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길섶]의 왼손놀이

어느 꼬마아이의 투쟁철학

8월 8일 일요일, 오래간만에 오늘은 매우 기분 좋은 날입니다. 나는 요즘 “생명문화를 보다”라는 기치를 내건 부안영화제(8.12-14)의 조직위원장을 맡아 행사 준비에 바쁩니다.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다보니 꿀꿀하기도 하지만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니 열심히 준비해야 하는 처지이지요. 그러던 차 오늘은 참으로 희열을 느꼈답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당근, 있었지요.

부안영화제에서는 ‘군자금’을 확보하고자 황토 천연염색한 영화제 티셔츠를 판매하기로 했답니다. 물론 우리가 천연염색을 다 했지요. 어제 문규현 신부가 오늘 오전 부안성당에 미사가 있으니 좀 팔아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해서 아침부터 당장 판을 벌여놓고 팔고 있었지요. 조직위원장이 그런 일까지 할 정도로 한가(?)하느냐고요? 때로는 이런 일까지도 해야 한답니다. 어쨌거나 나로서는 희열의 기회였지요. 한 꼬마아이를 만난 것이 바로 그것.

사람들이 미사 보느라 좀 한가해지자 나는 의자에 앉아 발톱 한 끄트리를 잘라내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샌달을 신어 맨발이었지요. 마침 그때 처음 보는 한 꼬마아이가 나타나 내게 뭐하냐고 묻는 것이지 뭡니까. 응, 보다시피 발톱 잘라내고 있어. 말하는 나도 웃겼습니다. 그 녀석이 나보고 그러더군요. 양말도 안 신었느냐고. 순간 어벙벙해졌습니다. 눈길을 밑으로 깔며 그 녀석 발을 보니 샌달을 신었는데도 양말을 신었더군요. 그런데, 그 녀석은 이미 다른 데로 화제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건성으로 듣는 체 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듣다보니 그 녀석의 말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 녀석 말을 생각나는대로 나열해보겠습니다. 13살, 초딩 6학년 아이인데 내게 거의 말을 놓아가며 혼자 막 떠들어대더군요. 괄호안은 내말입니다.

─나는 지금도 밥도 제대로 못 먹어. 잠도 제대로 못 자. (왜?) 핵폐기장 때문에. 핵폐기장 생각만 하면 밥이 잘 안 먹혀. (그래서 긍가? 애가 좀 말랐어요) 나 저기 붙어 있는 사진보고 분노했어. 주민들이 다친 사진. 내 꿈이 먼지 알아? 핵폐기장 백지화! 군수 빨리 쪼까냈으면 좋겠어요. 군청에 가서 쪼까낼 수 있어. 전경들이 지키지 않는 뒤쪽으로 돌아가면 돼. 내가 알아. 쉽지는 않을 거야. 근데 부안 군민들끼리 군수 새로 뽑으면 좋겠어. 핵폐기장 반대하는 사람들이 몇 명인지 알아? 6만명. 1만명은 찬성.

─친구들이 반대는 한다고 말은 하는데, 웃겨. 집회장에 가보면 그 애들은 하나도 없어. 나 혼자 뿐이야. 말만 하고 행동은 안 해. 투쟁을 해야지.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거의 뒤집어질뻔...) 초등학교로 돌아다니면서 대규모집회를 했으면 좋겠어. 제2의 등교거부를 해야 해. 그래서 백지화시켜야 해. 애들이 공부는 나중에 해도 되는데 투쟁은 안하고 공부만 하려고 해. 나는 공부도 안돼. 머리가 텅 비었어. 부안 군민들의 속을 애들은 몰라. 부안 군민들이 얼마나 어렵게 투쟁하는지 애들은 몰라.

─아저씨, 몇 세야? 결혼했어? 여자친구 있어? (농으로, 여자친구 많아!) 잉? 바람둥이네. 나만했을 때 여자친구 있었어? 나는 있어. 나보다 네 살 아래야. 근디 잘 못 만나. 백산에 살아.(백산은 부안읍내에서 좀 떨어져 있지요) 원불교 수련회 할 때 만났었어. 나 법회에 나가는데 오늘은 안 해서 여기 성당으로 왔어. 나 있잖아, 핵폐기장 백지화 안 되면 결혼 안 할거야. 원전 있으면 기형아 낳거든. (나는 이 흥미로운 꼬마아이의 여자친구와의 관계가 궁금해서 이래저래 몇 차례 물어보다가, 짝사랑하니? 물었더니) 응.

