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지만, ‘총궐기’의 깃발은 올랐다. ‘지금 그렇다면 과연 우린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실존의 절박함이 도저히 성사될 가망성이 없으리라는 불가능의 예측들은 압도했다.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가슴이 말할 때 이성이 반박의 목청을 높이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 짓”이다. 학습된 무기력에 넋을 잃고 실패를 예견하는 싸늘한 비아냥을 견디며 많은 이들이 총궐기를 외쳤던 단 하나의 이유는 반드시 총궐기를 해야했기 때문, 그 뿐이었다. 마주하기가 괴로워 차라리 피하고 싶은 착취와 억압이 당연시되는 체제에서 하루밤새 수천만 원이 출렁이는 아파트값 중계 리그의 관객이 되어 동경과 적대의 울분을 질겅거려야 하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체제의 모순과 사회의 부조리와 직접 맞서는 총궐기뿐이다.
그렇다. 총궐기는 인식의 틀을 바꾸면 상황을 재전유할 수 있다는 획기적 전환을 약속했다. 총궐기라는 호명에는 수년째 누적되고 있는 운동의 총제적 열세를 일거에 만회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담겨져 있었다. 이 희망은 수신자가 응답할 수밖에 없는 ‘진짜’ 투쟁을 원하는 갈망들이 분출될 때가 됐다는 낙관과 맞물리면서 총궐기를 올 한해 모든 투쟁의 요구들이 집결되는 위상의 시․공간으로 공유하였다. 그것은 상상이었지만 망상은 아니었으며, 과장됐더라도 정당한 꿈이었다. 민주주의의 제도화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짬자미를 이루며 형식으로서의 투쟁을 반민주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내용으로서의 투쟁을 시대 변화에 반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동안 정말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총궐기는 사실상 전면 해체되었던 투쟁의 정치력을 복원하자는 것이었다.
올 한해 급격화된 노무현 정권의 총체적 반민중성은 총궐기적 상상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총궐기의 현실적 추진을 가능케 한 작용/반작용이었다. 노무현 정권이 사활을 걸고 있는 노동 유연화와 자유무역 정책은 현 단계 금융 세계화 지배 논리의 토대와 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저지해야 민중이 살 수 있다는 생존권적 요구가 11월 22일이라는 구체적 수치로 환원하면서 총궐기의 꿈은 내․외부적으로 완결된 논리적 구조를 갖춘 현실태로 순환/예고되었던 것이다.
현실로서의 총궐기 혹은 총궐기를 재구성했던 논리
그러나 막상 총궐기 일자가 다가오자 오래 전부터 예고됐던 위기들이 또다시 과장되기 시작했다. 구체적 상황들은 필요에 따라 적절히 왜곡․변형되었다. 그러나 조직화 문제를 제외한다면 위기의 실체는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집회․시위를 둘러싼 일련의 흐름들이 총궐기에 대해 극단적 적대의 태도를 보이며 총궐기를 사냥감을 노리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그렇잖아도 농민의 부재와 취약한 지역 조직화 경험 등으로 부족하기 짝이 없는 중앙 대회로서의 서울 대회의 성사를 갉아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세상이 변했다”는 명쾌하고 강력한 한 마디로 요약되는 현실에서 총궐기의 꿈이 순탄하게 구현될 것이라고 내다봤던 이는 지난 22일 집회에 참여했던 사람 가운데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색깔론에서 폭력론으로 다시 시민불편론으로 옷을 갈아입은 저들의 공세는 강력하고 현란해보이지만, 아주 초보적이고 단순한 논리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미 수차례 반복된 낡은 논리였다. 열악한 조건과 광범위한 무기력을 딛고 그날 2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서울 광장을 메웠다.
그러나 문제는 조직화도 색깔론도 폭력론도 시민불편론도 아니었다. 진정한 위기는 내부에 있었다. 문제는 총궐기에 대한 대중적 열망을 기만하기로 작심한 듯한 일부 집행부의 행태였다. 총궐기 집행부는 자신들의 헤게모니에 충실하기 위해 현실을 확대 발췌해 총궐기의 본질을 은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술수만 부렸다.
