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지난 번에 제가 “논술을 두려워 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고, 몇 분이 그에 대해 의견을 주셨습니다. 특히 ‘지나다’님은 저의 사고의 바탕 부분까지 간파해내 공감을 표하면서도 비판적 입장을 제기하며 ‘대화’해보고자 했습니다. 저 역시 이런 대화에 공감하였고, 또다른 글이 필요함을 느꼈기에 이 글을 쓰고자 합니다.
2. 저는 좀더 멀리 생각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육부가 교육을 망친다고 합니다. 교육부가 없어져야 교육이 제대로 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육부만이 아니라 학교라는 교육장치도 없어져야 한다고, 물론 현실성 전혀 없이, 저는 때로 생각해봅니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일상이 학교와 연계된 ‘학교시스템’으로 장악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자본주의 재생산 체제 혹은 근대학교정치의 기제로 가동되고 있습니다. 학교시스템이라는 훈육장치 없이, 상상해보자면, 서당이나 학당과 같은 자율적인 교육-학습의 장이면 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현실구조는 그렇지 못합니다. 탈학교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진보교육은 공교육개혁과 학교의 정상화에 집중하고 있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육/학교 비판은 지배이데올로기의 재생산체제로서의 학교를 비판해왔습니다. 그것은 주로 무엇을 가르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1980년대 교육운동의 급진성은 학교 바깥의 ‘진리’를 학교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 데 있습니다. 혹은 학교 바깥에서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새로운 세계들을 펼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공교육개혁이라는 진보교육운동은 체제내화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배이데올로기 교육으로부터의 탈주에서 ‘살인적 입시경쟁’ 시스템으로부터의 탈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당근, 맞습니다. 살인적 입시경쟁, 대학서열체제, 학교교육의 입시교육화, 고등학교의 위계화 등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학부모들은 사교육비의 가중은 물론 교육비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념운동에서 현실운동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그러나, 특히 사교육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언명령이 공교육개혁의 핵심이슈가 되어오면서 진보교육운동이 꾀해왔던 탈지배이데올로기 의제는 소실되고 전반적인 공론은 교육의 정상화에 쏠리고 있습니다. 사교육비를 줄이고 살인적 입시경쟁을 없애며 대학서열체제를 혁파하기 위한 교육정상화 수단으로서 입시투쟁이 가동되었고, 그것은 수능의 자격고사화, 고교등급제 폐지, 입시 내신강화 등으로 주창되었습니다.
특히 내신강화 경향은 교과서 학교교육의 충실로 이어지고 있고 수능 역시 교과서 바깥을 벗어나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수능 문제가 교과서 지식에서 벗어나 있다고 난리치는 교사를 보면, 나는 그 교사가 지배이데올로기에 충실하려 하거나 자신의 태만을 드러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내신 강화 역시 교과서 지식에 충실하자는 것이므로 진보교육운동의 방향과 맞는지 의구스럽습니다. 학교 내 울타리에서만 놀도록 하는 교육이야말로 교육을 죽이는 거 아닌가요.
더구나 현행교육이 신자유주의 교육이라고 비난받고 있는 터에 내신강화는 신자유주의 교육과 타협하는 게 아닌지요? 내신강화는 교사의 자율성과도 연관되므로, 혹은 전교조 교사들이 현장을 사수하고 있으므로, 혹은 요즘 교과서는 예전과 달리 많이 바뀌었으므로(탈지배이데올로기화?), 체제내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지 모르나, 그러나 나는 의구스럽습니다. 내신강화 이데올로기나 수능의 교과서화 이데올로기는 교육의 (자본주의적/신자유주의적, 근대교육정치적) 재생산 이데올로기가 아닌지요?
3. 내신강화는 사교육(비)을 격감시키고 공교육을 정상화시키자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다시말해 학교의 교과서나 교사들을 통해 교육이 이루어져야지 학교 바깥의 것들을 통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발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입시위주 교육이자 교육을 학교교육에서 독점하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닙니다. 교육은 학교교육이 독점할 권리가 없습니다.
