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의 적’을 끊임없이 출연시키려는 전체주의적 욕망"

언론 자유, ‘자유민주주의’의 거짓 신화

2005년 7월 27일 강 교수는 인터넷 《데일리 서프라이즈》에 “맥아더는 38선 분단집행의 집달리였다!”는 긴 칼럼을 실었다.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통일전쟁”론이 아니다. “맥아더 동상허물기가 너무나 당연한 민족사적 요구이고 합리적 행보임을 피력”하는 데 있었다.

폭력은 “21세기 평화와 인권을 지향하는 탈냉전 통일시대”에 어울리지 않음을 분명히 하면서, 그는 맥아더 지지자들 “역시 합리적 논리와 근거를 내면 속에 어느 정도 갖춘 것으로 보여 지기도 한다”고 인정한다. 그가 제안한 것은 폭력적 충돌을 대신한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합리적 방법”이었다. 자신의 과감한 해석에 대해 “욕설이나 비방이 아니라 상응하는 차분한 반론을 기대”한다고 글의 서두에서 밝혔다. 이성적 토론 제안이고, 합리적 대화 요청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언론 행위에 대해 수구매체는 문맥은 둔 채 부분을 갖고 즉각 시비를 삼고 나섰다. 마치 <올미다>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 뺨때린 부분을 갖고 ‘패륜’이라고 전체를 매도한 것과 비슷하다. 방송위원회의 판단이 심의가 아닌 검열로 전락했던 것처럼, 강 교수에 대한 수구매체의 반응도 자유롭고 신념에 기초한 공론/언론에 대한 검열의 조치로 나타났다.

‘논란이 될 것’이라고 사태를 틀 짓는 기사를 이념성 강한 사설이 일제히 이어받는다. 이를 외부 ‘전문가’ 칼럼이 그럴듯하게 치장된 언어로 승인하는 동시에, 일부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한 ‘플래크(flak)’가 요란스레 “규탄 시위”를 떠벌여 실재화 시킨다. 그럼으로써 사회적 공황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스튜어트 홀(Hall)의 설명 공식, 노암 촘스키(Chomsky)의 선전모델은 이번 사례에서도 여지없이 확인된다.

사실 수구신문의 이념 공세는 강 교수 개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를 넘어서, 구체적이지 않은 매우 모호한 ‘한국의 좌파 세력’으로 확장된다. 그럼으로써 사회적 위기로 확산된다. “이런 역사인식을 가진 교수가 강 교수뿐 만은 아니다. 심지어 통일안보 정책에 관여하는 요직 가운데 강 교수와 유사한 남북관을 지닌 인사가 드물지 않다고 한다. 그런 교수, 그런 정책 담당자, 그런 교과서로 대한민국의 근간을 적잖이 흔들리고 있다”는 《문화일보》의 주장은 그 일례에 불과하다. 그들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적시하지 않은 채, 사회 이념 갈등을 부채질한다. 매카시즘 혐의가 농후하다.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도 “저들” “NL 세력”의 “지상으로의 부상”을 경고한다. “강정구 발언은 이전 상황들을 집약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제 친북세력은 당당하고 꺼릴 것이 없다는 태도다.” ‘대학교수’라는 유령의 이름을 빌려, 그는 “이 다음 단계는 보수층과 우익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고 위협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수구매체를 선도로 한 공안 조성의 시도가 ‘엑스 파일’로 인해 원하는 효과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시민들은 강 교수 사건보다는 ‘엑스 파일’로 인해 드러난 자본의 부패, 공권력의 타락, 수구매체에 대해 훨씬 공분했다. 그래서 공안정국조성 노력은 잠시 실패한다. 문제는 그렇다고 포기할 수구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눈치 보던 매체는 ‘엑스 파일’의 폭발력이 검찰과 매체, 정치권의 조직적 사보타지에 의해 불발탄으로 그치면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사실 강 교수 사건은 ‘엑스 파일’이 터지면서 상업적 경쟁으로 약간 틈이 생긴 신문들이 이념적으로 재연대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수구체제가 강력히 정비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엑스 파일’ 사건 동안 주춤했던 수구의 목소리가 새롭게 공고히 된 조․종․동․문의 사각동맹체제를 중심으로 규합한 것이다. 7월 말의 공세가 강 교수(들)을 공중의 적으로 낙인찍는 데 초점 맞추어져 있었다면, 새롭게 강화된 공세는 그(들)에 대한 공권력의 물리적 처벌에 더욱 분명하게 맞추어졌다.

