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길섶]의 왼손놀이

정선에서 영덕까지, 그 문화지리의 경관들

4월 7일과 8일, 1박2일의 짧은 일정으로 강원도 및 경상북도 일부를 도는 여행을 했다. 일 관계상 도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자연과 함께 하는 맘대로 여행이었고 일장춘몽에 얼큰히 취하는 봄나들이었다. 나는 지방여행을 즐기지만 한동안 외지 여행을 못해 내내 아쉬웠는데, 이번 여행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여러 가지 생각들을 많이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대개가 다 그렇듯이, 이번도 자연과 지리를 따라 이동하는 여행이었지만 그런데 웬지 나의 시선은 끊임없이 문화적 대화로 이끌렸다.

문화적 대화란 게 별게 아니라, 지리적 공간들에 따라 다르게 펼쳐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보고 ‘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상상하는 발견의 여행이다. 여정에 따라 이동하느라 곳곳에 사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할 수 없었으나 곳곳에서의 발견의 즐거움은 충만했으며, 그 충만은 국토의 문화지리적 현실에 대한 사유로 튀겨졌다.

#1.
4월 7일 아침 8시 청량리역을 출발한 무궁화호는 영월을 지나 예미역에 11시 30분에 도착했다. 나는 예미역에서 내려 자동차로 부안에서 오는 일행을 만나기로 했다. 일행을 만나려면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나는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해 도로를 따라 걸었다. 예미역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느니 타지의 풍경들을 살펴보자는 마음에서였다.

다른 한쪽으로는 철길이 계속되었다. 언제부턴가 폐역이 된 함백역 쪽을 향해 한참을 걸었다. 아마 철쭉꽃으로 유명한 두리봉으로 가는 길이었을 터다. 2차선 도로와 철길과 작은 하천이 모두 한 줄기로 얽혀 이어지고 있었고 그 양쪽으로는 높은 산들이 치솟아 있었다. 탄광촌의 흔적인지 도로 옆 자그맣게 이어지는 밭들의 흙색깔이 모두 까무잡잡했다. 내가 사는 부안의 황토와 달리 어두운 흙색깔 이미지의 연속인지라 매우 낯설었다. 게다가 불그스레한 연탄재들이 곳곳에 쌓여 있었다.

태백의 석탄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연탄재가 왜 이곳에 널려 있을까. 이 지역 전체가 생활사박물관이라도 되는겔까. 나로서는 연탄은 80년대 초 서울에서 객지생활할 때 경험해보던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데, 이 지역 주민들은 아직도 생활수단인 모양이다. 연탄재, 저것들은 빈부의 격차를 알려주는 경제적 기호일까, 아니면 생활양식의 차이를 알려주는 문화적 기호일까. 그 물음표 사이에 연탄을 가득 실은 까만 트럭 1대가 동네길로 접어들었다.

얼굴이나 옷이 까만 탄흔에 범벅이 된 채 커브를 트는 운전수를 보노라니 6-70년대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아니 그 마을 전체가 6-70년대 드라마 세트였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생활사박물관이다! 서울의 달동네보다도 더 작고 다닥다닥 붙어 있으며 낡디낡아 어떤 지붕은 그대로 주저앉은 쓰레트 집들. 그 집들은 기이하게도 하천바닥을 따라 쭈욱 지어졌다. 여름마다 침수될텐데, 어찌 저런 곳에 집들을 지었을까,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을까. 그 마을의 반대쪽으로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소나무가 있다는 산 오르막길이 가파르게 열려 있었다. 사람들은 이 요철한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2.
일행과 만난 나는 함백역에서 2km 쯤 더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정선아리랑학교에 당도했다. 정선아리랑학교는 전국 최초로 폐교를 활용한 문화공간이다. 교실 두칸 정도 되는 작은 공간에서 정선아리랑을 연구하는 진용선 씨가 ‘추억의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민요를 좋아하다보니 온갖 것들을 다 모으게 되었다는 진용선 씨는 삐라나 우리가 소실 적에 가지고 놀던 딱지나 교과서 등 해방 이후 온갖 시각물들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그 일부를 ‘추억의 박물관’ 이름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이런 전시공간은 으레껏 서울이나 대도시에 마련되어 있음직한데 강원도 첩첩산골 오지에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분명 오지가 음모하는 문화의 반란이다. 문화는 서울의 인사동에만 있어야 할 특권적인 기호가 아니라 삶의 장소라면 어느 곳이든 공간화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추억의 박물관’은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살아왔던 굴곡진 흔적들, 그 흔적의 텍스트들은 거시담론의 지표에 예속되기보다 민중의 생활사적인 담론의 지표들로서 삶의 현장에 공간화되었으니, 이름하여 작은 박물관이다. 이러한 작은 박물관은, 민중의 생활사는 결국 다중적 주체성으로 이어져 있음을 느끼게 한다. 추억의 박물관을 빠져나와 정선군 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한 아리랑창극을 관람하고 정선 5일장을 둘러 메밀국수 한 그릇에 메밀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니, 아 그래도, 뒷산의 딱다구리는 없는 구멍도 잘 파는데 우리집 멍텅구리는 있는 구멍도 못 판다는 해학의 민요를 부르며 사람들이 살았구나 하는 지혜를 체험한 듯 했다. 삶의 해방은 바로 그 해학적 삶의 사이사이에 요철처럼 존재해왔든가.

