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식] 한노정연

"황우석과 억압적 대학원 문화가 만나 곪아터진 것"

저항 주체를 중심으로 난자매매, 대리모 문제를 바라보자

한 차례 황우석 교수의 과학 파노라마가 노랗게 지나간 자리에, 언론은 황 교수가 ‘자발적 기증’을 받았다는 난자 이야기로 다시 물들이고 있다. 배아 줄기 세포 연구에 사용된 난자들 중 상당수는 '자발적 기증'이라는 황 교수의 주장은 사실과 달랐다. 그의 연구에 사용된 난자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매매한 난자였고 심지어 같은 팀 연구원의 난자까지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23일에는 한 국회의원에 의해 우리나라에 만연된 난자매매 사례들이 발표되었다. 국내 유명 포털사이트 2곳에 개설된 7곳의 카페에서 난자 매매 의뢰 152건, 구입 의뢰 26건 등 179건이 올라와 있다고 한다. 역시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이번 발표에서는 난자 매매뿐 아니라 과거 씨받이를 연상케 하는 대리모 문제도 밝혀졌다.

현재 난자를 거래하거나 대리모를 구하는 국내 인터넷 사이트는 10여 곳에 달한다고 한다. 한 사이트 당 회원이 2000∼3000명인 것을 감안하면 거래 희망자 수가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문제가 되고 있는 난자매매와 대리모는 주로 불임부부를 위한 인공수정(IUI, 체내 수정)이나 체외수정(IVF-ET)에 이용된다. 그리고 그 일부가 황우석 교수의 배아 복제 연구에 사용되었다.

난자매매와 대리모

한국의 경우 난자 매매는 현행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에서 금지하고 있지만 금전 거래가 아닌 난자기증은 허용하고 있다. 영국도 불임 환자가 난자 제공 여성을 스스로 데려오는 것이 가능하다. 단 ‘인간 수정 및 발생 기구(HFEA)’에 등록을 해야 한다.

HFEA는 최근 자문을 하면서 정자 기증은 한 번에 50파운드, 난자는 최고 1천 파운드 정도를 적정 보상비로 제안했다. 미국의 경우도 난자를 제공한 여성에게 돈을 주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통상 난자 수혜자가 제공자에게 2500달러에서 1만5000달러를 지급한다. 난자 제공자를 신문 광고 등을 통해 모집할 수도 있다. 스웨덴, 뉴질랜드 등에서도 난자 제공자를 공식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대리모의 경우 영국, 이스라엘 등 10여 개국에서는 관련 법안은 없지만 대리모계약을 인정하고 있다. 캐나다의 경우는 한걸음 더나가 대리모를 공식적으로 등록시켜 정부가 대리모에게 일정액의 보조금을 지급해주는 방안을 검토(2001년)한 바 있다. 미국에서는 불임치료 센터에서 불임 부부와 대리모의 임신, 출산 계약을 중개해 주어 상업적으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영국의 경우, 영리적인 목적의 대리모 계약과 광고를 금지하고 있다. 한국도 관련 법안이 없지만 대리모 출산 건수는 불임전문병원별로 한해 10여건. 전국적으로 약 100여건이 이뤄지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001년).

이렇듯 이번 사건은 이미 난자매매와 대리모 문제는 보편화되고 있는 와중에 황우석이라는 스타 과학자와 한국의 억압적 대학원 문화를 통해 곪아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종교적 보수 우파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논쟁의 주체가 되어야할 여성(노동자)을 배제하고 배아를 주체 설정한다. 그리고 수백만 이라크 민중을 살생하는 파병에 동의하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배아의 인권에 열을 올린다. 그 뿐이 아니다. 그러한 논쟁을 통해 인공수정을 포함한 임신-출산 기술(reproductive technology) 모두를 부정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과거 70-80년대 여성운동에 패배한 낙태의 권리까지 다시 문제제기를 시도하고 있다.

대리모와 임신 - 출산 기술 그리고 여성운동

70년대 초 여성운동은 성(sexuality)과 임신-출산에 대한 자치권과 통제권을 정치적으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당시 주요한 이슈는 안전한 피임과 낙태에 대한 권리에 대한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80년대를 거쳐 오면서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선택할 권리"로 압축된다.

초기 많은 여성운동가들은 새로운 인공수정을 비롯한 임신-출산(reproductive technology) 기술이 낙태 기술처럼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에게 더 큰 선택권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들은 여성이 임신, 출산 수유라는 생물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녀양육을 맡게 되었고 그래서 생존을 위해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대리모와 임신-출산 기술은 여성의 몸 밖에서 임신과 출산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불평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독신 여성을 비롯하여 레즈비언과 게이들과 같은 성적소수자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갖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현실과 달랐다. 새로운 임신-출산 기술은 여성의 출산 능력을 대상화하고 남자의 유전자를 계승시키려는 욕망에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출산으로부터의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혼한 남자가 유전적 자손을 얻게 하는데 더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일반 의사들은 독신 여성이거나 레즈비언, 생활 보호 대상자 및 기타 좋은 부모로 판단되지 않을 때는 이 시술을 거부했다. 법원에서도 정상적이라 생각되지 않는 부모의 경우 이러한 시술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이를 위해 아버지 역할을 할 사람이 없을 때, 예를 들어 레즈비언이나 독신 여성의 경우, 아버지의 권리는 정자 기증자에게 주어진다.

