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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

[완군의 토마토던지기]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에 들어선 당신에게

*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환멸은 여의도에서부터 전국 방방곡곡 시장통까지 뒹그는 보편적 정서입니다. 어쩌면 노무현 대통령의 유일한 동력은 이 ‘증오의 관심’ 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이제는 정치적 선명함조차 희미해진 당위와 상식으로서의 ‘노무현 퇴진’‘ 구호를 한 번 더 외치는데 시간을 쪼개는 것이 바쁜 활동에서 적절한 선택인가 하는 회의감이 계속 밀려옵니다. 존칭은 생략합니다.

뉴스를 검색해보니, 미국과 FTA를 체결하자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92년 9월 21일자 한국일보 사설인 듯 싶네요.. 벌써 15년 전, 그러니까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 공표된 직후였습니다. 그러나 안쓰럽게도 당시 사설의 내용을 볼 때, 자유무역에 대한 주류 경제전문가들의 인식은 인상적 수준에서 헤매고 있음이 분명해보입니다. 사설에서 강조되는 것은 북미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우리의 가장 큰 시장인 미국 시장의 환경 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워졌다는 조바심뿐이며, 이를 상쇄하기 위해 등장한 논리의 수준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경제블록화를 통한 소지역주의의 확산이 세계적 추세라는 것 외엔 없습니다. 평면적 근거가 입체적으로 과장되어 구체적 손해를 은폐하는 논법이란 점에서 지금과 별반 다르진 않습니다.

그리고 93년 취임한 김영삼은 같은 해 5월 24일 서울에서 열린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총회에서 「태평양 시대의 한국의 신외교」란 제목의 기조연설을 통해 너무나도 유명한 “세계화” 노선을 천명했습니다. ‘세계화, 다변화, 다원화, 지역협력, 미래지향’의 기치를 내걸고 “개혁을 통해 세계화를 선도”해 나가리라는 김영삼의 무모함이 93년 12월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와 96년 12월 OECD가입에서 정점에 이르고 그 결과는 잘 아시다시피, 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함께 찾아온 IMF 사태라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한미FTA 타결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하다 비로소 ‘잃어버린 10년’이 마감되고 ‘죽음의 10년’의 도래가 눈앞에 있음에 소름이 끼칩니다. 벌써 죽음들은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어느 노동자의 절규가 화염에 휩싸인채 신음하고 있고, 분을 삭이는 최소한의 방법조차 찾을 수 없는 농민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이 죽음들이 필연적으로 찾아올 거대한 죽음의 징후는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내가 체험해야 할 시대의 고통에 관하여 말해야 하는 일은 이토록 두려운 일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이 매혹당했다던 시를 알게 된 때가 떠오릅니다. 그때 저는 영화평론가의 꿈을 막 접으려던 평범한 백수였습니다. 문학사상사에서 2002년 11월 출간한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 6권 기억나십니까?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치.경제.법조계 총 32명의 저자가 자신의 애송시를 뽑고 해설을 붙였는데, 그 중에는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당신을 매혹시킨 한 편의 시는 당시로서는 꽤 충격적이었는데,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이야 시대를 살아 건너오지 못한 '김지하'라는 기표의 진부함과 이에 기대려는 당신의 얄팍함에 동시다발적 냉소가 나오지만, 시혜를 베풀어 한 번 더 읽어봤습니다. 당신은 그 시를 일컬어 ‘내 가슴을 대변해준 진실한 영혼의 울림’이자 ‘저 푸른 자유의 추억’이라고 표현했었습니다. 당신은 이 시를 읽으며 ‘눈물도 참 많이 흘렸고, 때론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고 적었습니다. 가소롭지만 당신은 ‘80년대’를 또 ‘민주주의’를 그렇게 기억하는 척 했습니다.

