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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거리에서 '386'을 다시 보다

[특별기획 : X맨은 바로 너!](5) - 386

나는 이른바 ‘386세대’다. 내가 386이고자 하지 않았고, 그 부류로 분류되는 걸 나름으로는 거부하고 살아왔지만, 사회적 언어로 고착된 386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다. 청탁받아 쓰는 글이지만, 이 김에 386을 잘근잘근 씹는 글이나 시원하게 써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글을 쓰는 내내 우울했다.

6월 항쟁 기념행사가 있다고 해서 시청에 나가 보았다. 9일에 열린 행사는 관변행사였고, 축제였다. 지금 민관이 한 자리에서 항쟁을 기념할 때인가라는 의문은 뒤로 미뤄둔다 해도, 그 자리에서 나는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었고, 어울리지 못했다. 시민들도 그런 것일까. 전국적으로 진행한다는 행사에, 돈도 많이 들었다는 행사에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는 않았다. 별로 흥겨운 축제판도 아닌 듯싶었다. 이애주의 춤판이라도 보았으면 했는데, 시간도 늦어서 그것마저 놓쳤다.

나중에 컴퓨터로 검색하면서 이한열 열사 어머님이 일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장준하 선생님과 같은 분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자 심의에서 기각되었던 일을 어머니는 성토했다. 그리고 이한열과 같이 죽었음에도 추모제도 치러주지 못하는 열사들, 의문사 당한 뒤에 부모들이 진상규명을 외쳐도 외면 받는 현실을 두고 민주화가 되었냐고 항변했다. 6월 항쟁 20주년을 제대로 기념하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노무현이 보고 소주나 두 병 사오라고 해”

다음날 정부가 주최하는 6월 항쟁 기념식이 세종문화회관에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노무현이라는 자의 방정맞은 발언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기 싫다. 누구의 말마따나 재수 없는 ‘그놈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다. 그 행사에 주빈으로 초청받은 박종철 열사의 아버님과 이한열 어머님은 참석을 거부했다. 청와대 의전관계자가 몇 번이고 와서 참석을 종용했지만, 완강하게 거절했다. 추모연대의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처사를 비난한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박종철 열사 아버님은 청와대 관계자에게 그랬다. “노무현이 보고 소주나 두 병 사오라고 해.” 그렇게 하고는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기념식장에 입장하기 위해 나라비를 선 그 옆에 주질러 앉았다. 농성이었다. 6월 항쟁을 열사 유가족들은 농성으로 맞았다. 이번 6월 항쟁 20주년은 그런 의미의 기념일이었다.

그래도 기념행사는 이어졌다. KBS 열린음악회에서는 운동가요들이 가수들과 성악가들에 의해 불려지고, 자막으로 가사들도 소개되었다. 낮 시간 시청에서는 관과 함께 행사하기를 거부한 민간조직위 차원의 ‘6월 항쟁 20주년 계승 범국민대행진’이 열렸다. 참으로 왜소했다. 5백 명이나 모였을까, 겨우 5백 명. 졸속으로 준비되었고, 시민들에게 홍보도 안 된 다시 우리만의 기념행사였다. 다행히도 70년대, 80년대 학생운동 출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몇 십 명의 청년들이 20년 전의 거리 항쟁을 재현했다. 누구는 노동자로, 누구는 신부와 수녀로, 누구는 학생으로 분하여 태극기 앞에서 웃통 벗고 달리기도 하고, 건물 위에서 유인물을 뿌리기도 하고, 광주리에 음료수를 갖고 와서 나눠주기도 하고, 그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드러누워 연와투쟁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흥미가 없었다. 어제처럼 초대받지 않은 행사에 참석했다는 어색함은 없어도 이런 걸 왜 하나 하는 의문만 계속 들었다. 사회자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선창하고, 80년대의 운동가요를 불러도 재미는 없었다, 뜨거운 땡볕에 이렇게 행진해야 하는 절실함이 없었다. 투쟁이 빠진 기념행사가 갖는 활력 없음, 맥 빠짐,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6월의 태양은 뜨거웠고, 아스팔트는 이글이글 타올랐다.

앞 다투어 권력이 된 386들

정치권 386들이 자랑스러워하는 6월 항쟁, 그 20주년을 기념하는 이렇게 맥 빠지게 지나갔다. 이른바 386 세대의 모든 성과와 영광을 송두리째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던 그들이지만, 이제는 그들로 인해 386 세대 전체가 매도되는 상황을 맞고 있다.

386은 정치개혁을 열망하는 국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앞 다툰 정치권의 영입작업에 기꺼이 응답했다. 그들은 정치판에서 몇 십 년을 굴러도 얻기 힘들다는 지역구 하나씩을 배당받아서 위원장을 지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를 거쳐서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 드디어 386은 초재선 의원으로 집권여당 내 상당한 수를 확보했다. 실제 노무현 정부도 386정부였다. 386 없이는 노무현정권의 창출과 정권을 생각할 수 없다. 거리의 투사들이 권력의 핵심부에, 그것도 정치적인 경력이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안희정이나 이광재를 비롯해 부산지역에서 함께 활동했던 386 동지들에 대한 신뢰는 무한대였다.

