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군]의 토마토 던지기

'시민의신문' 사태와 시민사회의 '늙은 여우들'

[특별기획 : X맨은 바로 너!](8) - 이형모

꾸준히 열심히 하고 있다는 주관적 자족을 제외한다면 모든 객관적 지표는 수년째 운동의 위기를 말해왔다. 감히, 오늘의 ‘운동’을 약평해보자면 민주주의의 형식적 제도화와 자유주의 확대에 따른 체제 친화적 시민운동의 성장과 자본주의의 성장과 고도화에 따른 계급운동으로서의 변혁적 사회운동의 역동성 축소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노무현이란 돌발적인 그러나 매우 중요한 변수를 경유하며 한국 사회 전체는 총체적 위기라는 수사적 표현이 실존을 압도하는, 도저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형편으로 치닫고 있다. 유력한 시민운동 단체의 누군가는 희극적이게도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며 운동의 위기는 사회 전체의 총체적 위기의 부분적 현상이라는 그럴싸한 환상을 유포하고 있다. 물론, 상황 자체가 정말 위기인 경우는 위기 담론에 비하면 매우 적기는 하다. 위기 담론은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위기를 강조할 때만 생명력을 갖기 마련이다.

그래서 운동의 위기를 한국 사회의 위기의 부분으로 연결시키는 식의 논법으로 건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훈의 수사를 빌어 말해보면, 운동의 근본은 운동의 부자유이(어야 한)다. 그리고 부자유는 운동 본연에 대한 가혹한 자기검열에서 온다. 자기검열이 없는 운동은 유언(流言)일 뿐이다. 운동의 위기는 언젠가부터 시민운동이 부자유를 잃어버린 것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확대 국면을 ‘쟁취’해낸 성과라고 입맛을 다신다면 안타깝지만 참으로 딱할 뿐이다.

최근 소위 “87년 (헌법)체제”에 관한 낯간지러운 기념이 뜨거웠고, <시민사회연대회의>를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 진영은 이를 ‘성과’와 ‘기념’의 의미를 중심으로 현재적 의미를 성찰하자는 결국, 시민사회의 ‘진로’ 설정 수준으로 수렴하는 듯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결국 87년 6월 항쟁의 에너지를 비자본주의적 사회운동으로 전환하는 대신 점진적 개량주의로의 길로 몰아넣는 선택의 연장1)이며 ‘87년 체제’의 결론을 “개량을 통한 후퇴”로 귀결하는 입장이다. 이 과정에서 시민운동으로 대표되는 “87년 (헌법)체제” 이후의 운동들은 수많은 장점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인식론적 장애에 빠져 이러한 후퇴에 기여했다.

시민운동은 근대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내용적으로 공정성, 투명성, 형평성의 가치를 원칙삼아 형식적으로 중앙집중형 전문가 중심의 운동을 전개해왔던 것이다. 이는 대단히 모순적이다. 최근 민주주의가 박제화 된 절차의 문제로만 전개되고 있다는 비판은 민주주의란 용어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고민을 독점한다고 자부해왔던 시민운동의 활동 양상에 기인한바 크다. 앞서 말한 부자유 없는 운동이다. 시민운동의 문제는 냉정한 정세적 판단 없이 세련된 탈근대적 가치 지향(공정성, 투명성, 형평성)을 무턱대고 내세웠지만 대책 없는 근대성(엘리트, 전문가주의)에 기반하여 이를 수행하고 네트워킹하려 했던 결과의 필연이다.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것 외엔 아무런 전략도 전문성도 갖지 못하게 된 ‘늙은 여우’들의 교태와 아우성이다.

<시민의신문> 사태는 뭣도 모르고 영역만 넓어지는 것을 마냥 좋아했던 늙은 여우들이 맞게 된 척박한 영토였다. 그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사회적 권력과 지분을 놓지 않는 정도에서 <시민의신문>이 정상화됐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지고 열심히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운동을 조금만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필자가 속한 문화연대 대표를 포함하여 최열(환경재단 대표, 전 환경운동연합대표), 박원순(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 이명순(전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 정현백(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등의 1세대 시민운동 인사들이 얼마나 많은 자리에 이름을 올리며 운동사회 상층의 막강하고 참담한 게이트키퍼(gatekeeper)로 존재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바로 <시민의신문> 이사였다.

