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길섶]의 왼손놀이

논술을 두려워 하는가

나는 수년 전에 논술을 가르친 적이 있다. 논술을 잘 들여다보면, 논술이 교육혁명의 중요한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사교육비’ 운운하면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그리고 대학입시로서의 논술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려하는 학교 교사들도 있으나 입시과목이 아니면 쳐다도 안보는 교육체제에서 역설적으로 입시과목이기 때문에 논술에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초등학생 교육시장에서 독서·글쓰기·논술 교육이 커진 것은 대입논술 효과 때문이다.

나는 교육이 입시를 향해 앞으로 나란히 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공교육의 개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신자유주의 노동자기계로 ‘인적자원화’하는 교육정책에도 동감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다양한 교육방법이 존재해야 하며, 탈입시 공교육이나 대안교육의 실험들이 시도되어야 한다. 논술교육은 꼭 입시를 위해서만도 존재할 수는 없고, 그 자체 글쓰기 교육으로서 대안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안적 존재방식이 대학입시를 위해서 기능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어떤 점에서는 입시를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할 필요가 있다. 본고사형 논술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한에서 말이다.

최근 서울대 논술 때문에 논술에 대해 말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본고사 논술이라는 게 대체로 진보 교육운동 진영의 판단이며, ‘본고사 부활’을 저지하려는 태세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달리 한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과도 한판 붙어보자는 서울대 총장이 어떤 사람이고 교육철학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외로 하고, 2008학년도 이후 논술고사가 어떻게 출제되는지를 놓고 판가름해야 한다. 조만간 예시문제가 선보인다고 하니 그때 판단해도 될 일이다.

서울대 정운찬 총장은 과거 ‘어린왕자’ 식의 출제방식에 대해 우려하는 발언을 어느 인터뷰에서 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 출제된 문제를 확인해보았다. 서울대 총장이 왜 문제였다고 판단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내가 판단하기로도 좋은 문제 유형이 아니다. 출제된 문제는 다음과 같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거대한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 대부분이 익명의 존재로 방치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음 글은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참다운 정서적 유대관계의 형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어떠한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간략히 밝히고, 둘째, 그러한 사회적 조건에 비추어볼 때 참다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이 글에서 암시하고 있는 개인적 차원의 노력이 어떠한 의의와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라.(제시문 생략)

몇 년 전 펴낸 논술 지침서에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이 문제가 “주어진 제시문의 내용을 설문에서 미리 ‘개인과 개인 사이의 참다운 정서적 유대관계의 형성의 중요성’이라고 단정해버린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제시문에 대한 출제자의 해석이 이미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제시문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데 말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논술문제로서 실패한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암기논술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어린 왕자’는 주제가 뭐고 ‘동물농장’은 주제가 뭐고, 하는 식으로...

그렇기 때문에 출제된 제시문(고전)을 읽어본 사람이 유리하게 된다. 그렇다고 수험생들이 그 많은 고전들을 어떻게 다 읽어보나. 요약본이나 주제들만을 대략 암기할 수밖에. 그러나 논술 문제는 책의 전체 주제와는 무관해야 한다. 제시된 부분만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독해력과 주어진 논제와 연관해서 기술할 수 있는 판단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때로 제시된 부분은 전체 글과 모순될 수도 있으므로 제시문 내부의 문제설정을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바로 창조적인 논술(=지식) 생산의 측정방법일 터다. 어쩌면 정운찬 총장은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지도 모른다.

논술교육에는 운동권 출신들이 많이 참여해왔다. 수년 전,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도 깊이 관여하여 논술 참고서도 펴낸 바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논술 참고서들이 내용적으로는 진보적인 성향이었던 데 반해 글쓰기의 형식에서는 기존의 낡은 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었다고 본다.