대리모 역시 자신의 유전자를 아이에게 주려는 남성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일반적으로 아내가 불임일 때 대리모에 의존하는데, 이 경우 아버지와 아이들 간의 생물학적 관계는 높아지지만 상대적으로 어머니의 경우 가치가 줄어들게 된다.

이와 같이 새로운 임신-출산 기술은 여성이 임신과 출산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를 출산하고 기르는 것을 모든 여성들만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강제하고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여성들에게 임신과 출산을 할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더욱이 여성의 신체는 새롭고 증명되지 않은 기술에 대해 실험대상이 되기도 한다.

반-기술주의적 입장

이러한 반-기술주의적 주장은 모두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에서만 본다면 임신, 출산 낙태의 문제에 대해 자연적인 것이 좋은 것으로 보는, 다시 말해 여성이 자기 몸에 대한 자치권과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게 되는 결과를 초례할 수 있다.

전형적인 맑스주의 입장도 이와 유사한데, 단순히 임신과 출산을 여성의 영역이라고 가정함으로써 가족 내에 노동 분업에 대해선 본질적으로 비-착취적인 것이며 자연적인 것이라고 선험적으로 가정해 버린다.

이렇게 임신, 출산 등의 생식기술과 대리모가 모든 여성들에게 억압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 연관된 권력관계를 너무 단선적으로 보는 것이며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저항적 의미를 보지 못할 수가 있다. 또 자신의 딸을 위해 손녀를 낳아 주는 할머니의 사례나 이타적으로 난자를 기증하거나 대리모로 자청하는 사례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자본주의, 상품화가 진행됨에 따라 새로운 저항 주체도 발생한다

임신-출산 기술을 둘러싼 정치에는 분명 특별한 무엇인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새로운 임신-출산 기술로 아이를 낳기 위해서 5명의 사람이 필요하다. 정자와 난자를 생산해서 기증할 사람과 대리모 그리고 태어난 아이를 키워줄 사람이 있다. 이 경우 진짜 부모는 누구일까?

보통의 경우 아이를 키워줄 사회적 부모, 즉 임신-출산 기술을 소비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소비자가 있다는 말은 생산자가 있다는 말을 의미한다. 생산자는 곧 노동하는 노동자를 뜻한다. 난자 매매에서 여성은 난자라는 몸의 일부를 상품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하고 대리모는 태아에서 출생까지 아이가 살아갈 환경과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한 노동을 한다.

이와 같이 화폐를 위해 여성은 대리모 노동을 판매하고 자신의 몸속에 생산된 난자를 상품화한다. 이러한 노동을 집장촌의 성노동자와 비교되는데 성 노동은 비생산적인 성을 상품화 하는데 비해 임신-출산과정의 노동은 기술을 통해 생산물을 상품화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성노동자 운동이 있듯이 대리모 노동자운동, 난자 생산 노동자 운동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영향은 자연적인 영역과 생산적인 영역,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사이의 만리장성을 무너뜨린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적 경향을 통해서 여성이 이익을 볼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른 임금 노동과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를 착취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저항의 주체인 노동자의 입장에 설 때만, 배아나 태아의 생명존중을 내세우면서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적 우파진영이나 그 모든 기술에 유토피아적 전망을 제시하는 친 시장주의자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난자 매매에 대한 과배란 처방의 위험성을 정확하게 고발하고, 음성적으로 거래되어 착취당하는 대리모/난자매매 문제 그리고 임신-출산 기술에 배여 있는 우생학적(優生學的) 이데올로기 등 다양한 자본주의 문제에 대해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 논란 속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가정에서 임금을 지불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임신-출산 ‘노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일 것이다.
덧붙이는 말

김영식 님은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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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하

    참세상 짜증난다. 차라리 참세상이라고 하지말고 "여성세상"이라고 이름을 바꿔라. KIN!

  • 지나가며

    여성활동가들은 빈곤을 이유로 하는 여성들의 난자 혹은 성매매에 대하여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선전과 교육을 하는 활동을 하여야 한다. 다른 선택의 여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들도 있을 것이겠지만-- 성상품화 사회에 그대로 부합해나가는 (여성들의)선택이 증가할수록 여성을 (수태기능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성매매 도구로 사용하여 이익을 보는 자본가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확산되어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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