#3.
하루밤을 태백산 아래에서 보낸 우리는 새벽같이 일어나 1300리 낙동강 진원지라는 황지연못을 찾았다. 전설에 따르면, 황씨네 집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연못으로 변하여 황지연못이라 하며, 한강물의 진원지라는 검룡소가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 반면 황지연못은 태백 시내 한복판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경탄스럽게도 연못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와 태고적 맑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루에 5천톤을 방출한다니, 낙동강은 마를 일이 없겠다. 화려한 관광지로 변신하는 태백시의 네온사인 아래에는 함백에서도 존재하던 달동네같은 하층민 마을이 눈에 띄었다. 가난하게 살았을 탄광촌의 흔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그곳을 버려둔 채 강원랜드는 자본의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사북, 고한, 태백, 철암 등 석탄시대의 역사가 있는, 그러나 폐광으로 고단했던 삶의 흔적이 있으되 떠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잔존하는 곳들, 혹은 뜻있는 미술인들이 잔존한 사람들에게 꿈을 주고자 탄광촌 미술관을 만들었던 고한이나, 6-70년대 석탄산업의 메카였으되 오늘날은 문화재로 등록된 철암역 선탄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몇몇 건축가들이 합세해 탄광문화보존복원사업으로 회생시키려는 철암지역도 둘러보지도 못하고, 산속의 텅빈 아파트만 뒤로한 채 우리가 탄 자동차는 경상북도 봉화로 굽이굽이 달렸다. 태백을 탈출하는 자동차는 끊임없이 전경(前景)으로 출현하는 깎아지른 절벽들을 들이박으려는 기세였다.

그러나 봉화군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면서 산 능선을 따라 열리는 도로는 새로운 세상을 펼쳐주었다. 현동, 녹동, 도촌, 그리고 청량산과 도산서원으로 이어지는 풍경들에서 신기했던 것은 저 높은 산 7,8부 능선들까지 온통 개간하여 밭으로 경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상도 사람들이 호남에 오면 보고 놀래는 것이 드넓게 펼쳐지는 평야지대이던데 나는 그 반대였다. 경상도 쪽이야 높은 산들 투성이인 것은 익히 보아온 터지만 태백에서 안동으로 이어지는 봉화군 일대가 온통 높은 산 위의 밭들 투성이인 것은 보기드문 경관이었다. 그이들로서는 삶의 터전일테지만 스쳐보는 나로서는 경이로운 경관이었다. 저 밭들 사이사이에 띄엄띄엄 한두채 있는 가옥들, 그리고 봄농사를 준비하는 민초들, 저이들은 저런 곳에서 어떻게 농사를 지으며 어떻게 살아왔을까.

보는 동시에 생각하는 찰나로 미끄러지며 우리가 찾아간 곳은 봉화의 비나리마을. 주변이 둥그런 무릉도원의 형세를 한 그곳에 ‘비나리미술관’이 있다. 산언덕을 경작하며 살아가는 50여채의 비나리마을은 정보화마을이자 녹색체험마을이기도 하다. 비나리미술관도 그 사업의 하나로 조성되었다. 페미니즘 작가 류준화 씨가 운영한다. 페미니즘 작가로서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느냐의 질문에 빙그레 웃고 만다. 귀농하여 사는 부부로서 어려움들을 털어놓는다. 부부는 젊은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 마을의 변화를 꾀하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오래된 습성은 외부의 ‘침입자’에 쉬 동화되지 않는다. 그이들에게 미술관은 낯설다. 아니 그이들은 미술관을 보러 오는 차량들조차 귀찮아 한단다. 우리를 보는 시선도 그랬을까. 산골의 미술관은 도대체 무엇일까. 주민들에게 경로당보다 못한 인텔리적 눈엣가시일까, 아니면 그나마 피아노학원도 구경 못하는 산골 아이들에게 예술적 상상력과 경험을 낳게 하는 제비집일까.

#4.
물오징어에 막걸리 몇 잔을 마신 뒤 우리는 비나리마을을 등지고 울진을 향했다. 점심을 먹고 가라는 부부의 말을 뒤로 한 채, 사실 우리는 아침도 못 먹었지만 갈 길이 멀어 재촉해야 했다. 울진으로 가려던 여정이 길을 잘못 들어 평해로 바뀌었다. 봉화에서 평해로 넘어가는 고갯길도 장난이 아니었다. 넘어넘어 가파지른 고갯길,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의 눈팅은 요란했다.

