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동진]의 복지는 죽었다

'우리 안의 연대성' 不在

오늘 자 신문을 보며 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월 급여명세서 중 가장 내기 아까운 항목으로 ‘국민연금’이 70%를 넘고, 다음으로 ‘건강보험’이 9%에 달해 둘을 합치면 80%가 훨씬 넘는다는 기사였다. 물론 연금자원이 고갈되어 나중에 그걸 보상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가장 큰 이유이다. 건강보험이 왜 아까운지 기사에는 언급이 안 되었지만 짐작컨대 보험료는 매달 나가지만 실제 병원을 찾았을 때의 부담은 여전하다는 점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사실 소득세, 주민세 등 다른 항목과 더불어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으로 급여명세서에서 빠져나가는 금액은 ‘아까워야’ 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부담해야 하는 항목이라고 얘기하면,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생각이 대다수일 것이다. 동의하지 못하는 사고의 저변에는 “그걸 왜 내가, 아니 노동자가 부담을 해야 돼? 기업주나 국가가 부담을 해야 하는 걸 왜 노동자한테 떠 넘겨?”라는 급진적(?) 사고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얇을 대로 얇아진 월급봉투에서 ‘벼룩의 간을 빼먹듯’ 빼가서 더 얇아진 월급봉투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상식적인(?) 정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개인의 생존과 삶을 꾸려나가는 데에 방패막은 없이 오로지 스스로 먹고 살 길을 헤쳐 나갈 수 밖에 없었던 조건이나, 기껏해야 주위 가족이나 혈연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이 의식 깊숙이 내면화되어 버린 까닭도 있을 것이다. 국가기관이나 사회가 하는 일이라곤 그저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하는 식으로 한 개인의 삶을 갉아먹거나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강요하는 힘’으로 밖에 인식되지 않았던 역사적,사회적 상황이 의식 깊숙이 불신감으로 자리잡은 까닭도 있을 것이다.

이러다 보니 매년 사회보험관련해서 제도개혁을 추진하다 보면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보장성과 재정의 건전화를 추진하려면 보험료를 올려야 하는데, 보험료를 올리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쉽게 올리지 못한다. 역으로 별 효과도, 혜택도 누리지 못하는 데 자꾸 부담은 늘어나는 것에 대해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달이냐 달걀이냐’는 식의 논쟁만 오가기도 하고, 해법으로 보험료는 올리는 대신 보장성은 강화하자는 ‘사회보장판 빅딜’이 제시되기도 한다. 요즘 그나마 ‘자기 것’을 일정정도 챙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계층(이들의 대부분은 대기업 화이트 칼라 정규직 노동자이다)에겐 오히려 ‘개인의 것’을 강화하는 방식이 쉽게 동의를 얻는 것 같다. 기업연금 도입이 그러하며, 우리사주니 뭐니 성과급으로 주식을 나눠주는 것이 그러하며, 암보험을 비롯한 생명보험 가입 등의 한 두 개라도 민간보험을 가입하거나 노조 단협협상에서 이를 요구하기도 한다.(우리 사회에서 암보험 등 생명보험에 가입한 가구는 약 800만에 달하며, 이것에 의해 생명보험회사 등으로 들어가는 돈만 한해에 몇 조에 달한다. 이 돈이면 무상의료는 ‘꿈’이 아니라 지금 당장 달성할 수 있는 ‘현실’이 된다). 심지어 ‘무상교육’에 동의하는 이유가 남는 돈으로 자식들 학원을 한군데라도 더 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도 있다. 이렇게 된 것의 근원에는 모든 것의 대부분 차지하고, 일부를 남겨 주면서 그 일부분을 ‘나누는 것’을 ‘도덕’이라고 가르치거나 강요해 왔던 의식과 제도가 자리잡고 있다.

요즘 한참 논란이 되고 있는 비정규법안 관련해서도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윤리적으나 도덕적으로는 당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현실에서는 ‘남의 일’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비정규직의 존재가 정규직 고용의 안전판으로 인식되어지는 현실 아니 실질적으로는 ‘그렇다는 의식’이 지배적일 때, 비정규직은 연대의 상대이자 주체로서 인식되어지기 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위한 ‘방패막’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방패막은 안타깝지만 소용이 다하면 다른 것으로 교체되어야만 하는 ‘소모품’일 따름이다. 이런 지경에서 제 아무리 전체 노동자의 연대와 계급적 단결을 위해 ‘임금인상투쟁’보다는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 ‘사회공공성강화투쟁’을 위해 정규직 대기업 노조가 나서야 한다(소위 사회연대적 노동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소리는 공허하게 들릴 따름이다. 왜냐하면 이는 ‘내부의 문제’를 ‘외부를 향한 시선’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고, 먼 산으로만 눈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내부의 문제’는 그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형성한 게 아니라, ‘외부(자본)의 힘’에 의해 강제되어 내면화된 결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예는 비단 생산현장과 기업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시청을 하는 이들은 늘어나고, 가슴을 흐뭇하게 울리는 사연이 언론을 장식하기도 하지만, 또 다르게 자기가 사는 동네 옆에 노인요양시설이나 정신요양시설이 들어설라 치면 ‘혐오시설’이라고 하면서 기피를 하거나 ‘시설유치반대투쟁’을 전개한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복지시설이나 기관은 일상적인 지역주민생활과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흔히 ‘격리’하거나 ‘수용’하는 시설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며, 실제로 많은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과는 동떨어져 있는데에 설치되어 있는 것거나 높은 담이든 물리적인 것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을 ‘정상’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여, ‘비정상’은 사회에서 사라져야 하거나 제외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여전히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에 기반한 ‘복지제도’의 단면이기도 하다. ‘눈에 안보이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보는 잘못된 관념의 제도적 표출이다. ‘노점상’ ‘노숙인’을 바라보는 의식과 태도, 그에 대한 정부의 대책도 이러한 관념의 연장선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물론 이러한 관념과 제도는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와 지위를 점하고 있는 계급이 조장하고 퍼뜨려왔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그 지배적인 위치와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의식적 토대로 또한 작동한다.(모든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의식이다) 그래서 이러한 의식과 관념, 제도를 혁파하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이들 지배계급에 대한 폭로와 투쟁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데에서 부정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안의 ‘비연대적 의식’에 대한 지적과 투쟁 또한 게을리 해서는 앞의 과제도 더욱 힘들 것임이 분명하다. ‘연대’란 ‘서로 나누는 것’에 앞서서 ‘함께 하는 것’이다. 근데 요즘 우리 안을 보면 가진 이들과 ‘서로 나누는 것’을 ‘사회적 연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다수인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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