논술은 사유의 자유로운 흐름을 흐르게 하는 것인데, 가령, 서론-본론-결론의 형식에서 이미 사유의 흐름이 막혀버리도록 하여 억압자로 작용한 것이다. 내가 논술이 교육혁명일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글 내용에서 진보성을 담지하는 것(또다른 암기!)보다 더 중요하게 글 형식의 새로운 실험성을 담보해낼 수 있을 때를 말한다.

표현형식의 자유!, 그것은 내용형식의 자유를 더 활짝 열어놓는다. 표현형식의 자유라 함은 가령, 문투를 저렇게 쓰면 안 되고 이렇게 써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표현형식의 다양성에 따르는 다양한 글의 효과를 서로 비교해보고 논술자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논술을 지도하는 학교 교사들도 학원 강사들도 대부분은 표현형식의 낡은 구조(서론-본론-결론식 글쓰기 등)에 이미 젖어버렸다. 교사/강사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뛰어넘지 못하고 기존 낡은 방법에 맞추려 하다보니 논술은 다시 갇혀지게 된다. 그들만이 아니라 대다수 출제교수들도 갇혀 있다. 그러다보니 ‘어린 왕자’와 같은 출제방법이 나오는 것이다. 논술이 교육혁명이려면 가르치거나 평가하는 그 주체집단이 먼저 변해야한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교과과정 내로 한정짓자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학교지식 바깥의 지식들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교사들도 문제다. 교과서 지식에 갇혀지고자 할 때 학교/교육은 계속 죽는다. 또한 ‘출제의도’에 스스로를 가두려는 한심한 태도는 논술을 그야말로 입시과목으로 전락시키며 자기주체적인 논술의 생산자가 되지 못한다.

학교교육이 입시방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때 논술의 의미는 상당히 중요해진다. 물론 논술 하나에 모든 기대를 거는 것도 우습지만 ‘통합교과’의 효과를 가진 논술이 제대로 시행된다면, 본고사 부활이 아닌 다음에야 논술고사를 옹호할 필요가 있다. 나는 서울대 논술도 예시문제가 제시될 때까지 기다려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고 본다. 교육제도의 개혁도 필요한 일이지만 교육과정의 패러다임 전환도 매우 필요하다. 문화교육과 함께 논술교육은 교육과정의 패러다임 전환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구더기 무서워 잠 담그는 일만 보고 본고사 부활이라 외치는 것은 좀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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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논술 자체가 진보성을 담보할 수 있으므로 논술은 강화되어야 한다? 오히려 논술로 밥벌어먹고 사는 운동권들을 위해 논술이 중요하다고 강변하는 것처럼 들리네요. 현실적으로 구더기가 무서우면 장을 담그면 안됩니다. 지금 사교육 구더기가 좀 무섭나요? 그걸 몰라서 하는말인가요?

  • 두려움

    그 막돼먹은 경쟁사회, 일렬사회가 두려울 뿐이죠. 근데, 이 글은 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같네요. 그래서 어쩌라구요?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할 때입니다. 이런.

  • 깨굴

    본지 디게 오래 됐네요. 부안집도 보고싶고 아새끼도 구경시켜드려야 하는데... 저는 요즘 정기용샘이 밀어넣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도시건축연구소에 근무함당. 서울 오시면 언제 함 연락주세요~ 제가 핸폰을 잃어버려서 연락처가 없어요. 요기 이멜도 없어서 댓글 달아요~ 제 이멜 주소는 ggagul앳chiiim쩜net임당. 연락처 좀 보내주십셔~

