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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1988년 12월일게다. 내가 군대로부터 해방되기 2달 전이다. 평일 오후의 어느날인데, 부대 정문 근무를 마치고 중대에 복귀해보니 중대원들은 모두 산악체육을 위해 대대 연병장으로 올라갔다. 솔직히 말하면, 날마다 하는 산악체육을 빼먹을 요량으로 후임근무자들과의 인수인계(사실 뭐, 할 거 없다)를 좀 길게(?) 하다보니 중대원들은 우리를 기다리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텅빈 내무반 안팎을 돌아다니며 시간 때우느라 지겨웠고, 우리 소대장은 간밤에 뭘 했는지 산악체육도 인솔 안하고 내무반에 드러누워 퍼져 자고 있었다.
그때 화장실에 간다고 나간 일병이 황급히 내무반에 뛰쳐 들어와, 고병장님, 불났습니다, 불!, 하는 게 아닌가. 부리나케 나가보니 중대 상황실과 3소대에서 시커먼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우리 중대는, 당시 상황실이 1,2소대와 3,화기소대의 가운데에 있었다. 이미 연기는 꽉차게 형성되어 문밖으로 밀고나오던 터라 접근이 어려웠다. 내부는 보이지도 않고 빨갛게 타오르는 불길도 없이 지독하게 케케한 냄새를 풍겨 짜증스러운 사태인지라 두 명이서는 불길을 잡기가 어려워보였다. 나는 그 순간 불타는 상황실의 바로 옆인 우리 내무반 물품들이라도 건져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내무반 안으로 뛰쳐 들왔다. 앗차, 소대장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소대장님, 소대장님! 상황실에 불 났어요, 불! 소대장은 들은 척도 안하고 계속 퍼져 잤다. 나중에 들은 바, 장난치는 줄 알고 계속 잤다나...
시꺼먼 연기를 보고 대대원들이 모두 우리 중대 막사로 내려왔다. 불은 우리 내무반으로 넘어오지 않았고, 그러나 ‘상황실-3소대-화기소대’는 모두 전소했다. 체육복만 입고 있었던 중대원들의 모든 개인 보급품들이 다 탔다. 전투복, 전투화, 야전잠바, 모자를 비롯해 개인 물품과 현금, 방목면, 군장, 그리고 M16소통과 각종 화기들이 싸그리 재가 되었다. 맙소사, 어떻하나. 최전방의 겨울이 시작되었는데... 사적인 그림자를 보존할 수 없는 군대생활에서 더블백 안에 소중히 짱박아놓은 이런저런 추억들을 한순간의 불길로 보내버린 안타까움이 컸을터지만, 우리는 중대 막사를 옮겨 새로운 시작을 했다. 전투복류와 소총류는 어찌어찌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병사들에게 지급된 40벌 정도의 야전잠바(야상)가 참으로 민망한 걸래같은 누더기 헌옷이었는데, 한국전쟁 때도 아마 이런 야상은 없었을 터인데, 세상에 이럴 수가, 삼청교육대 옷이 아니던가! 등에는 ‘삼청교육대’라고 희미한 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내가 근무했던 사단은 최전방 부대였음에도 여지없이 삼청교육대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입은 것은 삼청교육대에 끌려온 젊은이들이 입었던 옷이었다. 삼청교육대가 1980년에 설치되었던가. 물론 그이들에게도 성한 야상을 줬을리 만무고, 그들이 남기고 간 폐기품 중의 폐기품을 창고에 길이길이 보관하여 8년 뒤 병사들에게 보급했으니, 참으로 하소연도 못하는 인권침해에, ‘군발이’ 특유의 눈물이 속을 더럽게 뒤집었다.
의문이 간다. 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병사들에게 그따위 옷을 지급했을까. 야상은 군 복무 중 한번 지급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전투복처럼 재차 지급이 안된다. 그런데 문제는 병사들의 개인적 사고에 의해서도 아니고 중대 사고에 의한 집단적 피해자들인데도, 새 야전잠바를 지급해주는 배려를 안해주다니, 어처구니 없었다.
