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길섶]의 왼손놀이

부안항쟁 1년과 비가시적 풍경들

"경찰이 우리헌티 인사를 다 허고 가네 그랴."
"긍게, 이~. 세상 참 좋아졌어. 옛날에는 경찰이 무서웠는디..."

7월초 부안의 상서면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7월 1일에서 8일까지 부안은 각 면사무소 앞에서 반핵 면대책위들이 천막농성을 했다. 반핵민주투쟁 1년에 즈음하여 투쟁의 새로운 각오를 다지자는 의미일 터다. 이제 농번기도 지났고 다시 투쟁의 열기를 되찾기라도 하는 듯 예닐곱의 주민들이 천막에 모여들어 담소들을 나누거나 어떤 곳은 면장의 행태에 분노한 주민들의 난타 시위가 계속되기도 했다.

상서면 대책위에서도 도로 옆 면사무소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었고, 내가 잠시 그곳에 들렀을 때 마침 경찰 순찰차가 다가오더니 농성장에 있는 주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가자 즉각 나온 주민들의 반응이 바로 앞의 대화들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주민들은 경찰의 '인사'에 스스로 희열에 차는 듯 했다.

이 사례는 그간 있어온 많은 것들의 하나에 불과하다. 아마도 주민들은 그간의 투쟁들이 지역사회의 역학관계를 해방적으로, 주민자치적으로, 새롭게 전복시켜 왔다는 사실들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필요악'으로서의 지도부

반핵민주항쟁 1년의 기간 동안 부안은 '이중권력'이 형성되어 왔다. 군수-부안군의 군정권력과 반핵대책위 중심의 주민권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 이중권력은 당연히 적대적 긴장관계일 수밖에 없는데, 군수郡囚는 군정독재자로 치닫고 있고 주민권력은 해방과 자치의 세계들을 열어나가고 있다. 이 새로운 경험들, 새로운 문화의 힘들은 핵폐기장이라는 이슈를 훨씬 넘어 주민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모색하도록 해왔다.

그럼에도 문제는 많다. 더 많이 극복해야 할 문제들, 혹은 극복되지 못할 불신의 골들. 부안지역 전체로든 각각의 지역적 삶에서든 뿌리깊게 깊어져 왔던, 투쟁의 절대공동체를 형성해오고 있음에도 배제와 알력들이 여전히 존재하거나 의아스럽게도 더 심화되고 있는 비가시적 풍경들이 있다.

나는 부안 상황에서 그 책임이 반핵투쟁을 휘어잡고 있는 반핵범부안군민대책위의 '지도부'에 일차적으로 있다고 판단한다. 이미 이 부분은 부안 주민들 내에서도 공개/비공개적으로 계속 제기되어 왔다. 투쟁하는 주민들의 다양한 마음들과 소통하지 않고 그 위에 군림하거나 배제해버리는 자세, 주민들의 투쟁정서 및 감정구조와 괴리되어 존재해온 지도부. 민중적 투쟁의 원칙에 따르는 정치철학도 부재하고 자기반성 한번 없으면서도 계기마다 돌파할 국면들을 만들어 주민들의 투쟁만 독려하는 '정치적' 지도부. 부안주민투쟁의 아름다운 승리들 혹은 실패의 이면에는 일종의 '필요악'이 존재하는데, 그게 바로 대책위 지도부이다.

나는 지금 이것 자체를 까발리려는 것이 아니다. 부안항쟁이 2003년 7월부터 시작되었으니 그 항쟁의 대장정 1년에 즈음하여 짚어야할 것은 분명하게 짚어야한다고 본다. 부안항쟁의 화려한 외양만 볼 게 아니라 왜곡되어진 투쟁의 경로 그 내면의 문제들을 보아야 한다. 민중적-주민적 원칙과 정치철학에 입각한 부안항쟁의 진정한 승리를 위해 환골탈태할 일이다.

나침반 없는 투쟁, 안개 속의 투쟁, 분노와 감정만 있고 비전은 없는 투쟁, '비전'은 있을지언정 함께 투쟁하는 주민들의 자기결정 및 자기전망으로서가 아니라 지도부 몇몇의 비전으로 감추어진 투쟁, 속보와 행동요령과 속닥속닥은 있어도 공론장이 없는 투쟁, 이것들을 환골탈태해야 한다. 지도부의 자기갱신으로서. 끝까지 함께 투쟁하는 군민들을 진정 생각한다면...

