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지’는 내 몸에서 아픈 곳

[연정의 바보같은사랑](80) 콘서트 '동행'에서 첫 솔로 앨범 선보이는 '꽃다지' 전 가수 조성일씨 (2)

[필자주] <희망>, <길 위에서>, <호각>, <점거> 등 ‘희망의 노래 꽃다지(이하 ’꽃다지‘)’ 노래로 친숙한 조성일 씨가 첫 번째 음반 「조성일 vol.1 Road Song ‘시동을 걸었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성일 씨는 대학시절 민중가요 노래패로 음악과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 14년 동안 ‘꽃다지’ 가수로 활동하며 노래를 만들고 부르다가 지난해 ’꽃다지‘ 활동을 정리하고 ‘죽을 거 같아 살기 위한’ 선택으로 제주 정착을 위해 서울을 떠났습니다.

오는 8월 17일, 제주에 갔던 조성일 씨가 그간의 고민과 내공을 담은 따끈한 첫 번째 앨범을 들고 솔로 1집 발매 콘서트인 ‘콘서트 동행: 꽃다지에서 솔로서기 조성일’ 공연을 합니다. 이번 앨범 「‘시동을 걸었어」는 나에게로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고 연대하고 나누는 사람답게 살기 위한 의지와 실천을 담은 음악인 조성일 씨의 ‘Road Song(로드 송)’ 시리즈의 시동을 거는 앨범이기도 합니다. 이 앨범에는 타이틀곡 <시동을 걸었어>를 포함하여 <하늘을 나는 새>와 <못>, <망치와 칼날>, <그 방에서>, <나에게로 가는 길>, <땀흘려> 등 10곡의 노래가 담깁니다.

지난해 11월에 시작하여 일곱 번째를 맞는 이번 콘서트 ‘동행'(콘서트 ’동행‘ 기획단 주관, '마음을 담은 동행재단' 지원)에서는 조성일 씨가 1집 앨범 수록곡을 중심으로 공연을 하고, <강정에서 와수다>를 부른 ‘해군기지 없는 아름다운 제주 강정마을의 생명평화를 노래하는 신짜꽃밴’이 게스트로 함께 합니다.

조성일 씨의 첫 번째 앨범 발매와 이를 선보일 콘서트 '동행'에 관한 이야기, 조성일씨의 근황과 음악 여정 등을 몇 회에 걸쳐 싣고자 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는 음악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와 그의 인생에서 아픈 곳이자 버팀목인 ‘꽃다지’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동을 걸어 운전대를 잡고 소통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음악인 조성일 씨에게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홍대 롤링홀(오후 4시, 7시 30분)에서 열리는 ‘콘서트 동행’ 조성일 씨의 공연을 진보마켓(http://www.jinbomarket.com) 에서 예매하시면 티켓 금액의 40%를 장기투쟁사업장에 지정 기부하실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를 읽고 순천 ‘들풀한의원’ 윤성현 원장님께서 조성일 씨와 필자에게 약을 지어주고 싶다는 연락을 주셨습니다.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출처: 콘서트 '동행' 기획단]

취미로 기타 배우려고 들어간 민중가요 노래패

논산이 고향인 조성일 씨는 어릴 때 학교 갔다 오면 자신의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말이 없는 아이였다. 주변에 시골 자연이 있는 덕분에 친구들과 개울에 가서 놀고, 겨울에는 논밭에서 쥐불놀이를 했던 기억도 간직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 음악이라고는 교회 성가대 해본 것이 전부다. 딱히 음악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고, 어릴 때 “노래 잘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그랬던 그가 대학에 입학한 후 민중가요 노래패에 들어간 것은 ‘취미로 통기타 서클에 들어가서 기타나 해봐야겠다’는 대학 생활에 대한 소박한 ‘로망’ 때문이었다.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어 국문과에 진학한 조씨는 첫 학기 초반에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민중가요 노래패에 들어가면서 음악과 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그런 노래동아리인 줄 모르고 들어갔는데, 알고 봤더니 민중가요 노래패더라고요. 거기서 오디션을 본다고 아는 노래가 있냐면서 민중가요 노래책을 주는 거에요. <아침이슬>을 불렀던 걸로 기억해요. 그 노래를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안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그 정도였어요. 민중가요라는 게 부수고 싸우고 이런 거니까 처음엔 ‘이거 모야?’ 했죠.”