학교교육은 그것이 지배이데올로기 교육이든 아니든 교육활동의 하나일 뿐입니다. 탈학교 아이가 아니더라도, 학교에 충실하게 다니는 학생일지라도 학교/교과서 교육과 비학교/비교과서 교육을 선별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중등교육은 풍부하고 다양한 (지식)세계들과 접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자체로 자기완결성을 가져야 하지 입시의 문으로 다가서는 입시를 위한 교육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입시도 교과서/교사에의 종속이 아니라, 비교과서 혹은 탈교과서 내용으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입시는 배운 것들에 대한 재현의 능력을 넘어 창조적 능력을 가늠해야 합니다. 10대 후반의 나이에 습득하고 사고할 수 있는 수준에서 창조적인 능력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창조적이라 함은 탈지배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배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성향체계로 몰고가는 게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으로 질문하고 답변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창조성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진보적 방향체계로만 몰고가는 교육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것은 또다른 종류의 획일화이며, 진보적 방향체계라고 확신한다 해도 그것은 상대적일 수 있으며 논란적이고 심지어는 보수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논술교육이 혁명적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입니다. 논술교육이 진보적 교육과 학습을 전적으로 담보되어야만 혁명적인 게 아니라, 다양한 지식과 시각들을 접하고 선별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열린교육의 장이라는 점에서입니다. 학교교육체제는 학생들로 하여금 일방적인 지식의 소비자로 전락하도록 해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암기교육이라고 비판해왔던 것은 지식의 소비성을 비판한 것입니다. 학생들은 지식의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여야 합니다. 지식의 생산자일 때 비로소 창조적일 수 있으며, 논술은 그러한 장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논술은 문제설정 즉 문제를 발견하고 분석하고 구성하며 대안적 해결능력에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논술교육만으로 가능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교육이 문화교육으로 패러다임 전환되어야 합니다. 논술교육/글쓰기교육은 그 하나이며, 현실적으로 공교육체제에서 입시라는 것 자체를 폐기하지 않는다면, 교육 및 학습효과를 평가하는 하나로서 논술고사의 역할이 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논술교육이 글쓰기 교육으로서 진화될 필요가 전제됩니다. 지난번 글에도 언급했지만 기존의 논술고사 형식, 지배적인 글쓰기 방식, 논술평가방식은 물론 논술교육주체와 논술고사 평가주체도 열린 사고틀로 갱신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진보적인 시각일지라도 기존의 낡은 형식으로 글쓰기한다면 해방적 사유의 흐름으로 이어지기에는 억압적입니다.
4. 논술고사는 결국 입시수단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입시라는 것 자체를 폐지할 수 없는 사정에서라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나는 학교를 폐지할 수 없는 구조라면 학교가 존재할 수 밖에 없고, 학교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교육을 학교/공교육으로만 독점되는 것에도 반대하며, 학교교육이든 비학교교육이든, 교육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교육은 오늘날 새로운 주체성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문화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고 보며, 입시를 목표로 해서든 자체평가를 목표로 해서든 논술(혹은 글쓰기)은 통합교육과정의 하나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술고사는 입시수단이긴 하되 그 특성상 다른 무엇보다도 얻는 것이 많다고 봅니다. 심지어는 맑스의 <자본론>이나 신자유주의 비판에까지 열려 있습니다. 물론 문제들에 대해서는 갱신할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야겠지요.
정진상 경상대 교수는 <문화과학> 가을호 기고문에서 살인적 입시경쟁을 없애고 학교교육을 정상화하는 유일한 길은 대학서열체제 혁파임을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본고사 부활저지를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가 규정하는 본고사란 당락을 결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런 의미의 논술고사는 본고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대학에서 입시를 독자적으로 치르지 말자는 주장입니다만, 그렇게 해서 대학서열체제를 혁파해나가자고 합니다만, 여기서 나는 대학서열체제와 능력에 따른 특정대학 진학과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나는 평등교육론에 동의합니만, 만일 개인들의 불균등한 지적·감성적 편차들을 평균화(획일화)하는 교육이라면 반대합니다. 물론 전인교육에 바탕하여야 하지만 지적·감성적 차이들이 존재하는 것은 차별의 계기로서가 아니라 다양화의 계기로 보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다양화의 계기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감독의 영화를 보면 즐거워합니다만, 그렇지 않은 영화를 볼 때는 짜증을 냅니다. 교육은 다양화의 계기 속에서도 특정방면에서 역량있는 활동가를 배출하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역량있는 활동가들이 지배이데올로그가 아니라 해방적 역능들과 사회적 활력 생산에 봉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적·감성적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저의 이 생각이 엘리트주의 교육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엘리트주의자는 아니지만 ‘엘리트’교육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만일 평등교육을 모든 사람이 똑같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대학/대학원이라는 게 불필요합니다. 대학서열체제 혁파를 주장할 게 아니라 대학의 폐지를 주장해야 합니다. 어떤 운동단체든 활동가들이 보다 더 역량과 재치를 활동의 무기로 삼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역량/역능은 복합적인 교육/학습효과를 통해서 쌓이는 것일텐데, 바로 그러한 사회적 장치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개인들의 노력으로만, 개인들이 비용을 치르면서 공부하도록 방치하는 게 아니라, 그리고 돈 없으면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공공비용을 들이도록 하되 그 효과 역시 사회적으로 환산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교육비가 가중될수록 그 결과에 대해서도 사적으로 산출되도록 욕망하는 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사교육비 크기에 따라 계급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경향인 오늘, 이 문제를 중대하게 이슈화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적·감성적 수준의 편차에 따른 접근방식이 포기되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평등교육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면서도 차별화된 교육도 필요합니다.