꼬뮨놀이로 보는 부안

나는 부안투쟁에 '꼬뮨놀이'의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다. 물론 이 마음은 전적으로 나의 상상이다.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고 대안적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의 부안적 상황은 한국수력원자력 등 핵산업 전력독점자본과 거기에 함께 하는 국가권력 및 지자체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그리고 생태적 공동체의 삶이라는 대안적 욕망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부안적 상황은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에 의한 공동체 강제포획에 저항하고 있으며, 또한 주민들의 자발적 집단투쟁이 어떤 해방성과 주민자치 등에의 욕망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실지로 '꼬뮨'적 상황들이 창출되어 왔는데, 그것은 대책위 지도부의 그림과는 별도로 주민들의 투쟁상황 안에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부안적 상황이, 이 상황을 '자치민주주의'(가령 주민독자적으로 실시한 2 14주민투표의 사례)의 창조로 돌파하고 전망해내느냐 아니면 또다시 대의민주주의로 복귀시킴으로써 주민들의 욕망과 권리를 배신하느냐의 기로에 있다고 본다. 나는 자치민주주의의 사례들을 증폭시키는 것이 지금까지 반핵민주투쟁을 해온 주민들 스스로에게 그 투쟁의 성과와 의미들을 생산적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부안에서의 '꼬뮨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꼬뮨놀이라는 게 별거 아니다. "경찰이 우리헌티 인사를 다 허고 가네 그랴."─주민들이 이런 즐거움과 해방감을 스스로 획득해내고 만끽하는 것, 사소한 대화 같지만 의미심장한 전복성이 진행되고 있으며 일상의 새로운 감각들을 생성하고 있다는 것, 뭐 이런 거다.

그런데 문제는 주민들의 전복적 공통감각 위에 군림하려 하고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 바깥으로의 탈주를 상상하지 못하는 대책위 지도부의 조직이기주의적 권력화에 있다. 대책위 지도부는 주민들의 자치민주주의적 탈주 욕망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며 그 욕망의 마음과 소통하려는 자세도 갖지 못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여 주민들은 전복적이지만 지도부는 체제 내적이며 대의민주주의의 대변자로 존재하려 한다. 보다 못해 나는 지도부의 한 핵심 관계자에게 "주민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데 왜 지도부는 20세기의 낡은 운동관으로 이끌어가려 하느냐"며 비판하기도 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점이다. 부안투쟁의 지도부는 낡은 운동방식에 절어 있다. 끊임없이 스스로 혁신해내고 있는 주민들의 욕망과 권리를 읽어내지 못하고, 아니 읽어내려는 의지도 없어보이고, 주민대중들을 일방적 계도의 대상으로 타자화시키며 행동 명령과 집회동원의 대상으로 위치화시키는 것, 주민들에 의한 투쟁의 자기결정성 및 자기전망성을 배제해버리고 지도부의 결정으로 일방화시키는 것, 더군다나 그 지도부의 결정이라는 것도 공론장으로서의 결정이 아니라 사실상 '사적 결정'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투쟁의 비전은 그 사적 결정의 코드로 모호해진다는 것, 그리하여 주민집단의 투쟁정서 및 감정구조는 지도부에 의해 코드화되고 차압당하며 왜곡되고 있다는 것, 이런 비판마저도 수용할 줄 모르고 논란의 공론장이 존재하는 것조차 꺼려하는 것 등등... 지도부의 이런 처신은 많은 주민들을 가슴앓이 하게 하고 있으며 등을 돌리게 해왔다.

문제의 기원, 조야한 형님문화와 조직이기주의와 기득권 챙기기

부안의 반핵대책위 지도부는 농민회 간부 중심으로 되어 있다. 부안판에서 '지역운동권'(?)을 주도해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부안 운동판의 헤게모니는 이 사람들과 친밀하게 코드화된 사람들과 결속된 '형님문화'의 패밀리 우산 하에 주도되어 이 몇몇 사람들 편으로 고개숙여 들어오지 않으면 철저히 배제하고 심지어는 적대시하는 습성에 절어 있다.