경찰이 집회를 불허하고 언론이 이에 적극 호응할 때부터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저들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이미 결정난 상태였다. 1년 내내 외쳤던 총궐기는 다름 아니라 그것들과의 정면 대결을 하자는 것이었다. 애시 당초 경찰의 집회 불허 방침에 맞서는 총궐기의 선택은 방패, 곤봉, 버스벽으로 지켜지는 가짜 민주주의에 불복종하고 진짜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광장에 서겠다는 당당한 선언과 분명한 행동을 약속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야만이 시민에게서 외면받는 폭력집회와 같은 악의적 여론 선동에 발목을 잡히지 않은 채 정권을 정면으로 치받을 수 있는 명분을 만들 수 있었고, 허접때기와 같은 ‘교통불편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총궐기의 본질적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궐기 집행부는 모든 선의의 가능성을 제쳐두고 타협을 통한 안정적 집회를 선택했고 집회 내내 위축된 자세로 일관했다. 그것은 결국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어버린 채 총궐기의 본질적 의미를 스스로 뒤집어 총궐기 자체를 혼란된 모순으로 밀어 넣었다. 22일 총궐기 이후 아귀처럼 집회의 폭력성만이 부각되고 있는 것은 시작 전부터 총궐기에 대한 의지를 상실했던 집행부의 안일함이 빚어낸 인재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일부 집행부가 처음부터 지킬 수 없었던 경찰과의 약속이 별것 아니라는 그럴싸한 환상을 위해 동지들과 거짓 논의를 하고 대회를 성사시킨 자체가 성과이자 능력이라는 태도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부 집행부는 상투적이고 관성적인 집회가 아님을 인지하고 비상한 각오로 총궐기에 참가했던 대중들을 향해 끊임없이 질서를 지키라고 훈계하는 가관을 연출하며 순식간에 총궐기에 참여한 동지들을 경찰의 지시에 따라 발걸음을 제약당하는 마리오네트(marionette, 마디마디를 실로 묶어 사람이 위에서 조정하여 연출하는 인형)로 만들어버렸다. 운동의 자세가 아닌 흥정의 도모를 위해 패를 돌리는 거간꾼이 되어버린 일부 집행부의 기만을 더 이상 방관한다면 앞으로 이어질 총궐기 국면에도 전망은 없다.
현실의 논리를 극복하는 ‘배반’을 실천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내내 불가능을 상상하라며 투쟁을 자극하던 총궐기의 깃발은 올랐다. 참을 수 없는 비겁함으로 점철된 서울 총궐기였지만,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전국적 상황은 달랐다고 전해진다. 경찰은 긴급 화상회의라는 선정적 방법을 과시하며 향후 범국본 주최 집회의 전면 불허 입장을 밝혔고, 정권은 총궐기를 향해 불법․폭력 시위라는 익숙한 수사를 강조하는 담화문을 통해 이른바 ‘무관용(Zero Tolerance) 원칙’을 천명한 상황이다. 총궐기의 본질을 외면한 채 ‘폭력/비폭력’의 틀걸이로 몰아넣어 ‘불법/합법’의 판가름을 지으려 하는 저들의 징그러운 낙인을 당당히 거부해야 한다. 과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구조적 폭력’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물어야 한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여전히 총궐기를 해야 한다. 총궐기를 옭아매는 현실의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투쟁에 대한 어떠한 상상도 불온해하고 금기시하는 오래된 습관을 털어내는 것이다. 운동은 존재하지만 투쟁은 부재했기에 변해버린 세상에 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투쟁의 부재와 관련하여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대상과 범위의 한계는 언제나 나 자신뿐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의식은 있는데 몸은 따라가지 않는’ 개탄스런 상황을 털어내야 한다. 그 개탄의 틈새에서 기생하는 비겁함이 총궐기의 유일한 위기요인이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폭력 집회가 아니다. 시민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정권의 반민중성에 맞서는 대규모 불복종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생존권 살해 기도를 폭로하여 숨쉬고 살자는 것이다. ‘배반’을 실천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밀란 쿤데라를 인용하자면, “배반이란 대열에서 이탈하여 미지의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겐 아직 ‘배반’의 기회가 남아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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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군 님은 문화연대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