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오히려 모두에게 ‘복장단속 집시법’은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모두라 함은 집회란 불편하거나 폭력적이거나 불법이라고 생각하는 국가 공권력, 보수 언론뿐만 아니라 집회, 시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빼앗기면 큰일 날 당사자인 (안타깝게도) 집회, 시위를 싫어하는 국민 다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모두’에 속하지 않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수호하고자 하는 그 나머지 ‘모두’는 함께 ‘복장단속 집시법’이 침해하고 있는 집회, 시위 자유에 대해 위헌적이고 반인권적인 집시법에 대해 전면적으로 새롭게 이야기해야 한다.
복장단속 집시법의 모호함과 위험성
논란을 불러일으킨 ‘복장단속 집시법’을 들여다보자. 법안은 ‘신분확인을 어렵도록 위장하거나 신분확인을 방해하는 기물을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발의 의원들은 ‘신분확인을 어렵도록 위장하는 기물’ 범위의 명확한 기준까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도 그 기준을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사나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목도리를 두르는 것, 침묵시위를 위해 X자가 그려진 마스크를 쓰는 것은 신분 위장을 위한 것일까.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는 것, 햇빛을 피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는 것도 위장이라고 할 수 있는가. 집회시위의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에 페이스페인팅을 하는 것은 어떤가. 그리고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되는 집단의 경우, 동성애자나 성매매 여성들이 집회 시위를 하려면 경찰과 언론 앞에 맨얼굴을 드러내야만 한다는 말인가. 신분위장을 위한 기물의 범위는 정할 수 없을 만큼 포괄적이고, 정해진다 치더라도 경찰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인권침해의 소지는 다분하다. 이 법을 집행하는 것은 독재시대의 두발단속이나 미니스커트 단속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법안을 제기한 의원들과 동의하는 사람들의 기본 전제에 있다.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범죄자라는 인식이 없고서야 어떻게 이런 법안이 발의되고 동의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미 집시법은 시내 주요도로에서의 집회 금지, 소음 규제, 신고제라고는 하지만 실제 허가제로 볼 수밖에 없는 법 운영을 통해 집회시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하지만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집시법에 대한 논의는 온데간데없고, 온통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집회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끝날 것 같지 않은 규제대책만 쏟아지고 있다.
평화시위 정착을 위한 민관합동위원회의 대책
서울시의 연등축제로 인해 지하철이 미어지고, 교통이 정체되어도 언론은 모질게 대응하지 않는다. 심지어 시위 진압과정에서 농민과 노동자가 사망해도 별반 관심이 없다. 오히려 한미FTA, 평택미군기지, 비정규직 법안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현안들에 대한 갈등이 있어도 언론은 이에 대한 분석이나 입장 전달보다는 어느 도로에서 차가 막히고, 어떤 도청이 시위대에 의해 불에 탔는가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집회, 시위, 데모가 당 시대의 기득권들에게 환영받은 적은 물론 없지만 요즘 흘러가는 모양새는 심각해도 너무 심각하다. 폭력시위라고 불리는 집회의 사진과 영상은 끊임없이 리와인드되고, 이렇게 부정적으로 각인된 이미지는 집회, 시위 자체를 범죄와 동일시하는 연상 작용을 만든다. 하지만 언론만 문제인가.