물론, 당시가 당신에게는 ‘대선’이라는 절체절명의 인생의 전환점에서 아주 특별한 부분을 강조해야하는 수학적 판단만으로 존재를 유지하던 시기였고 따라서 합리화할 수 있는 거짓말이었겠지만, 격렬한 시대에서 도망쳐 부끄럽게도 강고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매 맞고 쓰러지고 또 숨죽여 도망 다니면서도 꿈을 잃지 않았던 정의의 사람들의 편’이었고 그들과 ‘함께한 것을 여전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로 읽혔습니다. 물론, 지금 와서 자세히 읽어보니 이런 전제를 달긴 했습니다. ‘이젠 민주주의란 애기를 하면 궁색해 보이기까지 하는 시절’이라고, 따라서 ‘새로운 가치들을 함께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른 이들이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결의를 위장하는 가식의 표정으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나락으로 처박는 결정을 ‘결단’이라고 선전할 수 있게 된 막강한 힘을 소유할 수 있었던 마법은 두 가지입니다. ‘고용안정쟁취’가 선명했던 머리띠와 존 레논의 사이로 노무현의 눈물 한 방울이 대한민국을 바꾼다는 카피가 떠오르는 <노무현의 눈물> CF와 ‘반미’면 어떠냐며 거침없는 하이킥을 구사했던 당신의 질펀한 입담이 바로 그것입니다.

역시 당신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 두개의 이미지는 복합적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격렬한 이념적 구호를 낭만적 믿음으로 형질전환하여 당신에 대한 열광적 지지로 표출되었습니다. 낮은 수준의 전선이었고,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전선이었지만 또한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당신이 만든 ‘이념’의 국면이었고 새로운 ‘정치’의 상황이었습니다. 당신과 이회창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다는 외침들은 묻혀졌고, 진보정치의 꿈은 유예되었고 가장 급진적인 행동은 실패했습니다. 여기에 당신의 근거와 한계 그리고 져야할 책임의 몫이 있습니다.

단단히 착각하던데, 당신은 처음부터 이른바 ‘진보’에게 진 빚도 소위 ‘진보’와 함께 할 역사적 책임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신이 져야하는 책임은 진보 세력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당신이 만들었던 낮은 수준의 그러나 최소한이라는 대중적 믿음에 기반했던 확고한 전선을 유실한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한미FTA 타결은 그 전선을 송두리째 유실한 무능력을 넘어 아예 배반했기에 당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역린’이 될 것입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당신에 대한 선택은 또한 패배의 상처를 두려워하는 개별적 존재들의 당연한 ‘이념’적 선택이었고, 민중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선한 의지의 ‘정치’적 작동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민중은 ‘생성적인 동시에 소모적이며, 진보적인 동시에 수구적’인 비균질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것을 악용하여 권력에 오른 것은 당신입니다. 따라서 당신은 이제 당신이 사용했던 ‘상징’에 처참하게 농락당한 민중의 돌멩이를 피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얕은 지식이지만 현상으로서의 당신과 실체로서의 당신을 보며, 심리학의 ‘상징적 놀이’라는 것이 떠오릅니다. 자기 자신의 동작이나 주위의 대상을, 그것과는 다른 사물과 대상이나 대상의 상징으로 가정하고 하는 놀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주로 유아기 때 많이 하는 놀이인데, 예를 들면 자기를 죽은 오리라고 생각하고 방바닥에 누워 죽은 시늉을 하거나, 인형을 강아지로 가정하여 말을 걸거나 하는 식입니다. 한때 현상으로까지 군림했던 당신이니 만큼 이를 설명하는 방법도 숱하겠지만, 대개가 과분하단 느낌입니다.

