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조립3팀 이익선 씨(가명)는 5월 말 우편으로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다. 함께 쌍용차에 다니던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아버지는 2006년까지 쌍용차에서 근무했다. 그는 2006년 52세의 나이로 희망퇴직 했다. 당시 1천여 명(비정규직 포함)이 희망퇴직 대상자였다. 2대가 함께 쌍용차에서 일했던 가족에게 회사는 아버지에게 희망퇴직, 두 아들에게는 정리해고를 선물했다.
세 번의 부도를 경험한 쌍용차 노동자
쌍용자동차의 역사는 1986년 쌍용그룹이 동아자동차를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코란도와 무쏘를 개발하면서 선전하던 쌍용차는 외환위기 당시 쌍용그룹의 몰락으로 1998년 대우그룹이 인수했다. 그러나 대우그룹도 무너져 1999년 12월 채권단주도의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2004년에는 정부의 주도로 또 다시 중국 상하이차가 인수했다.
상하이차가 인수하던 2004년 쌍용차는 이익잉여금 6천억 원을 벌어들이며 안정화에 들어섰다. 그러나 상하이차 인수 후 쌍용차는 신차개발이 더디기만 했고 작년 8월에는 기술유출 혐의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결국 쌍용차는 1월 법정관리를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혼자 죽지 않아”
86년에 입사한 최문익 씨(가명)는 “부도만 세 번을 경험을 했어. 부도가 날 때마다 구조조정 됐지만 쥐새끼가 쥐구멍에 도망치 듯 제대로 한 번 싸우지 못했어. 이젠 달라. 더 이상 쥐새끼가 아니야”라고 했다.
쌍용차는 몇 번의 구조조정을 겪었다. 노조는 그 동안 구조조정에 대항하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큰 투쟁이 벌어진 것은 처음이다.
김병준 씨(가명)는 “난 좌파라면 빨갱이라고 싫어하던 보수주의자야. 근데 파업을 하면서 ‘동료’들이 ‘동지’로 변했어. 항상 가족이라고 얘기하던 회사에게 서류 하나로 해고당하면서 생긴 배신감 때문이야. 공장에서 쫓겨난다면 공장을 불살라 버리더라도 혼자 죽지 않아"라고 말했다.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점거파업을 벌이고 있는 이들 중 대부분은 김병준 씨처럼 노조활동에 소극적이던 사람들이다.
노조는 "회사가 점거파업이 급격히 무너질 것이라 오판했다"고 주장했다.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획부장은 “점거파업에 들어가기 전 사측은 용역을 50명 정도만 고용했다. 점거파업이 며칠 지나면 소수만 남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예상과 달리 점거파업이 지속되자 사측은 관제데모로 직원들을 동원하고 용역을 300명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파업대오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고 했다. 노조는 18일 노사교섭에서 관제데모 및 공장진입 시도중단을 회사쪽이 약속했다고 밝혔다.
쌍용차 사태해결은 정부의 몫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쌍용차지부 점거파업은 지난 달 22일에 시작돼 곧 있으면 한 달을 맞이한다. 노조는 정리해고 대상자 900여명을 포함해 1300여명이 파업대오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한다면 극심한 물리적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길리서치가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79%가 공권력 투입에 반대하고 63.1%가 인력감축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규직 노조에 대한 반감이 높은 국민정서를 감안하면 쌍용차 노동자의 투쟁은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셈이다. 쌍용차 노동자의 투쟁에 대한 지지선언도 노동계를 넘어 시민사회, 종교계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유일, 박영태 법정관리인은 ‘정리해고 철회 절대불가’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쌍용차 노사는 평행선을 걷고 있지만 쌍용차 사태 해결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요구하는 점은 같다. 그러나 지난 10일 쌍용차와 관련된 한나라당의 당정회의에서 구조조정은 노사문제라며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법정관리 중인 기업의 실질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정부가 쌍용차 사태를 개별적 노사문제라며 발뺌하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지적이다. 공권력 투입에 의한 물리적 해결이던 노동자의 집단해고를 막는 해결이던 선택은 정부에서 해야 한다. 쌍용차사태 해결은 정부 의지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