2005년 전용철 농민 사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던 경찰청장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다. 퇴임식에서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식의 발언을 한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향 어디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앞두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사망 사건 이후, 경찰은 곧이어 ‘집회, 시위의 자유 보장을 위한 대책’이 아닌 ‘평화시위 정착을 위한 민관합동위원회’를 구성했다. 평화시위가 안돼서 농민 둘이 경찰에 의해서 죽었다는 논리를 현실화 시킨 것이다. 그 민관합동위원회가 지난 12월말 내 놓은 대책안은 심각하다. 시위발생 예방, 현장 대응, 사후 관리 평가 분야, 기타 보완 개선 분야 등 4개의 분야에서 32개의 대책을 내놓았다. 많은 부분이 집회, 시위 자유 축소와 그에 따른 인권침해 내용들을 담고 있다. ‘시위 쟁점에 대한 사전 적극 대응, 집회 시위 보도관련 언론과의 협조 강화, 폭력 시위자 개인 차단방안 강구(자료 구축), 주동자 등에 대한 형벌 상향조정, 민사상 배상 청구’ 등의 내용이다. 시위 현장 대응에 대한 ‘시위현장 위해 물건 반입 등 금지 제도화’가 ‘복장단속 집시법’으로 구체화되었다. 앞으로 무엇이 더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집회, 시위 자유가 침해받는 상황이 민관합동위 이후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집회시위의 자유는 집시법 자체에 갇혀있다. 헌법에 보장된 집회시위의 자유는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행정적 절차의 절차적 하자에 대해 과태료를 부과하는 방식이 아닌, 2년 이하의 징역 등으로 형사 처벌토록 하고 있다. 집회시위의 과정에서 별다른 위법행위가 없다 하더라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형사 처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미신고 집회, 시위에 대해서 관할 경찰서장은 즉각 해산을 명할 수 있다. 신고제를 채용하되, 그 신고의 성격을 경찰서장의 재량에 달린 허가제의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집시법은 집회, 시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집회시위 금지법으로 전용하게끔 한 것이다.(월간 사람 19호 ‘집시법 그 폐지를 향하여’ 참조) 집시법을 지키면, 사회적 협약을 체결하면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경찰의 발언은 처음부터 거짓말이다.
1987년 민주항쟁은 폴리스라인 안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온 폭도들이 다치고 투옥되고 죽어가며 얻은 민주주의다. 박종철의 생명을 댓가로 얻은 핏빛 민주주의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민주주의의 수혜로 권력이 된 이들은 지금의 집회를 폭력이고 불법이라 규정하고, 거리에서 경찰의 방패와 곤봉 아래 살인을 저지르고 또는 방관하고 있다.
집회, 시위의 자유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민중들의 저항권이며 행정적 절차나 교통불편의 수식어를 달고 제한될 수 없는 불가침의 인권이다. 국가가 나서서 관용할 수 있다, 없다 말해서는 안돼는, 권리를 박탈당하고 소외된 소수자, 민중이 가진 능동적이고 정치적인 권리에 속한다. 그래서 집회 시위는 국가정책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가 권력은 자신을 반대하는 그 의견을 경청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국가와 민중의 관계이며, 집회시위의 본질이다.
재갈물린 민주주의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위험한 지경에 이른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해, 대응주체들인 노동자, 농민, 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이것을 쟁점화 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권단체들이 몇 번의 기자회견과 인권침해 사례들에 대한 진상보고대회를 가졌지만 집시법의 위헌성과 반인권성에 대한 쟁점을 만들지는 못했다. 집시법 연석회의는 커다란 사건이 있을 당시만 도구적으로 가동될 뿐 정국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복장단속 집시법과 같은 어이없는 법안조차 막을 수 없다. 공권력은 한쪽 날개로는 생존권을 포함한 공적 권리 전반을 침해하고, 다른 날개로는 자유권적 기본권인 집회, 시위의 자유마저 침해하고 있다. 저들은 파죽지세로 공격의 고삐를 쥐고 있는데, 정작 피해 당사자인 사람들은 별다른 대응 없이 죽을 날만을 받아놓고 있는 모양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복장단속 집시법에 대한 대응은 우리 사회에 집시법 재검토의 논쟁을 만들 수 있는 계기이자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지난 시절의 불복종은 단순한 불복종이 아니었다. 일상적인 단어나 선언으로서의 민주주의 투쟁도 아니었다. 생존과도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에 대한 권리 투쟁이었다. 적당히 하다가는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이를 악물고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살기위해서 집시법을 재검토해야하고, 집회시위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 재갈물린 민주주의는 우리의 것이 결코 아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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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님은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