  2008년 겨울 ‘꽃다지’ 콘서트에서 조성일 씨 [출처: 사월. ‘희망의노래 꽃다지’ 제공]

특별한 사람, 강경대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기타 배우려고 노래패에 들어갔건만, 정작 기타 가르쳐주는 선배는 그에게 노래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노래를 시작했다. 초반에는 노래패 활동을 그리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선배들의 ‘꼬심’과 관계 때문에 가끔 가긴 했지만, 주로 고향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에 다니면서 놀았다. 1991년 5월, ‘뺀질대던’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람이 등장한다. 그 이름은 ‘강경대’였다.

“명지대 강경대는 저하고 91학번 동기에요. 그때 선배들이 집회 나가서 싸우고 다쳐갖고 피를 흘리면서 오더라고요. 강경대가 죽어있는 사진이 교내에 붙어있는 거에요. ‘같은 학번 앤데, 뭐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알지도 못하고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이지만, 저한테 강경대는 특별해요. 그때 그 사건이 저를 많이 바꾼 거 같아요. 현실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그때 이후로 과는 안가고, 동아리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이때부터 민중가요 공연과 문화패 모임 활동을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의 현실 참여를 하게 된다. 집회와 학교 축제에서 공연을 하고, 학내 창작가요제와 ‘동학농민운동 기념 창작 가요제’ 등의 외부 행사에 노래를 만들어 갖고 나가 상을 받기도 했다. 2학년이 되면서 노래패 패장을 맡았다. 동기들이 군대에 가버리자 그 혼자 학내 문화패연합을 지키다가 후배들에게 인계해주고 간다는 말도 없이 군대에 갔다. 낮은 학점 때문에 교직을 이수할 수 없게 되어 국어선생님의 길은 군대 가기 전에 진작 포기해야 했고, 군대 갔다 와서 다른 공부를 해볼까 하다가 그게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아 포기한다.

“그때 후배들하고 밴드를 만들어 보기도 했었어요. 진로를 고민하다가 내가 해온 게 민중가요니까 우선 꽃다지를 들어가자 생각했죠. 그때는 꽃다지가 대세였거든요. 꽃다지에서 활동을 하면서 내 안을 채우고 나중에 개인음반도 내고 솔로활동도 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포부도 크고 꿈도 크고 그랬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꽃다지 오디션을 봤죠.”

‘꽃다지’에 들어간 ‘바보 조성일’

1997년 여름, 조성일 씨는 ‘꽃다지’ 오디션에 지원한다. 서울에 갈 상황이 되지 않아 자신의 노래를 담은 녹음 테잎을 제출하기로 했다. 나름 녹음하기에 최상의 공간이라 생각했던 학생회관 동아리 앞 로비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 녹음을 했다. 그리고 ‘꽃다지’가 인근에 공연 오는 날, 공연을 보고 직접 그 녹음 테잎을 전달했다. 그런데 ‘꽃다지’ 측에서는 이번에 사람을 안 뽑게 되었다며, 다음 오디션 때 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다음해 1월 공개모집 공고가 나자 그는 다시 ‘꽃다지’에 전화를 했다. 이런 조성일 씨를 ‘꽃다지’ 민정연 대표는 ‘정말 눈치 없는 친구’라고 표현한다. 당시 ‘꽃다지’에서는 그에게 함께 활동하자고 선뜻 손을 내밀기에 뭔가 모자람이 있다고 느껴져서 “지금은 힘들겠습니다. 다음에 뵙지요.”라고 나름 정중한 태도로 거절 의사를 표현한 건데, 6개월 후에 다시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다음에 뵙자고 해서... 지금 뵈려구요.” 완곡한 거절 의사를 곧이곧대로 믿고 또 보자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전혀 눈치를 못 챘던 건 아니다.