이제 당신을 설명하는 데는 한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국민 모두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린 ‘모두’가 당신의 ‘상징적 놀이’에 낚였던 것 입니다. 앞서 밝힌 바, 당신이 ‘교조적 진보’라고 칭했던 사람들 중엔 나 역시 그렇지만, ‘모두’라는 범위에 수긍하지 않을 사람이 더 많긴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수긍하지 않았던 사람이 그토록 많았음에도 당신의 ‘낚시’를 끝내 막아내지는 못했고 조속히 폭로하지 못했다는 점일 겁니다. 당신이 온 국민을 ‘정치’와 ‘이념’의 경기장으로 끌고 들어갈 때, 권력을 잡더니 뜬금없이 헛짓거리만 할 때도 우리는 세상에 별다른 기갈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지향성’은 당신의 ‘대중성’앞에 무기력했습니다. 당신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자’라는 썰렁한 커밍아웃으로 경기장을 냉소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좀 더 오래 경기를 주도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치’와 ‘이념’을 버렸다던 당신은 한 번도 그 자리를 버린 적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났고, 국민이 그 자리를 착각했던 것 뿐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열심히 속여왔는데 끝내 그 자리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한미FTA 타결 이후 당신의 지지도가 오르고 당신을 그토록 증오하던 모든 이들이 당신에게 열광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를 유불리를 떠나 할 일은 하고 할 말은 하면 상식과 원칙을 지닌 국민이 따라오는 것이라는 의도된 착각으로 또 다시 레토릭을 장악하려 하는 듯 합니다만 저열한 계산이라는 것 스스로도 잘 알거라 믿습니다. 더 이상 당신의 상징적 놀이에 농락당할 국민들을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함성 앞에 홀로 선 외로운 골키퍼입니다. 당신은 유니폼을 거꾸로 입고 맨 앞줄에서 경기를 시작했지만 원래 계획대로 든든한 지원군을 배신하고 믿을만한 동료들을 사살하고 이제 홀로 골대 앞에 서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벌써 100골 정도 먹은 듯 합니다. 함성이 들린다구요? 들려오는 함성을 세세히 들어보십시요. 순간의 환청이 걷히면 그것은 당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야유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초조하지요? 어떻게 잡은 권력인데 누릴 시간은 자꾸만 줄어갑니다. 양의 탈을 벗는데 너무 오래 걸렸고 무거운 옷을 벗어던지니 이제 채 1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시간의 계획도 이미 갖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잘 버티시면 아마 절반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잘 아실테지만, 민중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한미FTA는 결코 권력의 결핍을 채워주지 못할 것입니다. 정략적인 개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나서는 자리에는 늘 상상하기 어려운 새로운 국면이 열리기 마련입니다. 타는 목마름을 위장하여 동아줄을 잡았는데 따라와보니 당신은 이미 차마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에 들어섰습니다. 당신과 가장 먼 거리에서 대치하는 듯 보였던 어느 언론의 표현을 빌자면 당신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불굴의 영웅입니다.

때리고 쓰러뜨리고 숨죽이게 도망다니게 만들었지만, 곤봉과 방패로 때려죽이고 전경버스로 막는 길을 뚫으며 왔지만 왠지 적막하지 않으십니까? 고개를 들어 위를 보십시요. 당신이 들어선 그 협곡의 골짜기마다 당신이 배반했던 사살했던 국민들이 당신을 노려보며 짱돌을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국민들은 ‘매 맞고 쓰러지고 또 숨죽여 도망 다니면서도 꿈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총합을 일컫는 말입니다. 고개를 들 자신이 없다면 곁눈질이라도 한번 해보시길 권합니다. 국민이 대통령이라던 당신의 참여정부가 지금 어느 지경에 서있는지, 국민들을 삶과 죽음의 경계로 이끄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윤리라도 발동되고 있는지.

당신에게 돌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르며 썼습니다.

2007년 4월 4일

문화연대 활동가 완군 드림

추신>
협상 내용을 보니 행사할 통치의 권한도 얼마 남지 않은 듯 해서 그리 바쁘진 않을 듯 한데, 답장 주시면 어떨까 싶네요.^^;
덧붙이는 말

완군 님은 문화연대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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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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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군

    암튼 +ㅗ+)=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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