이것은 운동판(?) 사람들만(아니 자기들만)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안고가야 한다는 낡은 운동관에 기초하면서도 그 낡은 운동관마저 민중적 실천에 근거하지 않을뿐더러 합리적 공론장의 토대 위에서가 아니라 형님문화적 사적 코드로 뒤섞이다보니 이것이 배제성과 적대성의 원천이 되어 더 골치 아픈 지경이다. 이 주류 운동판의 형님문화의 우산 속으로 결속되지 않으면서, 달리 말해 가령 다른 생각을 가지면서 부안에서 뭔가 해보려는 사람들은 배제되고 도태당한다.

심지어는 부안에 일종의 웃기는 '매카시즘'이 존재하는데, 부안판의 주류집단 패밀리로부터 철저하게 배척 당하는 특정한 어떤 사람이 있는데 또 다른 누군가 그와 놀기라도 하면 그 사람마저 배제 당하고 혹은 죽이기 당한다. 부안의 주류 운동판 내에 존재하는 이 웃기지도 않는 매카시즘류 배제의 논리는 기득권 논리와 공모하여 부안의 반핵민주투쟁의 성과로 창간 준비되고 있는 '부안독립신문'의 준비 과정에서 몰상식한 사태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 오래된 습성이 반핵민주투쟁의 상황 속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이 투쟁의 자기결정성에 참여하려 해도 배제되었다. 혹은 스스로 떨어져나갔다. 지도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부안 사회 다양한 계층의 집단이나 개인들이 공동 책임 하에서 자기결정하고 연대하는 투쟁 주체들의 결연이 아니라, 지도부의 결정을 따르고 동원되는 주민대중일 뿐이다. 따라서 집회 때의 주민대중을 향한 지도부의 발언의 화법은 "뭐,뭐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명령어로 일관되는 것은 단지 화법의 스타일이 아니라 권력화의 원근법에 기초한다고 볼 수 있다.

조야한 형님문화적, 조직이기주의적, 집단기득권적 주류 패밀리의 시각과 방법은 당연하게도 정확한 철학과 정책의 공공성에 기초하여 제시되지 못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패밀리집단의 바깥(보통 주민들)에서 분출되는 욕망과 권리들의 긍정성도 이해하지 못하며 오히려 거세시키려 한다. 부안항쟁의 왜곡된 양상은 이 오래된 습성의 재현/확장으로부터 비롯되어 왔다.

나는 부안투쟁을 보면서 여러 번 놀랬다. 처음에는 예상외의 주민들의 대규모화된 지속적 투쟁에 놀랬다. 두 번째는 그 주민투쟁 동력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코드화하는 대책위 지도부의 정치적 행보와 배제의 논리에 놀랬다. 세 번째는 그럼에도, 배제 당하고 소외 당하고 투쟁의 자기전망성/자기결정성이 박탈당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어쨌거나 투쟁은 함께 하면서 분열주의적 언행들을 극도로 자제한다는 것에 놀랬다. 네 번째는 부안에서 뭔 일을 하려면 대책위 지도부의 '눈치'를 봐야 하거나 '교감'을 해야 한다는 점에 놀랬다. 이걸 사람들은 '허락'의 의미로 이해하고 반감을 갖는다. 다섯 번째는 그럼에도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도대체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으며 함께 투쟁하는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해도 끄떡하지 않는 지도부의 태도에 놀랬다. 대단한 관료주의적 권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 무엇에 또 놀랠지 그 기대감에 나는 놀랜다.

아름다운 승리를 위한 환골탈태

부안 반핵민주항쟁은 핵폐기장 백지화라는 일차적 목표 이외에 그 투쟁의 생명-민주효과로서 많은 다양한 가능성들을 창출해왔다. 이 다양한 가능성들은 새로운 긍정성들을 확보할 수 있는 발견적, 발명적, 연대적 개방성의 여부에 따라 현실화될 수도 있고 봉합되어 버릴 수도 있다.

좀더 환상적으로 극대화시키자면, 부안적 상황을 매우 독특한 대안사회로 꼬뮨화할 수 있는 틈새들이 상당히 있지만 결국 그런 상상이 자의적 환상으로 그쳐버릴 우려가 더 큰 게 투쟁지도부의 '정치적 행보'라는 걸림돌 때문이다. 즐거운 투쟁으로 극대화할 수 있음에도 또다른 희망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에게 좌절과 발빼기라는 선물을 안겨주는 걸림돌. 심지어는 극도의 불신감과 적대감을 생산하고 있다.