“제가 눈치가 없어서 오디션 떨어졌단 얘기를 곧이곧대로 이번엔 안 뽑으니까 1월 달에 오디션 보라는 얘기로 들었나 봐요. 떨어진 거 같단 생각도 들긴 했어요. 그 이후에 안다니던 도서관 다니면서 토익공부도 했으니까요. 그렇게 한 달 쯤 했는데, 어느 순간 토익책 안보고 아래층 내려가서 그때 막 나온 「씨네21」이나 사진잡지를 보고 있더라고요. 아, 아닌가보다.”

결국 다시 한 번 ‘꽃다지’ 오디션을 보기로 했다. 두 번째 오디션에서 조성일 씨는 심한 감기몸살에도 불구하고 합격을 했다. 기존에 제출했던 녹음 테잎 덕분이었다. ‘꽃다지’ 합격통보를 받던 날, 그는 뛸듯이 기뻤다. 동아리 후배들도 “선배가 꽃다지 들어갔다”며 난리가 났다. 전철 타는 법도 모르던 그였지만, 대학 노래패 선배의 부천 자취방에 기거하며 즐겁게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민정연 대표는 눈치 없고 이런 우직한 조성일 씨를 ‘바보 조성일’이라 부른다.

“꽃다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연습만 계속 했어요. 그때는 워낙 짱짱한 선배들이 많았거든요. 서기상 씨가 갓 나간 상태였고요. 박향미, 윤미진, 김미정 같은 선배들이 있었거든요. 그 짱짱한 선배들이 공연하고 다니고, 나는 한쪽 방에서 계속 연습만 했죠. 꽃다지 공연 있으면 대학 돌아다니면서 홍보 포스터 붙이고, 연습하고.”

  2012년 5월 3일, 조성일 씨가 마지막으로 함께한 ‘꽃다지’ 콘서트 ‘혼자 울지 말고’ [출처: 신동준, ‘희망의노래 꽃다지’ 제공]

14년을 버티게 해준 노래, <희망>

7~8개월을 그렇게 보내다가 1998년 겨울 콘서트 때 처음 무대에 섰다. 가사를 잊어버릴까봐 잔뜩 긴장하며 무대에 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가수로 ‘꽃다지’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바쁘게 보내던 중에 첫 번째 슬럼프가 왔다. 1999년 봄, 직접 ‘꽃다지’에서 생활하면서 밖에서 보던 것과 다르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고, ‘꽃다지’ 활동을 통해 만나는 ‘운동권’ 현장의 모습과 사람 관계를 보면서 실망감을 갖게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이걸(’꽃다지‘) 하는 게 맞나? 활동 하는 게 맞나?’ 고민이 들었어요. 사람 관계에서 선배라는 이유로 내가 더 많이 활동해왔으니까 내가 더 잘 안다는 이유로 후배를 무시하거나 눌러버리는 힘의 관계를 보면서 실망스러웠죠.”

그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결국 ‘꽃다지’를 그만두려고 친구가 사는 옥탑방에 머물면서 일주일 동안 잠수를 탔다. ‘꽃다지’를 정리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하던 즈음, 조민제 매니저가 연락을 했다. 곡이 하나 들어왔는데, 그의 목소리와 맞을 것 같다고 했다. ‘꽃다지’가 안치환 씨와 함께 공연을 하는데, 그때 무대에 올릴 노래라고 했다.

“와서 이 노래를 불러보고 공연 무대에 한번 서고, 서고 나서도 ‘꽃다지’ 활동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때 그만둬도 좋다고 했어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한 거죠. 무슨 노래인가 궁금하기도 해서 알겠다고 하고 가서 노래를 들어봤어요.”

그 노래가 바로 <희망>이었다. ‘꽃다지’ 3집 「진주」(2000년)에 수록된 <희망>은 도종환 시인의 시에 이희진 씨가 곡을 붙인 노래로, ‘꽃다지’ 가수 조성일을 세상에 알린 노래다. ‘파워플한’ 남자 목소리가 ‘꽃다지’에서 대세였던 시기라 이 노래와 어울리는 가수는 조성일 뿐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그때 서로 헤어지고 말았을 텐데... 그 곡이 저한테는 의미가 있어요. 다시 꽃다지를 할 수 있게 해준 곡이기도 하고, 14년을 버티게 해준 곡이기도 하니까요. 계속 방황하고 힘들어할 때마다 내가 부른 노래를 내가 들으면서 다시 일어서야겠다 버텨야겠다 다짐을 많이 했어요. 무대에서도 그 노래 부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고요. 감사하게도 ‘꽃다지’ 3집 음반 내고 사람들이 그 노래를 많이 좋아해줬어요. 노래가 좋다는 생각은 했는데, 생각보다 저한테 집중하는 모습들이 보이더라고요. 노래의 힘이 크긴 크구나 했어요.”

