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주은]의 ING

이박사 메들리, 디스코왕, 바이올린 협주곡

나는 몇 년 전에 택시를 탔다가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택시노동자가 틀어놓은 음악 때문이었다. 1평 남짓 택시 안에서는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이박사 메들리가 돌아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다시 한 번 택시기사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눈으로 허둥지둥 택시 어딘가에 붙어있는 운전기사의 주민등록번호를 찾았다. 역시나 그 운전기사의 나이는 서른 살이 채 되지 않았다. 이십대의 젊은 운전기사는 이박사 메들리의 중간중간 나오는 추임새를 열심히 따라하며 신나게 운전을 하였다.

나는 최근에 한 동료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라며 친구가 전화를 받는데 집안에는 은은하게 클래식 음악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집에 있을 때 인터넷에 들어가서 코요테의 디스코왕을 다운받아 놓고서 집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을 때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았던 그 동료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 잠깐만 기다려"라고 말해놓고는 디스코왕을 거칠게 확 꺼버렸다. 왜 그랬을까? 클래식 음악 대 디스코왕이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은 거의 예외 없이 다음 세대로 재생산된다. 상류층의 계급재생산은 다음 세대에게 "옛다, 받아라"하며 엄청난 돈을 쥐어주며 이루어지지만은 않는다. 경제자본은 예술적 취향과 미적 취향 등의 광범위한 문화자본과 맞물려 계급을 재생산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개인은 자신이 속해있는 계급의 문화적 취향을 획득하게 되고 그것은 집단화되며 위계화된다. 그러한 문화적 취향은 소비양식, 예술적 취향과 일상생활까지 포함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이처럼 위계화된 예술적 취향에서 가장 고상하고 권위있는 권좌에 올라있는 것은 클래식음악이다.

우리는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를 즐겨듣는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 괜시리 주눅이 드는 것은 그러한 음악적 취향이 가지고 있는 권력 때문이다. 한 사람의 기호나 습성은 의식·무의식적으로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루아침에 생겨나게 하거나 버리기는 무척 힘들다. 클래식음악에 대한 기호는 어렸을 때부터 비싼 레슨비를 주고 배운 서양악기들과의 교분 속에서 생겨난다. 즉 클래식에 대한 교감능력은 안정적인 경제자본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의 스타일이나 예술적 기호 등에 대한 정보만으로도 그 사람의 계급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즉 경제자본이 없는 노동자들은 위계화된 스타일과 취향 속에서 중산층 이상이 누리는 스타일과 기호에 접근할 수 없고 그들이 그나마 즐기는 문화는 천박한 것으로 위치지어져 있다.

따라서 실로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공격과 다른 세상에 대한 대안은 계급별로 구별지어져있는 취향과 스타일에 대한 경계를 없애는 것이다. 도대체 '고상한 문화'에 대한 정의를 누가 했던가? 상류층의 자녀들이 첼로연주를 익힐 때 노동자의 아이들은 피리를 연습하고 첼로구경을 하기조차 힘든 것이 현실이다. 대학에서 풍물패에서 활동했던 한 사람이 "그러고 보니 문화에도 계급이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뙤약볕에서 맨날 꽹과리 칠 때 의대애들은 오케스트라 만들어서 맨날 바이올린 가지고 다니더라는 거죠."라는 말에서도 문화가 어떻게 경제자본과 결합되어 계급을 재생산하는 기제가 되는지를 드러난다. 서양 클래식 음악에 대한 무소불위의 상징적 권위는 무너져야 함과 동시에 계급과 출신, 성별에 관계없이 어느 누구도 다양한 악기에 대한 접근권과 연주에 대한 권리는 확보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러니컬한 것은 하나의 단일한 계급이라고 치부되는 한 가족 안에서도 취향은 위계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들이 주말에 골프나 조기축구라는 문화생활을 즐길 때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대중목욕탕에 가서 때를 박박 밀어준다. 남성들이 심야에 감동적인 영화한편을 즐기며 문화적인 기호를 발전시켜갈 때 여성들은 직장일, 집안일로 녹초가 된 고단한 몸을 이불에 누이고 있다. 우리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간 경계도 경제자본과 문화자본간 상호작용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더 나아가 가족의 남녀간 여가를 포함한 문화생활의 위계가 여성들의 소외와 억압을 유지·재생산하는데 일조하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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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서 문화자본에 대한 논의는 프랑스 사회학자이면서 말년에는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반기를 들며 노동 계급의 정치세력화에 적극적인 행동가였던 부르디외(1930-2002)의 이론에 기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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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자

    노대통령과 그 밑의 386 들이 꼭 한번 읽어야 할 글입니다.

  • 김성열

    창간을 축하하며 기쁨을 함께 합니다. 개혁만 나불거리는 정치 모리배들이 꼭 읽어봐야할 글이네요.

  • eyehur

    친미적인 한국인이라는 대통령의 '언술'에 대해 필자께서 '언급'하면서 담론으로서의 '한국인'과 '미국인'은 그 언술의 사회성과 관계없이 이중성을 띤다고 전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의 담론 구조에서 언급되고 있는 미국, 친미, 한국인, 자주, 자유주의 등등의 언술이 결코 담론의 장이라는 맥락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필자께서는 당신의 '뉴욕'이라는 관점에서 언술의 내용을 규범적으로 판정하셨습니다. 당신의 '뉴욕'이 나의 '뉴욕'보다 우월적 가치를 띨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최소한 담론의 장에서는요.

  • 겨울장미

    친미/반미, 사대/자주 등의 단순한 구도는 문제가 있지요. 다양한 미국, 다양한 한국, 다양한 세계관, 다양한 실천, 다양한 위치.... 잘 읽었습니다.

  • 푸른나무

    좋은 지적이었습니다. 공화정의 필요성과 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섞여서 진행되는 현재에 대한 지적에 많이 공감합니다. 신자유주의 극복을 위한 대안 형성에 많은 고민을 안고 삽니다. 앞으로 좋은 글들 부탁드립니다.

  • eyeting

    한국정치 한 복판에 벌어지는 부시대 클린턴의 리턴 매치, 그 한귀퉁이에 클린턴 식 온정주의에 대한 기억에 국제정치적 이해의 사활을 건 북한 외교부의 '클론'들이 끼어들어 펼치는 것이 아마도 소위 '자주-친미'의 본질이겠지요.

  • zz

    노무현이 클린턴을 내면화했다는 말은 좀...비약인듯...

  • ㅋㅋ

    반미하면 어때 하다가, 미국아니었음 정치범 수용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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