그 이유가 아마도, 2개소대 이상이 전소해버린 화재사고를 육군본부로 보고하지 않고 사단 내에서 차단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내가 두 달 후 전역할 때였든가. 부대 간부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 1개소대가 전소했을 때 소대원 숫자만큼의 소총을 채워넣고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은폐하는데 7,8년이든가 10년이든가 걸린다고 했다. 우리 중대의 경우 2개소대원 분량의 소총 전소를 은폐하려면 적어도 15년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아마 그 계산이 맞다면 17년후인 지금쯤에야 다 마무리가 되었을성 싶다. 우리 사단 아무일 없었시유~, 하고 말이다. 내 기억으로 사회에 나가 화재사건을 발설하지 말 것을, 간부가 당부했었던 것 같다. 부대의 안녕을 위해. 다시 말해 중대의 2개소대 화기류 전소사건은 사단 내에서 은폐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바로 여기에 있었지 않았나 한다. 소총을 전소당한 부대원들에게 ‘삼청교육대’ 야상을 입힐 수 밖에 없었던 이유. 화재사고를 은폐했으니 수십벌의 야상을 보급받을 방도가 없었으리라. 나는 오늘 이렇게 생각해본다. 어떤 놈의 출세를 위해 ‘무사고’ 경력을 쌓느라 2개소대 병사들의 인권을 뭉개버렸지 않았나... 하기사 당시만 해도 ‘군발이들의 인권’이 존재할 리 없었다. 아, 그래도 전역하고 예비군 훈련 때까지도 입을 옷인데, 그따위 싸가지 없는 짓을 하다니, 도대체 어떤 놈이었을까.
나의 오랜된 병영사고는 일주일 전 발생한 GP참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나, 이번 참사를 접하며 다시 강제로 기억되었다. 유사한 일이 같은 사단에 20년 전에도 있었다던데, 황당하게 죽어가고 유가족들마저도 왜 죽었는지 몰라야 했다던 그이들의 죽음이, 다시 떠올라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고는 20년만에 일어난 게 아니라, 연속적이다. 군대 갔다 온 예비역들이라면 평생 지워지지 않는 반복된 꿈자리의 공포가 있다. 꿈 속에서 입대하는 꿈을 꾸는 것, 그것도 분명히 군대에 갔다 왔는데 왜 또다시 이등병의 이름으로 입대를 해야 하는지 억울해 하고 난감해 하는 표정을 짓는 꿈을 꿀 때, 돌아버린다.
의문사 외에도 개값으로 처리되는 묻혀진 죽음의 사고들이 수두룩 한 현실에서, 짓밟혀 온 생명 및 인권과 군대·군사문화의 재현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군대사회의 근대성을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 술자리의 ‘짜증난’ 군대 이야기일지라도 우리 청년들의 삶을 뒤틀어버리는 악몽들을 풀어내는 이야기로서 말이다.
2
언론들이 이번 참사를 보도하는 특별한 방식이 존재했다. 첫째, GP 내무반에는 수류탄과 실탄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방식. 실제로 내무반과 상황실이 따로 각방으로 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태연히 규정을 어긴 행위’라는 특정한 담론이 생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둘째, 규정을 어기는 행위가 관행으로 되어옴으로써 대형참사를 불러 일으켰다는 방식. 여기에는 ‘군 기강이 해이해져 초래한 참사’라는 특정한 담론이 생산되었다.
모두 맞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들은 내가 보기에 기자들 특유의 수법이다. 대형참사를 사전에 막지 못한 군에 책임을 묻기 위해서일터다. 위의 첫째 방식은 설령 맞다 할지라도 의문점이 있다. GP 내무반에는 수류탄과 실탄을 가지고 들어가면 안된다는 규정이 있는지 몰라도, 그리고 지금은 바뀌었는지 몰라도, GP 이남 남방한계선의 철책선을 지키는 GOP에는 그런 규정이 없었다.