─그래도 나는 편해.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다 반대하거든. 삼보일배 할 때도 사람들한테 (홍보물) 나눠주고 그랬어. 부안 군민들이 나 많이 알아. 욕본다고 먹을 것도 주고 뭐 사먹으라고 돈도 주고 그래. 근데 나 서울까지 걸어가고 싶어. 핵폐기장 반대하면서. 얼마나 걸려? (너라면 두어 달 정도). 쇠사슬도 차고 가야 해? 밥은 어떻게 먹지? (너 밥 잘 안 먹는다면서?) 그래도 배고프면 먹어. 밤에도 계속 걸어가야 돼? 올 때도 걸어와야 해? (아니) 차타고 와? 버스? 자가용? 난 꼭 노무현한테 걸어가고 싶어. 내가 여기서부터 걸어가면 노무현이 문 열어줄 거야. 어린애가 걸어왔다고. 그러면 나는 백지화시켜달라고 할거야. 꼭 걸어가고 싶은데, 그러면 학교도 빠져야겠네? (어려서 안돼. 어른도 힘들어.) 아냐, 그래도 난 갈 수 있어. 난 운동을 많이 해야 해. 나 걸어가면 뉴스에 나오겠지? 근데 나 서울까지 걸어가면 할머니가 울 거야. (보내긴 하실까?) 응.

꼬마아이의 말을 유심히 들으면서도 나는 여기저기 좀 쳐다보느라고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으면 이 꼬마아이는 어김없이 내 손등이나 어깨를 툭툭 치며 자기에게 나의 시선을 돌리게 하면서 말을 계속 합니다. 그 모습이 참 귀엽더군요.

─내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싸우게 된지 알아? 학교 끝나고 집에서 뉴스 보는데, (부안에) 핵폐기장 한다고 나왔어. 그래서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엄마는 대충대충 살아 그러데. 궁금해서 집회장에 나가봤어. 그래서 핵폐기장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어. (나는 다시 한번 뒤집어집니다~)

나는 이 꼬마아이의 말을 일방적으로 들으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이런 고통과 분노를 주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이런 아이가 존재한다는 것에 뭔지 모를 희열을 느꼈습니다. 결국 나는 이 아이에 혹해서 팔던 영화제 티셔츠를 입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녀석 왈, 돈이 없어요. 아냐 너에게 선물해줄려고 하는 거야. 나는 아이용 한 장을 건네주었습니다. 그 녀석, 조금 전에는 핵폐기장 노란색 옷만 팔지 왜 이런 색(황토) 옷도 파느냐고 한마디 했었는데, 내가 줄 때는 낼름 받아 챙기더군요.^.^^^

─근데요, 부안영화제가 뭐야? (응. 부안 주민들이 핵 폐기장 싸움 한 거 영화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거야. 그리고 이것저것....) 잉? 그게 뭐 영화야, 영상이지. 촛불집회 때마다 다 봤잖아요. 영화가 아니라 영상이죠... (나 할 말 없음)
꼬마아이는 화제를 바꾸었습니다.

─나 어제 로또 복권 4등 당첨됐어. 할아버지가 사온 거 내가 숫자 찍었는데, 4자리 맞췄어. 내가 맞췄어. 이전에는 5장에 1만원씩 팔았는데, 요새는 할인해서 5천원 받어. 근데 왜 돈 받으러 국민은행 가야해? (돈 많이 받으면 티셔츠값 주어야 해). 응! 근데 할머니가 저금통장에 다 넣어.

이 아이와 이야기 나누던 중 또 한 명의 아이가 생각났습니다. 지금은 아이가 아니지만 노태우가 대통령 하던 때니까 한참 오래전의 일입니다. 그때 당시 초등학생 한 소녀가 전남대 정문 앞 바닥에 그려진 노태우 얼굴을 막 짓밟으며 이 사람 나쁜 사람이야 하더군요. 잊혀지지 않는 기억입니다. 혹은 4·19때는 초딩들이 스크럼 짜고 교문을 나섰던 역사의 기억도 존재합니다.

나는 오늘 이 꼬마아이를 알게 되어 매우 뿌듯합니다. ‘투사꼬마’를 만나서라기보다 그의 말에서 느껴진 뭔지 모를 어떤 희열. 투쟁하는 어른들의 언어가 이 꼬마아이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접속된,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한 뒤범벅의 희열. 집회장에 빠지지 않고 나간다는 이 아이. 그동안 나는 왜 이 아이를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내 눈 위로만 시선을 준 것일까요? 다 보는 듯 하면서도 간과하고 있는, 투쟁하는 또 다른 존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꼬마는 내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꼬마아이는 이 밤에도 잠 못 이루고 있겠지요. 하루라도 빨리 그 아이가 편안하게 잠잘 수 있도록 해야 할텐데... 나는 그 아이에게 그랬습니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건강하게 자라야 한다고.

그 아이는 정말 서울에 걸어갈 계획을 세우는 걸까요? 어른들은 대개 다 반대하겠지만,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 부안에서 전주까지 열흘 동안 삼보일배 할 때 자발적으로 완주한 초딩들도 몇 있었지요. 스스로의 생각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말릴 필요가 있을까요? 아이들의 욕망과 권리가 부정당하며, 세상이 어른들의 시계로만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아, 한 가지 궁금합니다. 그 아이는 왜 내게 접근하여 핵폐기장 투쟁에 대한 생각들을 처음 만난 내게 쏟아낸 것일까요. 내가 잠을 못잘 것 같습니다.

* 덧붙여, 12일에서 14일까지 개최되는 부안영화제에 놀러오세요... www.baf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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