수첩 속에 적힌 내용을 다 옮겨 놓고 보니 양도 많았지만 단순히 학생들과 대거리한 것만 긁어 와 덩그러니 글 한 편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학생들이 말한 현실이라는 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넉넉한 삶. 꿈이 돈 버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무엇보다도 돈이 있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이 뜻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먹을 것 먹고 입을 것 입은 채 지붕과 바람벽 있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기를 바랐다. 그 사람들이 갖추어 놓고 살고 싶은 것은 기본적인 인권이거나 최소한의 생활이지 돈이나 권력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바라는 것만으로는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그 고등학생들이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들은 꿈과 희망이란 것도 계급 혹은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그것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갈리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가난해요. 우리는 실업계 고등학생들이에요.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뭐든 우리는 돈을 벌어야 해요. 돈 벌어서 집안에 꼴아박아야 한다구요. 내가 살고 싶은 삶도 살아야 한다구요. 돈 없이는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할 수 없어요. 그게 현실이에요. 그들의 삶을 결코 대신해서 살아 줄 수 없는 내가 그들의 삶에 대해 섣부르게 옮고 그름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대학생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마도 실업계 고등학생들이 자기들과는 뭔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할 인문계 대학생들조차 삶과 현실을 고민하는 깜냥으로는 실업계 고등학생들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대학생들도 돈을 벌어야 했고, 돈 버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니, 요새는 돈 버는 일이란 원래 끔찍하게 어려운 일이라고 처음부터 다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젠 대학 나오면 취직하기 쉽다는 것도 다 옛말”이라고 대학생들이 자기 입으로 말하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고등학생들과 인문계 대학생들이 제각기 겪고 있는 상황은 사뭇 다를지 모르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현실’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저마다 벼랑 끝에 몰려 있다고,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고 느낀다. 돈과 일자리라는 튼튼한 동아줄을 잡고 버티다 보면 해와 달이 된 오누이처럼 호랑이를 피해 저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 나는? 내 꿈은 공상과학 영화나 유토피아 소설에 나오는 그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을까?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더 좋은 글을 꿈꾸는 나는 쓸데 없는 꿈만 꾸는 꿈쟁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사회 부적응자일까? 너무 날이 선 생각이라 여기며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속에 오래도록 처박혀 있었지만 차마 똑바로 마주하기 힘들었던 고민이었다.

지난 세밑에 취재한 것들을 컴퓨터에 옮겨 놓았지만 그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글쓰기 모임의 첫 기획 회의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잔뜩 짓눌려 가며, 아직 낫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이리저리 쏘다니기만 했다. (두 번째 이야기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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