부안항쟁 1년에 즈음하여 만감이 교차된다. 그 화려한 장정의 외양들을 보자면 감동의 대서사 영화라 할만하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비가시적 풍경들을 보자면 차라리 사찰의 풍경소리가 듣고싶다. 부안의 반핵대책위 지도부는 투쟁 1년을 경과하면서 집행부도 다시 활성화시키고 주민투쟁 동력을 회복시키려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환골탈태가 전제되어야 한다. 진짜 주민 속으로! 들어가는 환골탈태. 진정한 민중의 벗이 되는 환골탈태. 그것이 바로 부안항쟁 아름다운 승리의 귀결점이다! 버려라, 버려라, 아름다운 승리를 위해.

여기서 뛰어라, 여기가 꼬뮨이다!

갑자기 맑스의 <루이 보나빠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 다시 읽고 싶어진다. 나는 다시, 꼬뮨놀이의 상황이 창출되어도 왜 유쾌하게 탈주하지 못하는가를 스스로에게 혹은 좌파적 상상가들에게 물어본다. 부안에서 배우려거든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반핵대책위 지도부가 아니라 투쟁의 장정을 기록해온 주민들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럼에도 끊임없이 유쾌하게 탈주를 시도한다. 꼬뮨은 투쟁하는 주민들에게 있으니, 꼬뮨은 지역에 있고, 바로 그 지역은 세계더라... 여기서 뛰어라, 여기가 꼬뮨이다!

"경찰이 우리헌티 인사를 다 허고 가네 그랴."
"긍게, 이~. 세상 참 좋아졌어. 옛날에는 경찰이 무서웠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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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핵 , 부안 , 코뮨 , 부안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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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kebau

    흐뭇하다고 하면 괜한 욕 먹을까요?

    그래도 이런 글 읽으니까 기분 좋네요.

    일제시대 학생들이 만든 유인물 중에는 "학교내 의사결정에 있어 1인 1표(학생참여보장)"를 주장하는 귀절이 있더군요.

    선생도 1표 학생도 1표... 요새에 비하면 과히 혁명적...

    코흘리개 어린아이가 오히려 대통령 군수 보다 낫네요.

  • neoscrum

    옛말에도 아이들의 말이 하늘의 말이랬는데..
    요즘보니 현실 정치에서도 그렇더군요.
    조정래의 '한강'에서도 아이들에게 먼저 선거운동을 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던데, 영국에서는 총선 두어달 전에 하는 학생투표(어린 학생들이 보수당과 노동당 등으로 나눠서 유세하고, 공청회하고 학생들이 이에 대해 모의 선거를 하는 투표, 전국적으로 동시에 치뤄짐)가 거의 어른투표로 별 차이없이 이어진다고도 하고, 미국에서는 대대로 아이들을 상대로한 지지도 조사(공화당과 민주당 후보에 대한 지지도)가 거의 그 해의 투표 결과와 일치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었습니다.

    부안군수 곧 바뀌겠군요.

  • 고길섶

    다음날.. 다시 이 꼬마아이는 성당에 왔더군요.
    가까이 와서 하는 말이 전단지 돌릴 거 없냐고 묻더군요.

    그리고 그 다음날 그러니까 어제 오후 6시쯤이던가요.
    성당 가는 길에 이 아이를 만났어요.
    어디가냐 했더니
    “독립신문” 행사하는 데 간다 하더군요.
    으힉? 이 아이는 부안군민의 행사일정을 모조리 다 꿰고 있나바요.
    독립신문 창간행사가 있는 날인데
    행사시간은 저녁 7시인데
    걸어가면 1시간은 가야하니까 미리 서둘러서 걸어간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덧붙이는 말,
    - 빨리 가서 자리잡아야죠~

    이 아이 이야기를,
    격포에서 부안으로 나오는 차 안에서 동행자들에게 해줬더니
    까무라치며 웃더군요.
    운전자도 까무라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사고날뻔....

  • joonseok

    그런 아이가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론 죄송하네요..
    아이앞에서 제자신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여전히 미진한 제자신이..
    제 부족한 고민과 생각들을 더 채우고
    실천으로 옮겨야 겠죠?

    괜찮다면 퍼갈께요^^

  • wls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구요.
    그 친구가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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