  • 지나다

    논술교육이 '해방적 사유의 흐름'을 만드는 긍정적인 측면엔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이해됩니다. 또한 진보교육운동이 평가권력의 평가시스템에 대한 체제적 비판과 함께 '참교육/지식'의 본질적 접근(성찰)과 생산을 위한 실천적 대안 역시 모색되야 한다는 중요한 일침도 깔려져있다고 이해됩니다. 좀더 이해한다면 과거 사지선다형 학력고사 평가수준에서 '학교지식 바깥'으로 열려있도록한 열린교육과 수능고사 평가수준이 일진보했다는 맥락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토론의 여지가 있는 이런 이해들을 바탕으로 '서울대입시안을 본고사로 섣불리 재단해 부정함으로써 논술교육의 혁명성을 놓치지 말자'는 이 글의 취지에 대해 대화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서울대입시안은 해방적 사유의 흐름을 우리 교육과정에 교육혁명으로 혹은 단초로, 논술교육의 혁명성으로 작동되는 것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논술이 교육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는 취지의 이 글이 서울대입시안에서 출발한 점은 적절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쉽게 말하면 그건 결국 '입시논술'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단 1%에게만 파급되는 것이며, 국민교양교육과정인 중등교육에서 0.1%를 선발하고자 하는 평가체제로 (논술이 사용되어) 작동될 뿐입니다. 그래서 서울대입시안이 본고사냐 아니냐를 지켜볼 필요도 없이, 설령 본고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공교육에서 해방적 사유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논술교육의 혁명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혹 서울대라는 무소불위의 평가권력이 논술을 평가방식으로 채택함으로써 공교육과정에 논술교육이 강화된다면, 기대된다면 이는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아래로부터 그리고 넓게' 라는 운동방식과 배치되는 건 아닐까요.

    둘째, 논술 그 자체가 해방적 사유의 흐름을 만들거나 그래서 교육혁명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학교지식/학교체제가 테두리해 놓은 사유의 틀을 상대화하고 학교를 넘나드는 해방적 사유의 흐름으로 작동되는 데에는 반드시 동시에 짚어야 하는 '열린교육', 즉 학교가 밖으로 열리는 것뿐만 아니라 밖(시장)이 학교로 열리는 문제에 대한 전략적 대안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열린교육이 태동되면서부터 시장에 잠식되어 가고 있는 걸 목도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즉, 도시의 공기가 자유롭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째, 고길섭님의 글을 보면서 진보교육운동의 두과제를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는 사유와 지식, 세계적 감수성을 가장 진보적으로 생산하고 공유/공감함으로써 사회공동체의 일진보를 책임져야 하는 교육주체들이 문화/환경/여성/노동 등 실천적 현실운동에서 생산하고 있는 진보족 사유와 지식, 감수성을 수용하는 문화적/이론적/실천적 대화의 부족 나아가 이들을 공교육과정에 편재시키는 제도적 틀거리의 부재가 떠오릅니다. 설령 이런 실천들이 있다하더라도 교육주체의 개별적 성과로 남아있을 뿐, 진보교육운동의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의제로 실천운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인 듯합니다.(물론 참실운동에선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한편의 또하나는 진보교육운동이 제기하는 사회적 의제와 실천적,전략적 맥락(운동발전단계/흐름)들에 대한 '연대적 대화'의 부족입니다. 고길섶님의 '논술을 두려워 하는가?'라는 이글은 진보교육운동의 연대적 대화의 부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합니다. 이는 진보적이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많은 '학교비평/풍자'들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두과제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진보교육운동의 '공교육강화, 교육시장화반대'는 폭넓은 대중적 연대를 이끌어내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교육운동의 중심에 있는 전교조가 대안적 교육체제까지 이끌어가는 변혁적 교육운동의 지향을 잊고 학교를 수호하는 조합주의적 교사운동의 위험성을 경계해야하는 상황에 이를지도 모르겠습니다.

  • 고길섶


    이 글에서 제가 충분하게 글을 쓰지는 못했습니다.
    ‘논술’이라는 부분만 툭 떼어다가, 그것도 시사적인 맥락에서 언급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그러다보니, 제 생각이 옳든 그르든, 오해의 소지가 많을 것입니다.
    사회진보적인 교육운동의 현 쟁점들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에도 저는 논술교육 문제는 진보교육운동과 연동되어야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댓글들 특히 ‘지나다’님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하여 조만간 다다음 칼럼에도 이 주제로 다시 쓰고자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그때까지 대화를 기다려주시면 어떨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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