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주은]의 ING

죽여야 사는 여성들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

남편이 대기업의 영업직에 종사하고 있는 내 친구는 새벽마다 술이 떡이 되어서 쓰러져 자는 남편의 와이셔츠를 검사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행여 와이셔츠에서 여자의 행수냄새가 나거나 루즈가 묻어있기라도 하면 전업주부인 내 친구는 다음날 남편이 술마셨던 술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소리친다.

"어떤 년이 내 남편하고 부루스 추며 지랄한 거야?" 중산층 전업주부인의 정체성은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과의 차별화 속에서 남편을 유혹한다고 믿어지는 여성들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형성된다.

여성노동자들은 말한다. "한편으로는 전업주부들을 부러워 할 때도 있지만 전업주부들은 솔직히 게으르잖아요. 전업주부들은 너무 애들을 혹사시키는 거 아닌가요?"

반면에 전업주부들은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우리 동네에 일 다니는 아줌마 애들 때문에 우리 애들 교육에 지장이 많아요. 엄마들이 낮에 집에 없으니까 뭐든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일하는 여성들은 '게으른 것처럼 보이는' 전업주부들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전업주부들은 '자녀들을 방치하고서 아이들의 요구를 돈으로 해결하는 것 같은' 취업여성들을 비판하며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가부장제의 역사는 유산계급 남성들이 전체 여성들의 성을 통제하고 이분화시키며 시작되었다. 이러한 이분화는 성 이중규범에서 비롯된다. 남성들의 성적인 요구는 강렬해서 통제하기 힘들다는 것이고 '정상적인' 여성들이라면 성적으로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변강쇠처럼 뻗치는 남성들의 강렬한 성적인 욕구는 정숙한 여성과의 관계에서 채워질 수 없다.

성 이중규범에 의한 여성들의 이분화는 남성들의 적법한 자녀들을 낳고 양육하는 존재인 처와, 성적으로 강렬한 남성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첩의 존재로 시작되었다. 처, 첩인 여성들은 경쟁하고 서로를 반목하고 시기하게 된다. 여성들을 분리시키는 이분법은 계속 확대되어 현대에까지 여성들의 다양한 관계들을 규정하고 있다.

모든 동화책과 소설, 드라마와 영화 등에는 착한 여성과 나쁜 년이 등장한다. 착한여성은 무성적인(asexual) 존재이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기다리는 여성이고, 나쁜 년은 성적인 욕구를 비롯한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두 여성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반목하며 갈등하고 있지만 남성들은 두 여성들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활용한다. 아침에는 정숙한 여성의 배웅을 받고 출근해서 저녁에는 술집 등에서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과 신나게 놀다가 귀가하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어떠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는 내용으로 정체성이 구성되기 보다는 다른 여성들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구성하기 싶다. '정숙한' 범주에 남고싶은 외모를 꾸미면서 "음탕한 여성으로는 보이지 않기위해"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게된다. 전업주부(취업주부)는 상대방 여성을 암묵적으로 비판하면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한 남성을 사이에 두고서 뿌리깊게 지속된 고부간 갈등도 여성들간의 관계에서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명제를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였다. 시집살이가 심한 며느리는 "도대체, 우리 시어머니께서 언제쯤 돌아가실까요?"를 질문하며 전국에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다닌다.

최근에 <100분토론>에서 남성들만의 토론은 결국 여성들간의 연대에 흠집내는 것으로 끝났다. 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뼈아픈 고통은 기억되어야 하지만 "어디 감히 군위안부 할머니들을 동두천 여자들과 비교하는가"라는 발언은 동두천'여성들'과 군위안부 '여성들'을 반목하게 만들었다.

억압과 차별에 맞서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주변화되었던 사람들의 연대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파편화되고 쪼개져서 서로에 대한 반목을 계속하는 경향이 있다. 여성들은 상대방 여성을 부정해야만 내가 존재하게 되는 모순된 위치에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통 크게 단결하지 못하는, 쩨쩨하기 짝이 없는 여성들의 '속성' 때문인가?

여성들을 이분화하고 여성의 적을 여성으로 돌리게하는 이면에는 지배권력의 가부장성이 숨어있다. 성녀와 창녀라는 이분법 뒤에는 여성과 남성의 성욕을 다르게 규정하는 성 이중규범과 성 산업이 숨어있다. 전업주부와 취업주부간 갈등에는 노동시장 내 여성에 대한 차별과 취약한 방과후 보육시설 등이 숨어있다.

고부간의 갈등에는 부계사회에서 남성들에게만 편중된 자원이 놓여있다. 마지막으로 '동두천 여성 죽이기'로 끝난 <100분토론>을 주도한 사람들은 남성토론자들이었다. 과연 여성들을 화난 피해자로 만들고있는 것은 누구인가? 며칠전 집회에서 드러난 구호처럼 집장촌 여성의 적은 여성단체인가? 이처럼 여성들끼리 싸움 붙이고 숨어서 잔인하게 즐겨보는 자들은 누구인가?

여성의 적은 여성이 아니다. 여성의 적은 계급사회에서의 불공정한 자원배분, 성차별주의적 (무)의식과 제도, 거기서 이익을 얻고있는 일부 남성들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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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중규범 , 가부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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