5. 나는 이런 맥락에서 서울대 논술고사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서울대와는 무관하게 나는 논술교육의 혁명성을 말하고자 합니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혁명적 가능성입니다.) 혁명성이란 게 뭐 대단하게 가시화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섬세하고 감성적인 장치들의 전환을 매개로 하는 듯 하면서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나는 교육/글쓰기의 새로운 가능성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방향으로 열고나가며 사유할 수 있는 해방성입니다. 나는 어떤 분의 지적처럼 논술로 밥벌어 먹고 사는 운동권을 위해 논술을 강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지나다’님의 문제제기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
첫째, ‘지나다’님의 지적대로 제가 논술교육이 교육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면서 그 출발점을 서울대입시안으로 삼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은 맞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님의 지적대로 0.1%를 선발하는 평가체제의 입시논술로 작동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대 입시안 중 논술고사 부분에 대한 저의 의견은 그것을 매개로 해서 논술교육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지 서울대만을 위한 논술고사에 주목한 것은 아닙니다. 서울대 입시안 중 논술고사는, 그것이 개방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다면, 그 논술효과가 보수적 내용을 담아가느냐 진보적 내용을 담아가느냐라는 이분법적 구분과는 달리 창조적이며 해방적 사유를 해나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서울대입시안 중 ‘논술고사’ 부분에 주목한 것이지 ‘서울대입시안’ 전체에 주목한 것은 아닙니다. 서울대 논술고사가 개방적/해방적 사유가 가능해지도록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일단 기조가 정해지면 실제 출제에 있어서는 총장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제 그 안에서 출제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는 것일 터이고, 출제된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느냐는 학생들의 몫이자 채점자들의 몫이므로 그 영역 안에서 평가기준을 둘러싸고 끊임없는 논란/투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대 논술고사에 한한 한 그 출제유형을 보고 판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지나다’님은, 서울대라는 무소불위의 평가권력에 의해서는 ‘아래로부터 그리고 넓게’라는 운동방식과 배치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서울대 나아가 여타 대학의 독자적인 입시 자체를 부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논술과 같은 입시방식은 폐기되어야 하며, 수능과 내신에 의해서만 입시가 수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수능과 내신의 한계를 깨는 방안으로서 논술고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거야말로 ‘위로부터 혁명?’에 철저해지는 것은 아닌지요. 왜냐, 학생들은 위로부터 주어진 질문에 사지선다형 답만을 찾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논술은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진행됩니다. 문제를 구성하는 능력의 문제에 개입합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는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보여도 이미 ‘아래로부터 그리고 넓게’ 하는 효과를 생산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방적 사유로 간다면 논술은 논란의 장이 됩니다. 그 ‘논란의 장’이 될 때 논술은 성공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둘째, ‘지나다’님의 지적처럼, 논술 자체가 해방적 사유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거나 교육혁명이 될 수 있지는 않습니다. 맞습니다. 학교를 넘나드는 ‘열린교육’에 대한 전략적 대안이 함께 마련되어야 합니다만, 논술은 그 과정에 참여한다고 보고요, 문제는 논술의 교육방식이 열려져 있느냐 아니면 닫혀져 있느냐라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는 열린 논술교육으로 가기 위한 개입과 참여가 부단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지요. 그러므로 논술이 교육혁명을 가져다 준다라는 명제는 고정되어 이미 확정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 가능성을 점유하면서 투쟁함으로써 달성되어지는 과정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셋째, ‘지나다’님이 지적한 세째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특히 교육운동의 중심에 있는 전교조가 조합주의적 교사운동으로 갈 위험성을 경계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가령 내신을 강화하는 입시방안의 경우가 그럴 수 있습니다. 단순화하자면, 학교라는 장치 안에서 교육을 독점하면서 지배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충실하겠다는 발상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 투쟁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국어교과서는 몇해전 대안교과서를 이미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이데올로기적 타협인 측면이 있습니다. 혹은 미술교사들은 그보다 훨씬 대안적인 교과서를 작업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학교 안에서, 공교육 범주에서 개혁하겠다는 발상은 학생들이 청소년층의 현실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정은 하지만, 교과내용적으로도 공교육 개혁이 매우 요청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리는 학교 안팎으로 깔려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6. 저는 자유학당이 좋습니다. 학교체제를 완전히 해체하고 자율적인 교육의 장으로서의 자유학당. 물론 저는 거기서도 글쓰기/논술 교육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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