개혁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국회와 청와대에 입성할 때까지가 386의 영광이었다. 그들은 너무도 쉽게 기성정치판의 생리를 알아갔고, 적응했다. 운동권에서 익힌 원칙과 논리로는 지역구 유권자들을 설득할 수도 없고, 정치판에서 설 자리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 쉽게 알아 버렸고, 그런 현실에 타협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할 때도 한나라당의 무법적인 법사위 점거를 규탄했을 뿐, 자신들은 당 내에서도 사분오열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이라크 파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한미FTA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침묵하거나 앞서서 정부의 논리를 옹호했고, 협상에 나섰던 외통부 공무원들을 영웅으로 대접해주었다. 평택미군기지 확장 사업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쟁처럼 일어날 때도 현장에 얼굴 내민 의원들은 민주노동당을 빼고는 찾기 어려웠다. 이 두 사안은 그들이 학생운동 시절에 그처럼 외치던 반미자주화의 과제와 직접 연결되는 것들이었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미국이 패권을 관철하려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행위가 극한에 달하는 사안임이 명백함에도, 그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 그토록 민중을 섬기기까지 하겠다는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는 법률을 ‘비정규직보호법’이라고 우겨대면서 그 법률의 통과에 찬성했다. 그들의 안중에 민중이 아직 자리하고 있었다면, 최소한 천정배처럼 뒤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단식이라도 했어야 했다. 그러지도 못한 386의원 나리들은 이제는 다시 친노그룹과 대통합파로 나뉘어 어디로 줄 설까를, 그나마 한나라당의 집권은 막아야 한다는 알량한 정치적 명분을 끌어다 대면서 눈치를 까고 있다.

그 정치적 무소신과 기회주의라니. 정치적 기회주의에 더해서 무능력집단으로 매도된다고 한들 이제 누가 그들을 변호하겠나. 생존의 벼랑에 떠밀려 내지르는 민중들의 외침에 귀 막고, 누군가 일어나 말하지 못하는 386들에게 누가 정치적 신뢰를 보여주겠는가. 민중들의 이해와 요구는 자신들의 의원직을 유지하기 위한 자의적인 해석과 자신의 이후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정체세력들의 입장으로 바뀌었다. 늘 그들은 보수화된 유권자를 탓했다. 운동이 아니라 정치이므로,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므로, 라는 말을 너무 쉽게 입에 올리는 정치권 386들, 무대의 화려함만 알고 그 무대가 있기까지 고통에 찬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땀을 잊은 자들, 그들이 당하는 수모와 모욕은 그들이 자초한 일이다.

이제 386은 폐기되어야 한다. 386 컴퓨터가 창고 속에 방치되었다가 어느 날 CPU 도금 부분만 채취된 뒤 폐기되었듯이. 이제 386은 보다 엄밀하게 정치권 386으로 제한해서 말해야 한다. 영광도, 실패도 모두 그들의 것이므로.

진짜 386들을 만나고 싶다

6월 항쟁은 정치권 386들의 것이 아니었다. 총학생회장 출신들이 주도했다고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항쟁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항쟁이었고, 그나마 성과가 있을 수 있었다. 정치권 386은 그런 상황을 만드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그 정도였다. 그런 그들이 그 후의 영광을 독차지하고, 그리고 스스로 권력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권력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다른 386들이 있다. 6월 항쟁의 소중한 자산을 자신들의 입신을 위해서 써버린 이들이 아닌 386들이 있다. 누가 알아주거나 말거나 생활 현장에 돌아가 자신들의 삶을 묵묵히 이어가는 그들. 한때 그들은 노빠에 열광하기도 했지만, 다시 매섭게 노빠를 비판한다. 우리 사회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1980년대의 역동적인 현장을 살아낸 그들을 난 진정 386으로 생각한다. 누구보다 앞 세대들의 정치적 진출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우리였던 그들, 운동의 현장을 달렸거나 그러지 못하면 응원을 해주었던 그들의 참여가 있었기에 6월 항쟁은 가능했다.

그들은 전국의 생활현장으로 산개했다. 민중을 지도하지 않고, 민중들 속에 들어가 그들에게 배우려 하는 사람들, 민중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는 사람들, 자연스럽게 생활에 젖어있다가도 시대의 부름이 있으면 촛불 한 자루 들고 너나없이 광화문 거리를 메우는 사람들, 평택투쟁에 말없이 달려와 한 자리를 차지하다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머쓱하게 손 내미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러기에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40대가 가장 진보적인 것으로 나오지 않는가.

정태춘은 ‘92 장마, 종로에서’를 노래했다.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고. 시대는 흘러갔다. 6월 항쟁도 흘러갔다. 아마도 과거의 기억으로 남기를 거부하고 시대는 흘러가는 게 역사의 본성인지 모른다. 그 역사 속에서 사람도 그에 맞게 굴러야 하는 것, 그러면서도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소중히 지키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므로 6월 항쟁을 만났으므로 6월 항쟁을 죽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에 재현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386이 업그레이드되어야 하는 것처럼 업그레이드된 재구성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정치권의 쇠락한 386처럼 대중들로부터 시대로부터 버림받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아무리 노무현이 ‘그놈의 목소리’로 자신의 정당함을 항변한다고 해도 미친 놈 헛소리로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난 다시 종로에서 사람들을 기다린다. 비에 젖은 장마 어느 날 쯤엔가 사람들이 그저 흘러가지 않고, 함께 모여 누구도 막지 못하는 힘으로 흐름을 형성할 그날이 올 거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다. 그 거리에서 서로 어깨 걸고 업그레이드된 민주주의를 외쳐 부를 그날을 꿈꾼다. 그 꿈마저 버리라 하면 무엇을 바라 남은 생을 살까. 6월 항쟁 20주년은 철저하게 외면당했고, 그런 만큼 항쟁의 내용과 형식을 재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 항쟁의 꿈을 같이 꿀 사람들 중에 진정한 386들이 있다. 그럴 때 거리에서 우리는 항쟁을 제대로 기념하게 될 거다, 그날에는.
덧붙이는 말

박래군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로 본 지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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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 민주화 , 6월 , x맨 , 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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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뫼비우스

    6월항쟁 관련한 글중에 가장 가슴에 와닿은 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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