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5일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제출했다. 현재 정부도 산재법 개정안을 마련하고 있어서 산재법은 1963년 제정 이후 가장 큰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산재 노동자 보호 절차의 획기적 개선”을 정부는 “보험서비스 수준의 제고와 중장기 재정안정 도모”를 개정의 필요성으로 제기하고 있다.
정부에서 준비중인 개정안은 위에서 밝힌 필요성에 조응하여 △보험료율의 체제 개편과 관리운영체계의 효율화, △ 면담과 상담을 중심으로 한 요양·재활 서비스 지원체계 도입, △ 표준요양기간 운영, △ 보험급여수준의 형평성 제고 등 개악 가능성이 농후한 조항들이 많다.
한편 민주노동당 개정안은 산재보험에서의 ‘선보장 후평가’의 도입을 통한 절차상의 간소화와 ‘재활급여’의 신설을 통해 재활에 대한 필요성 제기에서 긍정성이 있으나 ‘치료와 재활’에 대한 내용 확충과 진입장벽의 해소를 통한 ‘제대로 누구나 치료 받을 권리’에서는 여전히 멀기만 하다.
이번 민주노동당 개정안의 핵심은 △ 진료의사에게 산업재해분류기준표에 따라 업무상 재해인지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는 절차의 신설, △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승인 권한을 1차적으로 담당 주치의로, 종국적으로 심사평가원으로의 이전, △ 선보장(치료) 후평가, △재활급여신설이다. 하지만 여전히 몇 가지 우려지점과 문제가 남는다.
먼저 산재미인식 노동자들에 대한 방안으로 마련된 진료의사에 의한 업무상 재해 여부 판단은 의사가 이주 노동자와 비정규직처럼 산재 신청이 고용과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에 대한 근본적인 절차가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치료조차도 못 받게 만드는 조처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도구로 제안된 산업재해분류기준표의 경우 사고와 같은 재해성 질환에서 이 제도의 도입은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논란이 되는 직업성 질환은 인과관계를 단순화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는 사용이 불가능한 도구이거나 오히려 지금의 근골격계 인정기준처럼 승인을 최소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자문의 협의회나 일반적인 진료과정에서 드러나는 의사들의 진료행태를 볼 경우 과연 외부의 압력을 이겨내며 ‘인정’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든다. 최근의 요양처리지침 개정으로 산재환자들에게 ‘어쩔 수 없다’며 종결을 권유하고, 퇴행성 질환이라고 승인을 안 내주는 것이 지금의 의사들이지 않은가?
선보장 후평가 제도를 도입하고 독립적인 기관에 맡기는 것은 산재 승인을 결정하는 권한을 보험자인 근로복지공단이 가지고 있다는 모순된 현실을 시정하고 노동자들의 일차적 치료를 원활하게 하는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과거의 ‘원인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법안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결과주의’는 누군가에게 허락을 맡고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아프면 치료받는 것’을 의미한다. 절차의 문제가 간소화되고 사업주 날인이라는 승인의 장벽이 걷히는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승인의 시기’를 늦추는 효과에 불과할 수 있다.
물론 당장에 ‘결과주의’를 도입하자고 주장하기는 어렵기는 하나 산재 진입장벽을 낮추고 환자들을 치료받게 하기 위해서는 ‘선보장 후평가’보다 지금의 요양인정기준의 완화가 더욱 중요하다. 근골격계 질환뿐만이 아니라 뇌심혈관계 질환 등에 대한 인정기준이 강화되고 있고 보험 재정을 줄이기 위한 정부와 자본의 시도가 극에 달하고 있는 지금, 선보장 후평가를 도입하고 승인권한을 독립기관에 이전을 하더라도 인정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강화되고 있는 지금의 상태에서는 진입장벽의 완화는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재활급여의 신설은 산재 환자의 치료 목적이 의학적인 완쾌가 아닌 사회적 완쾌이고 정상적인 노동이 가능한 상태임을 제도적으로 확인하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특히 소위 ‘의료 재활’이라는 것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재해 노동자들이 고통 받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감안하면 원직장 복귀를 위한 직업재활, 사회재활, 심리재활을 제도화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성과이다.
다만 이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과거의 ‘입법 투쟁’처럼 전문가들이 모여 정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장 노동자들과 재해 환자들의 요구를 모으는 것이어야 한다. 현장에 쌓여 있는 재활에 대한 고민과 문제인식을 표면화하고 대중적 요구로 조직하려는 시도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이처럼 이번 민노당의 산재법 개정안은 일정정도 의의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우려지점과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산재법의 의의와 한계를 평가하는 기준은 ‘누구나 쉽게 치료 받을 수 있는가?’와 ‘제대로 치료 받을 수 있는가?’여야 한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이 두 가지 기준은 개정안을 평가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져야 되는 원칙이다. 이번 민노당의 개정안은 두 가지 기준에는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우려일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악용될 소지도 있다.
산재법은 작업장에서 일하다 다치거나 병든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이다. 이윤추구를 위해 통제되지 않는 자본의 무차별적 노동력 착취에 대해 국가가 개입하여 일정정도의 ‘노동력 유지’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1963년 군사정권에 의해 급조되었던 산재법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직업병과 폐해들의 폭로로 재인식 되었다.
또한 1988년 문송면 동지의 수은중독 인정 투쟁과 원진레이온 투쟁, 1999년의 이상관 투쟁을 거치면서 한층 고민이 성숙해왔고 근골격계 투쟁을 거치면서 반 신자유주의 투쟁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결국 투쟁의 역사 속에서 단련되어온 직업병 인정 투쟁이고 노동보건운동이다.
산재보험도 마찬가지이다. 수년간의 노동보건운동진영에서의 산재보험 개혁 투쟁은 매 시기 정세와 실천과제에 대한 판단과 전술의 운영에서 많은 차이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입장 차이의 해결은 현장의 구체적인 고통과 문제인식을 확인하고 ‘우리’의 요구로 조직해내는 지역별 연대와 공동실천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닐까?
더군다나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동자들의 정신질환을 불승인하고 병원 간호사들의 근골격계 질환에 지연 작전으로 대응하고, 민원인을 범죄인 취급해 몰래카메라를 다는 것이 지금의 근로복지공단이다. 더군다나 근골격계 인정기준 뿐만이 아니라 뇌심혈관계 인정기준을 만들고 요양처리지침을 시행하고 ‘찾아 가는 서비스’를 통해 재해 환자를 관리하려고만 하고 있다. 재해 환자를 줄여서 비용 부담은 덜고 재해 환자들을 잘 관리해 비용 부담을 줄이고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지금, 정부와 자본의 공동된 목표 아닌가?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후 이러한 과제조차 ‘당을 중심으로 한 입법 추진’이라는 방식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다. 의원실과 노동조합의 상급단체 담당자, 그리고 진보적인 전문가들이 모여서 법안을 만들고, 막상 해당 주체들은 선전의 대상이 되거나 동원의 수단으로 전락해 온 것은 아닐까?
이번 산재법 개정 투쟁은 현장의 요구를 모아내고 주체들을 세워내는 투쟁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누구나 쉽게 치료 받을 수 있고, 제대로 치료 받을 수 있는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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