나는 1987년과 1988년의 3월에서 10월 동안에 운좋게도(철책선 경계를 서지 않는 후방병들이 당하는 훈련이 없어서 운 좋은 일이다) GOP 소초에 근무하며 두 해 모두 상황병을 했는데, 상황실은 내무반에 있었고, 따라서 근무용 수류탄·실탄·조명탄 모두를 침상 바로 옆에 편안히 모셔두었다. 수류탄은 연필꽂이만한 둥근 종이박스에 하나씩 집어넣었고, 실탄은 한 탄창에 20개씩 집어넣어, 각자의 관등성명을 명기하여 관물대 보관함에 보관한다. 그리고 근무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나눠주고 걷어들이는 일은 상황병이 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의무’로 생각했다. 그런데 뇌관(수류탄)을 껴안고 자면서도 아무런 문제도 못 느끼고 생활했다니, 아찔하다.
그리고 근무방식을 임의로 바꾸고 내무반에 수류탄과 실탄을 가지고 들어가는 등 기강이 해이해져서.... 라는 보도방식은 과연 정확한 진단인가. 에프엠대로, 칼대로 기강 철저히 하는 것이 무사고를 관철해내는 것인가. 군 기강을 철저히 하는 게 오히려 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외부의 침입이 아니라면. 내 경험으로 보더라도 그렇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 중대는 중대장이나 인사계 상사가 인간적으로 무지 좋았다. 내가 볼 때 그 사람들에 있어서 ‘기강’이라는 단어는 없었던 듯 싶다. 가령, 후방(철책선이 아니면 우리는 전방도 모두 후방이라 했다)에 있을 때 훈련시 군장검사라는 것도 사실상 없었고, 며칠씩 진지에 나가 훈련하거나 작업할 때 인사계는 우리가 주문하는대로 (그것도 외상으로) 라면·가스·소주 따위들을 보급해주었다. 그러다보니 후방에 있을 때나 철책선에 투입해 근무할 때나 아무런 사고도 없었다.
앞에 중대 화재사고 났다는 이야기는, 다른 대대에 수류탄 분실사고가 나는 바람에 우리 소대가 그 중대로 전입해 들어갔을 때 이야기이다. 그 중대의 중대장이나 인사계가 모두 에프엠 칼이었는데, 큰 사고만 두 번이나 났다. 우리 소대는 내 군생활 절반을 지나면서 O대대에서 *대대로 집단전입했었다. 그런데 애초의 O대대장은 병사들을 무던히도 괴롭히는 타입이었는데, 결국 우리가 GOP에 있을 때 다른 중대의 소초장이 수류탄을 까 자살했다. 반면에 애초의 우리 중대장은, 어릴 때 한약 먹으며 무를 먹어 머리가 하애지는 등 ‘2% 부족해보이는’ 신병을 그 신병의 바램으로 후방에 격리시키지 않고 GOP에서 함께 생활했으나 아무런 사고 없었다. 그 신병이 자신이 힘 쎄다고 자만해 쓰리빠 신은 채 한손으로 역기를 들다가 놓치는 바람에 한쪽 발등에 역기를 내리친 일밖에. (근데 놀랍게도 그는 다치지 않았다.)
대형사고가 났다 하면 언론은 대개 무책임하게 가상의 논리에 빠진다. 물론 타당한 측면들도 있다. 하지만 고유한 사건상황에 따르는 현장 추론보다도 이래야 된다는 어떤 막연하되 경직된 윤리성에 빠져 잣대질한다. 이번 사건보도에서도 ‘군 기강 해이’라는 담론 방식으로 들이댔지만, 철저히 실패했다. 이미 계획된 일이었는데, 원래의 근무방식대로 시행했었다면, 사고는 없었을까. 축구를 보지 않고 그 시간에 취침을 했었더라면? 국방부장관이나 육군참모총장, 혹은 사단장이나 대대장은 모두 텔레비전을 껐을까? 60만 군인 중 그 시간에 텔레비전을 안본 사람들은 몇 %가 될까?
군대는 참으로 많은 틈새들에서 해이하게 돌아갈 터이다. 그게 어찌보면 ‘군인정신’에는 위배될지언정 군대를 숨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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