바닥 없는 방 벽에 못 하나 치고

다시 ‘꽃다지’로 돌아왔지만, 그의 방황은 끝나지 않았다. 2002년, 그는 ‘꽃다지’ 사무실 합주실 구석에 있는 지금은 창고로 쓰고 있는 ‘골방’에 들어간다. ‘꽃다지’가 들어오기 이전 교회 기도실로 쓰던 방인데, 연습실 배정을 할 때 그가 가장 초라한 그 공간을 쓰겠다고 자원했다. 배려와 양보에서 했던 선택이었다. 천장이 낮아 서있을 때는 고개를 숙여야 하는 그 공간에서 조성일 씨는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동전화국 점거농성에 관한 <점거>(글 오동일, 곡 조성일)와 호루라기를 불며 조합원들의 투쟁 참여를 독려하던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 이야기를 담은 <호각>(글‧곡 조성일)은 그 ‘골방’에서 만들어진 노래다.

“아침에 인사하고 골방에 들어가서 혼자 노래 하다가 가사를 썼어요. 아니면 멍 때리고 있거나... 그러다가 점심때 ‘밥 먹자’ 하면 나와서 밥 먹고 물 한잔 먹고 또 다시 골방으로 쏙 들어가 있었어요. 그렇게 있다가 공연 있으면 가고, 다시 들어갔다가 일과 끝나면 가고. 그런 생활을 5년 가까이 한 거 같애요.”

내가 빌린 방엔 바닥이 없어
내가 빌린 방엔 바닥이 없어
나는 그 벽에 못하나 치고 치고
나는 그 벽에 못하나 치고
- <못>


“벽이 사방으로 있는데, 못이 박혀있어요. 거기에 제가 옷걸이처럼 벽에 딱 걸려있는 거에요. 근데 바닥이 없어요. 이게 내 상태다.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런 거 아닌가. 비정규직도 내일이 없고, 꿈이 없잖아요. 내일이 없잖아요. 바닥이 없는 상태에서 못 하나에 매달려서 있는 거잖아요. 이게 공감이 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이번 앨범에 수록된 <못>은 10년 전인 그 당시에 만든 노래다. 그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건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건 다 못 하나에 매달려있는 상태인 것 같다고 했다. 2005년 초에 사무실 리모델링을 통해 연습용 부스가 추가로 만들어지면서 조성일 씨는 ‘골방’에서 ‘탈출’하게 된다.

치유할 수 없는 병과 사랑의 대상에 대한 그리움

“널 골방에서 내가 꺼냈다.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정말 충격이었어.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정말 말도 안 되는 공간이었어요. 옛날 창고처럼 온갖 물건 다 있고. 첫 인사 하는데, 사람들 컵라면 먹고 있고 얘는 구석방에 들어가 있고. 진짜 옛날 다방처럼 음침했어.”

당시 그 리모델링을 제안했다는 정윤경 감독의 이야기다. 2004~5년에 합주를 할 수 있는 녹음실 부스를 만들고, 연습실은 수리하고, 장판도 새로 깔아 현재 ‘꽃다지’ 공간 형태를 갖추었다. 이 부분에 대해 할 말 많은 정감독이지만, 조성일 씨에 대한 타박은 하지 않는다.

