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주은]의 ING

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 어머니

술 마시고 담배피는 ( )
연애하고 싶어하는 ( )
살의를 느끼는 ( )
자위행위를 즐기는 ( )

위의 ( )안에 만약 성인남성을 넣어보면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싱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 )안에 어머니를 넣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사람들은 ‘술 마시고 담배피는 어머니(“세상에, 아이를 생각하셔야죠!”), 연애하고 싶어하는 어머니(“남편이 없나봐. 자식에게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살의를 느끼는 어머니(“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우셔야할 분이... 끔찍해라.”) 자위행위를 즐기는 어머니(“어머나, 이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께요”)’라는 문장을 읽어 내려가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하며 진저리를 치게 된다.

자애로운 성모마리아를 연상시키는 ‘모성본능’이라는 신화는 일터와 생활공간의 분리를 동반한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다. 그것은 ‘오염된 세상을 구원하는 안식처’로서의 가족과 생산성과 효율성에 기반한 삭막한 일터라는 극단적인 상징체계와 함께 이루어진다.

생산, 정신, 이성과 합리성, 효율성, 일터는 남성성과 결합하게 되고, 소비, 육체, 감성, 애정, 가족은 여성성에 적합한 것으로 정의된다.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여성과 남성이라는 범주가 강조되고 가족과 일터에 상응하는 대조적인 특징들이 ‘발명’된다.

이전까지 남성과 함께 집 안팎에서 함게 일했던 여성은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면서 청천벽력같은 “내가 하루 종일 일터에 가서 돈 벌러 나갈테니 집에 있으라”는 통고를 듣게된다. 중간계급 이상의 여성들은 집에 남아서 아이들을 돌보는 ‘성스러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것은 ‘아이는 더없이 소중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에 각별한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아동기의 탄생과 함께 이루어졌다. 걸음마만 할줄 알면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막걸리 주전자를 갖다 주며 농사일을 거드는 노동자이자 작은 어른으로 간주되었던 아이들이 거듭나게 된 것이다.

아동기의 탄생은 ‘만약, 이때 특별한 보살핌이 주어지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이것은 남편이 일터로 출근한 집에 아이들과 함께 남겨진 중간계급 여성들의 존재를 정당화 하는 논리이다. 동시에 어린 자녀들과 떨어져서 일하는 어머니들을 불안하게 하면서 그녀들을 비난하는 이데올로기로 발전하게 된다.

어머니는 자녀의 성장과 발달에 일차적인 책임자라는 모성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를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지만 가장 은폐되어 있다. ‘모성본능’이라는 신화는 여성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하고 체육복과 운동화를 세탁하는 것, 방청소 하는 것을 노동이라고 보게하지 않는다. 배 고프면 밥 먹고 싶은 식욕이 생겨나는 것처럼 사랑스러운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하게되는 본능적 행위라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머니는 인간이 아니라 자동판매기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비난의 근거는 자판기에서 설탕프림커피라는 명령버튼을 눌렀는데 블랙커피라는 결과가 나왔을 때의 황당함에 비유될 수 있다. “어떻게 엄마가 그럴 수 있어?”라고 비난을 받는 어머니는 그런 비난을 하는 당사자가 한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갖고 있는 욕구들의 일부에 잠시 관심을 가졌던 여성들이다.

자식의 이름으로 된 버튼을 누르면 신속하게 보답할 것으로 기대되는 어머니들의 보살핌 행위가 노동이 아니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차별받는다. 대형마트 식품매장에서 하루종일 서서 “지나가시는 고객여러분, 맛 있는 젓갈 한번 드셔보고 가세요”라고 소리치는 여성들의 노동은 저숙련노동으로 평가되어 저임금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가족에서 “아가야, 이거 한번 먹어봐라”라는 모성본능에 입각한 행위를 장소만 옮겨서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별다른 노력과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초등학교는 아이의 안전을 책임지며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일차적인 주체는 어머니로 상정하고서 모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자녀들의 등굣길에 횡단보도에서 서서 자동차 사고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녹색어머니회가 있다. 그러나 녹색아버지회는 없다. 그리고 초등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대부분의 학교에서 실시되는 어머니급식 당번 제도는 어머니들의 취업 유무와 상관없이 2주에 한 번씩 반강제적으로 어머니들을 불러서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밥과 국을 푸게 한다.

어머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후의 식민지이다. 가족, 학교와 교회, 노동조합, 노동시장, 국가는 모성본능, 자녀양육의 1차적 책임자(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어머니들의 노동을 무급으로 착취하고 있다. 도대체 ‘미혼모’는 있는데 ‘미혼부’는 어디에 있는가? ‘부성본능’은 없는데 왜 ‘모성본능’만 이 거리를 활보하는가?

이윤추구와 생산성을 속성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모성본능’이라는 신화에 입각하여 여성노동자를 다양하게 차별하고 있다. 따라서 어머니를 식민지화하고 자신이 식민지 종주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를 성찰적으로 반성할 때 변혁을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우리가 ‘신성’해야 할 어머니가 ‘속물근성’을 보인다는 이유로 그녀를 비난하고 있거나 “어머니!”라고 외치며 영원한 향수의 대상으로만 그녀를 고정시키고 있다면, 착취의 메카니즘에 눈을 감고 있는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신의 욕구와 권리의 주체가 될 때, 자판기가 아닌 인간으로 대우받을 때, 우리들은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진정한 진보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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