사태 초기 박원순은 마치 자신이 이사인지조차 몰랐다는 반응으로 일관했으며, 최열, 이명순, 정현백은 사태의 조기 수습과 무마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이들이 속했던 이른바 메이저 시민단체들은 단 한 곳도 <시민의신문 사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태 초기 “개인적인 일로, 사퇴할 만한 사안은 아니라는 입장”을 이사회에서 밝혔던 이사는 누구였을까?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던 지난 해 9월 중순 이형모와 피해자를 중재하던 자리에 있었다는 박원순, 최열, 정현백, 문국현, 박상증 등은 왜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한 마디 말이 없는 걸까?

특히, 지금 국민이 행복한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최열은 <시민의신문>과 <희망포럼>에서 이형모가 물러나는 조건으로 이형모의 대리 서명까지 했다고 한다. 직업을 찾는 그의 안목에 비로소 통탄할 뿐이다. 이미 수년째 그는 운동이 아닌 ‘정치’로 일관하며 운동을 불행하게 만들어왔다. 운동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그의 정치가 당최 어떻게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가소롭긴 하지만 그런 저차원적인 의문은 나의 몫이 아니라 그와 함께 ‘정치’를 시작한 이들의 몫일게다.

시민운동은 80년대 민중운동이 쇠퇴한 자리를 대신 차지하여 한국사회의 민주개혁을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자타가 공인해 왔지만 운동의 결과는 형식적으로는 “민주화 세력의 집권”, 내용적으로 “개량을 통한 후퇴”로 귀결된 체제를 원활히 작동시키는 중요한 한 축으로 기능해 왔을 따름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물론 “87년 (헌법)체제”의 모든 문제점이 개혁적 시민운동 자체에서 발원된다고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국 자본주의와 세계 자본주의의 동학에 대해 그동안 개혁적 시민운동이 일종의 인식론적 모순과 장애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인식의 포기 혹은 부재가 곧 미시적 권력과 개량주의적 환상을 강화하고 이 권력과 환상의 공간에서 시민운동의 자위적 성장이 있었다는 점을 철저히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시민운동의 구조적 한계이다.

그리고 <시민의신문> 사태는 시민운동에 또 하나의 결정적 하자가 있음을 고발했다. 민주화 운동의 찬란한 후광 효과때문에 반대세력 조차 차마 직접 공격하기를 꺼려했던 ‘도덕’과 ‘양심’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유사한 사건들은 있었으며 <시민의신문> 사태가 또 모든 것을 허물지는 않을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어쩌랴, 난 더 이상 최열과 정현백이 최연희를 옹호했던 국회의원 무리들보다 낫다고 생각되질 않는다.

그리고 이후 아무런 성찰의 자세 없이 다시 한 번, 시민운동의 구조적 한계와 부실함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절정의 물타기가 있었으니 바로 그것이 <시민사회신문>의 창간이다.

확인할 수 있는 수준에서 어떠한 형태이든 <시민사회신문>의 창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왔다는 여러 명에게 물어봤지만 아무도 어떻게 <시민사회신문>이 창간되었는지를 모른다. 아무리 인터넷 언론이라고 해도 창간에는 적지 않은 동력이 필요하고 소문이 나기 마련이다. 재정, 조직, 운영 등 만만한 일이 없다. 그런데 후딱 일어났다. 그것도 <시민의신문> 사태가 지지부진해지고 이형모의 몰염치함이 극에 달해 구성원들의 상태가 말이 아닐 정도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말이다. 이 마술 같은 현실은 과연 누구의 의지가 개입되어 가능해진 것일까?