여행 첫날은 황사때미 우중충한 날이었지만 둘째날은 완연한 봄날이었으니 더욱 가관이었다. 충남 서천 쪽에는 오스트리아의 ‘비인’도 있더니만 평해로 가는 길에는 인도네시아의 ‘발리’도 있었다. 덕분에 상상적이나마 발리 여행도 곁들였다. 그런데 진짜 발리는 영덕 해변이었다. 오래전에 한바퀴 돌았을 때도 감동받았는데, 여전히 그 감동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 이쪽을 통해 동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평해나 포항을 향하는 영덕 내륙 큰 도로로 쭉 빠져 통과하지만, 그건 큰 실수다. 혹 이쪽을 여행한다면 영덕의 바닷가 일주를 놓치지 마시라.

우리는 평해 쪽에서 향했으니 대진해수욕장을 지나자마자 무조건 핸들을 왼쪽으로 꺾어 영덕 바닷가 길로 접어들었다. 축산을 지나 강구항으로 지나는 길은 자연경관도 볼품있거니와 수산업을 하며 살아가는 어민들의 삶을 표상해주는 기호들이 관광상품으로 질곡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빽빽이 펼쳐지고 있는 문화지리적 경관들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돈벌이에의 욕구가 멈추지 않고 있을 터지만, 그럼에도 돈냄새보다 살아가는 사람들 그이들의 냄새들을, 자그맣게 연속되는 어촌 항구들을 따라 미역 말리듯 널어놓은 게, 기분을 아주 좋게 한다. 현금이 많이 오고가는 상품지임에도 소비자본주의의 현란함이 침입하지 못했으나 살아 있음을 생경하게 느낄 수 있는 곳, 그리하여 문화적 대화의 상상력이 증폭되는 곳, 내 촉각적 시선은 그렇게 느끼에 충분했다.

구릉에 또다른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졌으니, 그것은 바로 거대한 풍력발전기 팔랑개비들이 무려 24기가 즐비하게 늘어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장관이었다. 함께 한 일행이 핵폐기장 반대투쟁에 앞장섰고 대안에너지를 그리워하는 부안 사람들이었으니 팔랑개비들의 장관은 그저 볼거리로서의 장관이 아니라 대안적 삶의 볼거리를 제공해준 것이다. 영덕은 며칠을 묵으며 느껴볼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으나 강구항에서 구경한 대게를 영덕에 나가 한 마리씩 먹는 것으로 흡족해야 했다. 비싼 걸 좀 싸게 먹어볼까 하고 알음알음 전화로 두 다리 건너 마주한 영덕대게였다. 4월 8일 저녁 8시, 1박2일의 여정은 그렇게 멈추었다.

태백산맥을 넘으며 강원도를 횡단해 동해로 넘어가는 여행과는 달리, 정선에서 태백을 거쳐 봉화로 내려와 영덕으로 빠지는 북-남동 종단의 여행은 전혀 새로운 맛과 멋을 느끼게 했다. 90년대 이후 우리가 문화적 차이와 다양성을 새로운 진보의 원리로 인식해왔는데, 문화지리적 차이와 다양성의 경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인식할 필요가 있을 터이다. 다른 곳에서 다른 시계로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경관들.

문화지리적 차이와 다양성에서 민중은 다중적 경관들로 존재하고 있고 그 안에서 해체되거나 재구성되는, 그러면서 민중의 정체성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반민중의 정체성으로 변신할 수도 있는, 그러나 서로 다른 시계들에 따라 순환되는 시대적 요청에 운명지어지는 듯 하다. 자본주의 시계의 속도성은 그 운명의 요청을 가속화한다. 그래서 느리게 사는 것의 회귀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나 보다. 정선, 태백, 봉화, 영덕 등지를 여행한 소감이다.

서울에서 졸나게 머리 싸매고 좌파적 입장을 취하고 노동자와 소수자 투쟁을 지지하다가 복잡한 머리 식힌답시고 서울을 떠나 ‘순수하게’ 자연경관에 취하고 허탈하게 귀경하는 진보는 공간과 장소가 없는 진보일 터이다. 자연경관은 문화경관이고, 따라서 그 안에 다중적인 민중의 경관이 필연적으로 결지지 않을 수 없다. 저 높고 가파른 8부 능선에서 사다리 놓듯 경작하는 봉화 사람들이 있듯, 어디에나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고, 그 사람들에게도 WTO의 화살은 운명으로 대면해야 한다. 우리의 경관은 그렇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고통과 함께 채색되지 않는가.

판옵티콘 등 근대사회의 권력형태 분석을 탁월하게 보여주면서 공간이 모든 권력의 행사에서 근본적인 것이라 생각한 미셸 푸코는 1980년 어느 인터뷰에서 “지리학은 정말로 나의 관심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가 로두스섬인지는 로두스섬에 가봐야 안다. 그래야 허풍쟁이의 약발이 설 게 아닌가. 약발 선 허풍쟁이 왈, 여행은 역사-지리유물론의 한 계기이다. 투쟁의 현장을 찾아가는 것은 투쟁의 구호만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투쟁의 공간과 장소도 보아야 할 터, 나도 이제 막 여행 후기로 드는 생각이다. 몸이 움직이니 생각도 예기치 못하게 움직이나 보다. 가볍게 여행기를 쓰려던 게 너무 허풍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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