9월 30일 강 교수가 민교협 토론에서 재차 자신의 신념을 밝히자 “강정구 친북발언 인내하기 힘들다”며 《문화일보》가 즉각 사설을 내놓는다. 사실 그는 7월부터 9월까지 줄곧 공개된 매체를 통해 일관된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혀 왔다. 그런데 유독 이 날의 학술적인 매체를 통해 반복된 주장에 대해 수구매체가 흥분하기 시작한다.

마치 새로운 일이 터진 것처럼 "파문”, “폭언”, “무차별 언어폭격”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중앙일보》는 “민주화 종착역은 공산화인가”라는 외부 칼럼으로, 《동아일보》는 “‘강정구 보호막 치기’ 뭘 하자는 건가”라는 사설을 통해, 그리고 《조선일보》는 “‘강 교수 사건’ 내팽개친 검찰”이라는 ‘기자수첩’을 통해 통일된 반응을 보인다. ‘조․중․동․문’의 이데올로기 동맹 관계가 진가를 발휘한다. 더욱 가관인 것은 바로 이 판에 뛰어드는, ‘전문가’라는 직함의 전문 말꾼들이다.《중앙일보》에 칼럼을 기고한 한 교수는 “이제 공산주의자들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떳떳하게 나온다는 시그널이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무덤에서 좋아 벌떡 일어날 일”이라고 단정한다. 대중을 흥분시키고, 사태를 왜곡하며,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기에 딱 알맞다. “건국 이래 한국의 반공에 눌려 지하에 머물렀던 NL 세력이 마침내 지상으로 표출하는 신호탄을 올리고 있음”이라는 앞선 김대중 칼럼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한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의 이 시대에 공산주의 선언이 나오게 되었을까…이렇게 국민은 공산화 위협에 협박당하고 있는데 야당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한마디로 9.30 강정구 발언은 대한민국과 국민에 대한 테러다. 미국이 당한 9.11 테러보다 한국인들에게 준 충격과 공포가 더 크다…우리는 대한민국만이라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공산화가 안 된 것을 천만다행으로 천우신조로 생각한다. 그런데 공산화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고, 일생의 한으로 품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있다니, 앞으로 민주화의 가면을 쓰고 민족의 이름을 팔면서 회색지대에 숨어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지상으로 속속 나올 것이다. 이들의 부상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념의 으름장, 말의 폭력이다. 공황을 조장하려는 의도가 명백한, 과거 공안정국 때에서조차 찾아보기 쉽지 못했을, 절제된 글쓰기와 한참 거리 먼 빈약한 사고다. ‘전문가’란 권력이 원하는 말을 그럴듯한 말투로 풀이해 대신 말할 수 있는 자 라는 촘스키의 정의에 따르면, 조․종․동․문은 이념의 폭력행사를 위해 준비된 전문가들이 너무나 넉넉하다.

이들의 입을 통해 “우리”와 우리를 위해하는 “그들” 사이의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너무나 음침하게 가공․재생산한다. ‘우리’를 내세워 오히려 나/우리, 즉 인․민을 구속하는 이 불가사의한 ‘우리 대 그들’의 대당 구조는 앎과 무지, 문화와 야만의 충돌로 번역됨으로써 테러 공포를 완성시킨다.

푸코는 언론자유, 자유언론이라는 말을 문제시한다. 언론자유/자유언론(free speech)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밀톤(J. Milton)이 일찌감치 설파했듯, 그리고 최근 신자유주의자들이 바턴을 이어받아 강조하듯,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사상의 공개시장(free market place of ideas)을 말하는가? 언론자유/자유언론은 시장에서 완성되는 것인가? 그는 그 말의 기원을 그리스어 ‘파레시아(parrhesia)’로 계보학적으로 추적해 들어간다.

서구 자유언론/언론자유의 기원인 파레시아는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솔직함(frankness)’, ‘진실(truth)’, ‘위험(danger)’, ‘비판(criticism)’, 그리고 ‘의무(duty)’다. 푸코에 따르면, 언론자유/자유언론이란 권력에 대해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솔직하게, 위험을 무릅쓰고 말 할 수 있는 의무에 해당한다. 권리에 앞선 의무다. 자기 목숨을 내놓고 진실이라고 믿는 바를 발언할 수 있는 지적 책무다. 그래서 자유언론/언론자유는 '두려움 없는 발언(fearless speech)'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강 교수의 행위는 정확하게 푸코가 말하는 두려움 없는 발언, 즉 자유언론/언론자유에 해당한다. 그에게 언론의 자유를 주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의 행위 자체가 이미 자유언론/언론자유인 것이다. 수구매체의 검열과 통제, 처벌과 추방의 선전․선동은 이런 원래 뜻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하고, 또 이에 대한 의도적 곡해와 억압을 목표로 한다. 요컨대 이번 사태는 자유언론/언론자유에 대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빙자한 수구매체, 수구정치세력, 수구이념체제의 폭거다.