보다 대안적인 한층 급진적인 신뢰의 매체 창간을 언제나 기다린다. 여기까지가 당위이고 명분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 당위와 명분을 갖고 장난치는 수작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그러나 명망가나 구성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민사회신문 창간을 설동본(전 <시민의신문>편집국장, 현 시민사회신문 편집국장)의 병가 전까지 알던 이는 많지 않았다. 물론, 병가 기간 중에 설동본과 이재환(전 시민의신문 편집장)이 김제남(녹색연합 사무처장), 지금종(전 문화연대 사무총장), 김정명신(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대표), 오창익(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 등에게 새 매체 창간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려졌다. 시민사회운동가와 단체, 그리고 평생회원으로 살림을 꾸리겠다는 시민사회신문이 이토록 급격하게 그 성과를 드러낼 수 있게 된 그 노하우가 무엇인지, 항간의 소문들이 진실인지 너무나 궁금하다. 원칙으로 대의와 호흡하겠다는 다짐은 대체 어떤 시민사회와의 결합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오히려 <시민의신문>의 성과와 <시민의신문> 사태에 끝까지 투쟁했던 남은 구성원들의 열정을 얄팍하게 날로 먹으려 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어떤 이는 글쎄, 시민의신문 메일링 리스트며, 독자 명부 등을 가져간 것을 절도로 봐야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법률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기 전까지 함부로 말하지는 않겠다. 또한 <시민의신문 사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 코빼기를 비추지 않던 그 많은 사무처장님들이 시민사회신문 창간에는 어떻게 그렇게 열렬한 환영의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는지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구조적 한계는 너무나 자주 은폐된다. 구조는 너무도 거대해서 잘 보이지 않고 그 구조에 엮여있는 네트워크는 너무나 단단하다. 일반적으로 그렇다. 시민사회는......역시, 그렇다는 증명이 바로 시민사회신문이다. 썩어가는 살을 외면하는 것은 그럭저럭 견딜만한 참담함이지만, 스스로 살을 도려내는 것은 죽음보다 어려운 일이다. 객관적 팩트를 대라는 요구는 너무나 당당하고 주관적 주장의 신빙성은 언제나 의심된다. 이 역설의 지배를 깨자는 운동마저 역설의 편리함에 복속되어있다는 믿을 수 없는 순간이다.

미디어는 오늘도 소용돌이처럼 이슈를 던진다. 분노할 일은 많고 보다 분명한 적은 수두룩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늙은 여우들은 그 틈에서 빼꼼히 기생한다. 이번 토론회를 계기로, <시민의신문 사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여전히 운동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활동가들의 자존심으로 나서야 한다. 아픔을 딛고 새로 창간했다는 시민사회신문의 기만적 언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책임을 묻고 그것을 할 문제의식도 의지도 없음이 확인된다며 시민사회신문 존채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선언적 의미에서의 시민사회 정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과정의 공유와 운영의 전망을 담보할 수 있는 민주적 합의를 통해 새로운 매체를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다. 그 대책 없는 생략을 단호히 거부하고 여전히 운동의 언저리에서 기생하며 기자들을 고소 고발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는 이형모를 정리해야 한다. 또 그를 옹호했던 늙은 여우들에게 그에 걸맞은 책임을 돌려주는 ‘진풍경’을 한 번 보여줘야 한다.


1) 일례로, 20년간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고 있다는 착시효과에 빠져 있는 동안 본질적, 내용적 민주주의가 얼마나 진전했는가 진정으로 의문이 드는 요즘이며, 그 실익은 자본-관료 연합에게 돌아가고 우리 사회는 이제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미국식 신자유주의 체제 속으로 깊숙이 함몰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는 시민사회 안에서 문제의식조차 희미해진 기업의 사회공헌사업은 막대한 이익의 모순을 은폐하는 푼돈 풀어 생색내기 이상의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근대적 의미의 노동권인 노동조합을 ‘회장님의 방침’으로 간단히 뭉개고 있는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신인령, 김형기, 방용석, 안병영, 이정자, 최열, 최학래, 황지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덧붙이는 말

완군 님은 문화연대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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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여우

    말하고자 하는 핵심에 비하면 대단히 장황한 글이긴 해도 시의적절하고 또 가치 있는 칼럼입니다. 여러 늙은 여우들이 이 글 보고 정신 좀 차려야 할텐데... 하기사 글 보고 정신차리면 늙은 여우도 아니죠. 할 줄 아는 것 없이 늙기만 했으니 운동권에서 장사하는 것 외엔 길이 없는 늙은 여우들을 어찌 처단할까요. 잘 읽고 갑니다.

  • 이런일이

    며칠전 재외동포신문에 이형모씨 외 몇몇의 사람들이 모여 시민의신문 복간에 대해 논의했다고 하더군요. 이(들)은 기업을 찾아다니며, 시민의신문이 복간될 예정이라며 광고를 부탁하고 다닌다고 하던데... 새 사장으로 임명된 김영태씨가 아름다운재단 이사라는 군요. 참 재미있는 일이네요.

  • 아씨바

    문화연대에 있는 새끼는 글을 이따위로 써야 티나냐. 내용은 조또 모르겠는데 표현 참 개같네. 아이 씨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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