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가깝게 들리는 박수와 함성과 한숨 소리로, 벽도 담도 없이 모든 사람들이 한 집 안방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 드는 올림픽 세상이다. 체조 심판들의 편파 판정으로 금메달을 강탈당했다는 분노로 거세진 숨결도 코끝으로 느낄 수 있다.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보인 선수에게 가야 할 상이 가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것은 우리네 사람들의 당연한 마음이요, 소박한 정의감의 출발이라 할 것이다. 원체 정정당당하지 못한 세상사에 지친 사람들이 스포츠에서나마 확인해보려 하는 그것을 빼앗겼으니, 입맛이 쓰디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림픽 화면 밖을 잠깐 봐달라고 호소한다. 그 화면 밖에서의 편파 판정에 대한 우리들의 정의감에 대해 알고싶다. 여기 아주 기막힌 사연을 하나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진실과 건전한 상식의 회복을 말이 아니라 현실로 느껴보고 싶다.
91년 4월 26일이었다. 그 날 따라 몹시 피곤했다. 연일 노태우정권 퇴진을 외치는 시위가 거리를 메우고 있었고, 선전을 맡아했던 나는 페인트와 먹물에 쩔어 학교에서 새우잠을 잔지 여러 날이었다. 오늘은 쉬어야지 마음먹고, 학교 앞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때리고 집에 일찍 들어가 늘어지게 잤다.
하루 휴식 후에 돌아간 학교에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전 날 대학 새내기였던 강경대 씨가 백골단의 곤봉에 맞아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노태우정권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를 기세 속에서 또 다른 젊은이들이 강경대의 뒤를 따랐다. 스스로 자신을 불태우며 부도덕한 정권에 항거한 것이다. 범국민공대위가 자리잡은 학교의 선전부장이었던 나는 며칠마다 한 번씩 죽은 이들의 사진을 제일 처음 받아들고, 그들의 약력과 유서를 옮겨 써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됐다. 죽은 이들은 왜 하나같이 이토록 젊고 투명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인지, 속이 시커멓게 타는 경험이었다.
5월 8일 아침, 학생회실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다가 끔찍한 소리에 잠을 깼다. 아침에 곡소리가 터지다니... 우우… 으흑… 우…. 눈뜨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의 소리가 이방 저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울다가 실신하는 이도 있었다. 그들의 동료인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가 그날 새벽 노태우정권 퇴진을 주장하며 분신했던 것이다.
동료의 죽음에 통곡하던 그들에게는 더욱 기막힌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권의 최대 위기에 몰린 자들은 '유서대필'이라는 기상천외한 탈출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찰은 "고 김기설 씨의 유서가 대필되었다"며, "운동권은 목적을 위해서는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비인간적, 반인륜적 성향을 갖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자살할 사람이 유서를 대신 써달라고 했다"거나 "유서까지 써주며 죽으라고 해서 죽었다"는 비상식적인 사건이 검찰의 각본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고등학교도 못 나왔으면서 대학교 중퇴 행세를 했다면서 폭력정권 타도를 외치며 스스로를 불사른 고인을 자기 유서도 쓸 수 없는 무식쟁이로 매도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고인의 유서를 두고 ''무식쟁이가 이런 달필을 쓸 리가 없다"는 것이 당시 검찰의 시각이었다.(대졸자가 태반인 조직 속에서 고인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아픔에 대한 이해와 학력사회의 병폐에 대한 반성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유서를 대신 쓴 사람으로 검찰에 의해 낙점된 사람이 강기훈 씨였다. 강기훈 씨는 고인에게 대학 후배를 여자친구로 소개해준 죄밖에 없었다. 애인의 죽음 직후에 검찰에 끌려가 90시간에 가까운 강압수사와 협박을 받은 고인의 여자친구는 검찰의 각본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변호인단이 제출한 어떤 증거도, 상식 있는 사회의 어떤 반발도 전혀 통하지 않은 재판이 진행됐다. 당시 검찰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유서가 대필됐는지도 확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강 씨를 기소했다. 담당 검사는 "범죄 일시와 장소도 밝혀내지 못 한 채 공소장을 작성하고 보도된 내용으로 발표문을 쓰려니 부끄러워 사표를 쓰고 싶은 심정"이라고 고백했고, 1심 판사는 "유서대필 인정이 객관적 진실에 부합하는지는 알 수 없다"며 "신이 아닌 인간이 내린 판결임을 이해해 달라"고 덧붙였다.
정치재판의 주역들조차 자신 없어 했던 유서대필 사건, 그것은 부도덕한 집권세력이 위기 정국을 벗어나기 위해 무고한 한 사람의 명예와 인권을 제물로 삼은 것이었다. 유죄 선고를 받은 강기훈 씨는 청춘의 3년을 감옥에서 썩었다. 그것도 동료에게 죽음을 사주하고 유서까지 대신 써준 파렴치범의 낙인을 찍고 말이다.
세월이 흘렀다. 유서사건은 잠깐 현실로 끌려나왔다가 다시 유폐되기를 되풀이했다. 유일한 증거로 채택된 필적감정의 주역이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문서분석실장 김형영 씨는 뇌물을 받고 허위 감정을 한 혐의로 두 차례나 구속됐다. 그러나, 검찰은 "돈은 받았지만 허위감정은 하지 않았다"는 황당한 논리로 무혐의 결정을 했다. 김씨의 유죄를 인정하는 것이 유서대필 재수사와 직결된다는 부담 때문이란 건 누가 봐도 뻔했다. 또한 김씨 같은 자가 감정을 해온 수많은 재판의 신뢰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피하려는 의도가 아닐 수 없었다.
강씨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고 김기설 씨의 여자친구는 "검사가 협조하지 않으면 구속하겠다고 협박해 검찰의 뜻대로 진술했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유서사건의 지휘검사였던 강신욱 씨는 빗발치는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인권의 보루라는 대법관의 인준을 받았다.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으로 재판을 하고 싶다"는 명언과 함께 말이다.
강기훈 씨는 그 사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1심 최후 진술에서 "진실은 언제나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샛별처럼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고 했던 그의 믿음이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오늘도 지속되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들의 고난을 지켜보는 속에서 "진실은 하나입니다. 진실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라며 의연했던 강 씨의 어머니 권태평 씨의 믿음은 또 어떠할까?
과거청산은 포털사이트의 인기검색어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중요한 과제이다. 어디 유서사건 뿐이랴. 친일파나 그 후손이나 아류들, 독재나 폭정의 주역들이 국가기구를 주물러가며 저지른 범죄들의 목록은 길기만 하다. 그것들을 그냥 덮어두고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인권이란 껍데기요, 인권보장은 시늉에 지나지 않는다. 빼앗긴 금메달의 주인을 찾고 싶어하는 우리가 원래 우리의 것이고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권리에 대해서는 왜 이리 소홀한 것인가?
성급하게 용서와 화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사실'자체가 '왜곡'돼 있는데 어떤 사실에 대해 용서를 할 수 있는가? 용서할 '권한'조차 갖지 못했는데 어떻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것인가? 과거청산은 권한을 갖고 사실을 바로잡는 일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의 토대를 바로잡고 똑같은 일의 재발을 막을 수 있는 구조를 창조하는 일이다.
세상에 없을 파렴치한 죄로 무고한 젊은이가 감옥에서 청춘을 썩혔고, 그 낙인을 찍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대법관이 되어 있어도 지장이 없는 세상은 오늘도 똑같은 피해자를 양산하고 그 가해자를 떵떵거리게 만드는 순환열차임을 똑바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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