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0년대 중반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들어가서 미팅을 통하여 한 남학생을 알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관계 이외의 남성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자와의 관계맺기는 여자들과의 방식과는 너무 틀려 보였다. 여자친구들과 신나게 수다떨고 헤어지면 더 가까워진 것 같고 스트레스도 풀리곤 하였다.
그런데 남학생과의 교제는 내게 너무 어려운 숙제였다. 만나면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다 하기보다는 남자친구의 관심과 욕구에 더 경청하게 되고 점점 그 친구의 방식에 맞춰 가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상처받을 수 있는 말들과 행동을 내게 서슴없이 하였고 나는 그것 때문에 앓아 전전긍긍해야만 하였다.
내 대학시절에서 1학년 1학기는 없었다. 내 기억에서 뻥 뚫려있고 지워져있다. 그럼에도 기억을 되살려보면, 나는 그 친구가 문무대에 가기 일주일 전부터 학교수업을 전폐하고 편지를 준비하여 문무대에서 100통에 가까운 편지를 받아서 스타를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그 친구는 자기가 바쁘면 연락을 무심하게 몇 주씩 뚝 끊기도 했고, 술마셨다 하면 술김에 새벽이고 아무 때나 전화를 하는 객기를 부리기도 했고,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그때서야 만나자고 하였다.
그렇게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서 성적표를 받게되었다. 나는 빨간색으로 찍힌 낙인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가슴 떨리는 '학사경고'였다. 나는 성적표를 받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남자친구의 생기발랄하고 자신감 넘치는 전화를 받게되었다. "주은아, 나 장학금 받았다." 사실 그 남학생과 나라는 관계의 간극은 학사경고와 장학금만큼이나 컸던 것이다.
당시 내 행동을 반성적으로 돌이켜보면 여성들의 취업이 힘들고 결혼퇴직제 등이 횡행할 때라 남학생과의 관계를 통해서 돌파구를 찾고 내 삶을 의지하려고 했었던 것 같다. 반면에 남학생에게 나라는 존재는 사회생활이 힘들고 외로울 때 찾아가는 숲이 우거진 산처럼 언제나 받아주는 친밀함의 보고였던 것이다.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에는 이미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아로새겨져 있었고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던 나는 그 친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주어야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 남학생이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머리라면 나는 감성적이고 몸적인 존재였다. 머리를 막 쓰다가 피곤하면 언제나 푸근하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 같은, 육체화 된 존재였던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몸적인 존재는 생명이 붙어있는 한 부착되어 있는 본능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근대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신/몸이라는 위계적인 이분법 속에서 사무직 노동자와 생산직 노동자사이의 위계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예전에 사회시간에 배웠던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라는 말을 추억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관계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관계를 맺고있는 우리 모두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쏟아 붓는 노력은 위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조직원들간 관계를 통해 유지되는 단체나 조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한 사람은 글씨를 기막히게 잘 써서 각종 대자보나 현수막을 보기 좋게 꾸미는데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은 피로에 지쳐서 모인 조직원들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유머감각이라는 능력에서 뛰어나다. 또 어떤 사람은 음식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 있고 나머지 사람은 대인관계가 넓어서 일일호프를 했다하면 호프티켓을 100장은 소화해서 조직에 경제적으로 기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 사무실이 지저분해지지 않도록 사무실과 화장실청소를 신경 쓰고 관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진보진영에서 인정하는 능력은 오직 한가지 기준에 의해서 작동되고 있다.
운동진영은 오로지 말빨과 글빨이 뛰어난 사람의 능력을 배타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데서 위계질서와 권위주의를 키우게 된다. 말빨로 대중을 휘어잡거나 논리적인 글로써 타 조직을 능가할 수 있는 자만이 '능력 있는' 활동가로 자리잡게 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조직의 회비를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내며 총회가 열렸다 하면 장보기에 동행하며 무거운 짐을 들어주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름 없는 활동가, 총회가 시작되면 말빨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잔재주는 없는 그(녀)는 '별다른 능력은 없지만 성실한' 조직원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사무실 청소할 때 항상 글 쓰느라 바쁘다며 자기 발 밑 청소하라며 발만 들어올리는 그, 요즘에 돈 버니까 특별회비좀 내라고 하면 "가정경제 부도났다"며 설레발을 치며 저녁에는 타 단체 간부들과 만나 정보를 독식하기 위한 목적의 술값을 아끼지 않는 활동가의 관계맺기방식의 폭력성은 모두 눈감아 진다.
운동진영은 '동아시아의 정세' '선거결과 분석 및 방향' '정치개혁전망과 앞으로의 과제'는 중요한 이슈로 다루지만 조직원들과 평등하게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연애, 올바른 콘돔사용법에 대하여 문제제기 했다가는 웃음꺼리로 전락하게 된다. 사람들은 노무현정권의 문제점보다 조직원들간 관계때문에 더 아파하고 있고 남성활동가들이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한 글을 쓸 때 그와 사귀고 있는 여성활동가는 임신에 대한 공포 때문에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다. 관계 속에서 생긴 상처와 화, 분노는 조직에서 공직인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러한 문제는 철저히 사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술자리의 뒷담화에서 안주꺼리로 치부될 뿐이다.
어떠한 모임이나 조직도 능력은 하나의 기준으로만 평가되어 그동안 관계자체에 많은 공을 들이는 (여성) 활동가들에 대해서는 가혹한 평가를 내리게 된다. 그 많은 활동가들은 다 어디로 갔나? 사회를 변화시키는 활동을 통하여 내가 넉넉해지고 풍요로워지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조직원들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공적인 장으로 끌어내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학사경고와 장학금이라는 간극, 여성과 남성간 권력관계, 청소 잘하고 유머라는 능력을 가진 활동가와 말빨과 글빨을 가진 활동가 사이의 위계질서는 사라지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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