“하나는 제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병인 거 같은데요. 병. 치유할 수 없는 병. 바닥으로 툭 가라앉든가 공황상태가 되든가. 불규칙적으로 그게 막 올라와요. 그걸 잡아주고 조여 주고 해소시켜 주는 유일한 게 노래 부르는 거에요. 저를 조율 시켜주거든요. 그게 없으면 환장하겠는 거죠. 이 상태에서 제가 대처를 못하겠으니까. 다른 한 부분은 보이는 것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게 있어요. 그래서 저의 어떤 것들을 막 쏟아낼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을 만나고 싶고 그리워했던 게 계속 있는 거죠. 이건 음악으로 못 푸는 거에요. 그런 게 안되는 게 힘들고...”

오랜 세월 그 방에서 난 잠이 들었는지 몰라
오랜 세월 그 방에서 난 꿈을 꿨는지도 몰라
난 자유롭다 생각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믿고 있었는지 몰라
하지만 그 방에서 난 나오기가 두려웠던 거야
알고 있었지만 내겐 더 용기가 필요했던 거야
- <그 방에서>


이번 앨범에 수록된 <그 방에서>는 변화를 위한 내용을 만들어 채우지 않고 합리화만 하는 세태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든 노래다. 이 노래에서 ‘방’은 그 ‘골방’일수도 있고, 노래 <못>에 나오는 벽만 있고 바닥이 없는 방일 수도 있다. 또한, 그 방은 조성일 자신의 방일 수도 있고, 인간 전체에 관통하고 있는 방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은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방 한 칸 씩을 갖고 있잖아요. 그 방에서 나온 사람이 있을까요? 연정 씨는 그 방에서 나왔어요?”

나를 버티게 해주는 곳, 꽃다지

마침내 ‘골방’에서 나와 지난 3년 동안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니 ‘미쳤구나’ 싶더란다. 나중에 민정연 대표, 하장호 전 매니저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너무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그렇게 했는데, 참 무던한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화를 냈을 텐데 지켜봐주고 골방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려준 게 되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켜봐주고, 내 스스로 내 힘으로 나올 수 있게 기다려준 거 같아서요.”

‘골방’에서 나왔지만, 그것으로 방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에는 다른 방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에 들어갔던 방이 밖으로 나가면서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방향은 찾았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갈등이 있었다. 후회와 자책이 밀려오고, 그런 자신을 보면서 주체가 안 되더란다. 무대 올라가는 게 무섭고 두렵고 부끄러웠다. 자신이 죽겠는데, 무대에 올라가서 힘내라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방황은 그의 존재와 같은 것이기에 끝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골방’을 나와 에너지가 소진되고, 헤매고 있는 상태에서 만난 그의 아내에게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게 늘 미안하다.

“사오년 방황했는데, 그 시간까지 내가 뭐하고 있었나? 그 시간동안 뭘 준비했으면 지금 꽃다지 안에서 뭔가 역할을 해낼 수 있었을 텐데...”

‘꽃다지’는 조성일 씨가 학교를 졸업하고 다닌 첫 직장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직장으로 남아있다. 조성일 씨의 인생과 ‘꽃다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는 ‘꽃다지’를 자신의 몸 중에 아픈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2009년 4월, 일본 공연 출국길에 동료들과 함께. 윗줄 왼쪽부터 고명원(기타리스트), 이태수(‘꽃다지’ 전 가수), 조성일, 민정연(‘꽃다지’ 대표), 유광식(‘꽃사람’ 회원, 현 사진작가) [출처: ‘희망의노래 꽃다지’]

“내 몸 중에 하나 아픈 곳이에요. 아픈 곳이니까 가서 같이 아파해주기도 하고, 아픔이 나으면 기뻐할 수도 있고. 저한테는 그런 곳인 것 같애요. 저를 버티게 해주는 거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지금 준비 중인 음반과 솔로 활동 하는데에 ‘꽃다지’ 활동은 큰 버팀목이 되고 있다. ‘꽃다지’에 있었을 때는 자신이 조금 덜 해도 같이 갈 수 있었지만, 솔로 활동은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두렵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고 그런 게 있기는 한데요. 그러함에도 꽃다지에서 했던 내 안의 자양분들이 나오더라고요. 꽃다지에서 내가 했던 것도 있구나. 그게 날 버텨주게 해요.”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다시 또 시작 할 수 있다고 말해주던 그대를
눈물과 아픔도 쉽게 이겨 낼 수 있도록 지켜주던 그대를 희망을
- <희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