강 교수는 자유언론인이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일리 있는 판단력을 개진하고, 그에 기초해 상대화의 공개된 대화를 수행하며, 그 결과 가능한 합리적 해석 도출에 책임질 진지한 대화자다. 학자이고 지식인이기에 앞서 언론자유/자유언론의 역능적 주체로서 시민이다. 그는 공적 영역 내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체제 내부에 거주한다. 체제에 대한 시비와 불만, 고발이 시민권 박탈과 강제추방을 뜻한다는 논리는 그야말로 유치한 비약이다. 그랬다면 촘스키와 같은 지성은 그가 고발하는 ‘테러국가’ 즉 미국에서 결코 지금처럼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강 교수는 체제 바깥에 있지 않다. 1222명의 교수들과 함께 행정수도 이전에 지지를 표시할 정도로 체제 내부 정치의 문제, 사회의 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는 기꺼이 사회적 논란에 대해 우파와 대화할 자세가 되어 있다. 이라크 파병과 관련해 그는 이동복, 지만원과 같은 우파 논객들과 기꺼이 소통코자 했다. “사회적 무관심과 정치적 냉소주의, 집단적 편견 및 이기주의 극복을 위해서는 얼굴을 마주보며 함께 토론하는 게 최상의 방법”이라는 진단이 옳다면, 그는 토론과 소통을 통해 공론의 장을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성실하고 우수한 사회구성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학자적 신념을 자발적으로 공공 매체를 통해 드러낸 사실에 비춰보자면, 수구매체의 대응방식은 명백히 과잉되어 있다. 공론의 규칙에서 한참 어긋나 있다. 무리(無理)한 억지다.

금기를 의도적으로 몸과 의식으로 위반함으로써 자유 개념의 의미와 현실 자유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확인․실험하는 지적 상상력 없이 체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강 교수는 분명 체제의 진화에 생산적으로 기여하는, 양심 있는 학자이자 양식 있는 지식인이다. 또한 공론의 장에서, 공개된 방식으로, 자신의 사상과 소신을 두려움 없이 개진한 강 교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민사회의 정상적인 멤버임에 틀림없다.

그가 평소 신념을 말로써 드러냈다는, 즉 언론 행위를 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테러리스트로 고발되고, ‘비국민’으로 훈육․추방되는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개인의 자유언론/언론자유 의지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신체 구속을 요구하는 공포(terrorizing)의 목소리에 의해 압살되는 비극적 사태의 원인은 무엇인가?

강 교수(들)가 문제는 아니다. 두려움 없이 말하는 이(들)를 집요하게 추적해 고발하고 처벌하며 거세함으로써 ‘안전’을 도모하는 체제의 집착증이 문제다. 우리를 ‘국민’으로 동원하기 위해 ‘공중의 적’을 끊임없이 출연시켜야 하는 전체주의적 욕망의 문제다. 차이 나는 의견의 두려움 없는 표현, 즉 역능적 언론의 출현을 공포로 느끼는 권력의 자기 방어적 본능이 문제다. 이번 사태를 통해 분명히 각성할 것이 있다. 언론자유/자유언론을 허락코자 않을 체제의, 수구매체의 결기는 여전히 공고하다는 사실을. 바로 나/그/우리가 언제든지 그 희생자가 될 수 있음을. 내가 강 정구임을.

한나라당 대표가 수구매체의 동원령에 ‘구국의 결단’이니 하는 구호로 화답하고 나섰다. 사상과 학문, 언론의 자유를 일소하기 위한 파시즘 운동이다. 차이와 다양성의 규율을 위한 ‘국민총동원체제’의 선동이다. 만약 냉전 회귀를 부르짖는 이런 광폭한 수구매체, 수구정치세력이 없다면, 한국사회 우리는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강 교수가 했던 바로 그 ‘반사실적 실험’의 방법을 우리 모두 한번 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 역사적, 사회적 상상력을 품은 우리도 과연 불량시민인가? ‘테러리스트’인가? 추방될 ‘비국민’인가?
덧붙이는 말

전규찬 님은 영상원 방송영상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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