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기섭]의 밑에서 본 세상

FTA체제.. 한국사회 성격 변화하고 있다

[특별기획 : FTA체제가 열린다](1) - FTA체제의 문턱, 2007년 대선

9월 7일 한국정부가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날 제출된 동의안은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본회의 표결에서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투표참여 과반수가 찬성하면 통과된다. 한덕수 총리는 “미국 의회가 조속히 처리하도록 촉구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조처는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 한미FTA로 인한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제출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미국 내에서는 아직 어떤 가시적 움직임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서명 후 90일 이내에 무역위원회의 영향보고서 및 대통령 법률개정 필요목록을 의회에 제출해야 하는 미 행정부의 비준동의 준비 작업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또 미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은 자동차 분야의 재협상과 쇠고기 시장의 전면 개방을 요구하며 비준을 반대하고 있어, 미 행정부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가 먼저 올 해 안에 국회비준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 국회 역시 각 정당의 견해 차이와 대선 등 복잡한 변수로 연내 처리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대선에서 악영향이 있을까 눈치 보느라 어느 누구도 먼저 나서 총대 메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따라서 국회 비준 통과는 내년 초 노무현의 임기 만료 직전이나 18대 국회로 밀려 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비준동의가 연기된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오히려 국민적 관심이 대선에 집중되는 동안 한국 정부의 꾸준한 ‘물밑 작업’이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해 협정 개시 때와 마찬가지로 마무리 단계에 와서도 한국 정부는 일방적 저자세로 밀실 거래를 진행하며 사회적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최근 미국이 쇠고기 위생조건을 거듭 위반하면서도 오히려 뼈 수입을 공식 허용하라며 ‘배째라’ 자세로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에 끌려 다니고 있는 데서도 그런 저자세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대미 저자세와는 상반되게 한국 정부는 국내에서는 한미FTA 반대시위를 불법으로 금하는 ‘초법적 조치’를 강행하는 일방적 고자세를 취해 왔다. 또 한미FTA 협정에 따른 새 제도를 국회 비준동의를 받기도 전에 미리 도입하려는 ‘반칙’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8월 초 ‘동의명령제’를 입법예고했는데, 기업이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해 시정과 피해보상을 약속하면 사건이 종결되도록 하는 제도로서 대자본에 대한 구속을 적극 완화시켜주겠다는 것이다. 미국과 대자본에 대해서는 저자세로 일관하면서 국내에서는 강압적 고자세로 민주주의의 제반 절차를 무시·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거침없이 ‘난폭운전’을 해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류 언론을 비롯하여 국민 대다수는 올해 안 국회 비준동의안 처리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 안심하고, 정부의 일방적 ‘난폭운전’을 일회적 해프닝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소박한 기대와는 다르게 이 ‘난폭운전’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구조화되고 있다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1) 우선 한미FTA 협정 발효와 무관하게 한국 정부는 협정 개시 이전에 스크린쿼터를 자진 축소했듯이 'Pre-FTA' 성격의 조처를 과감히 단행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지난 해 상반기 수많은 공방을 통해 한미FTA는 대미 무역수지를 흑자에서 적자로 역전시키므로 무역협정으로서는 외려 역기능을 할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이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자 지난 해 8월 노무현은 한미FTA의 주목적이 무역 흑자가 아니라 “외부 충격에 의한 구조조정”으로 “서비스 경쟁력을 향상” 시키는 데 있다고 솔직히 본색을 드러낸 바 있다.

‘97년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 중 미진한 부분을 한미FTA라는 초강력 ‘쓰나미’로 쓸어버리겠다는 의지의 노골적 표현이었다. 이후 정부는 강도 높은 서비스산업.공공기관 구조조정 방안과 “자본시장통합법” 등을 제시, 금년 들어 주요 법률들을 제개정했고, 하반기 국회에 국립대학특별법 등 나머지 법안들을 회부 중이다. 한미FTA 협정이 발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준하는 사전 규제완화.개방 조치가 무더기로 단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Pre-FTA' 조처들이 계속 단행될 경우 설사 한미FTA 비준동의를 저지한다 해도 그 성과는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다.

2) 또 한 가지 심각한 측면은 한미FTA가 ‘동시다발 FTA’ 전략 추진의 명분을 제공해주었다는 데에 있다. 가장 심각한 타격을 줄 한미FTA를 강행한 결과 그보다 약한 FTA에 대한 반대는 사회적 의제로조차 떠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한EU FTA는 큰 저항 없이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고, 캐나다, 멕시코, 중국과의 FTA도 동시다발로 추진 중에 있다. 한미FTA 협정서명으로 반대여론의 기세가 꺾이고, 여론의 초점이 대선에 쏠리는 틈새를 이용해 동시다발 추진전략이 성공적으로 먹혀들고 있는 셈이다. 물론 한미FTA와 동시다발 FTA가 함께 발효될 경우 정부와 대자본에게는 ‘금상첨화’가 되겠으나, 협정 발효와 무관하게 정부와 대자본이 추진 중인 신자유주의 정책은 대세론에 입각한 사전 조처를 통해 얼마든지 그 완성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을 종합해 보면, 한미FTA의 국회비준 동의와 무관하게 정부는 한EU FTA 등 동시다발 FTA를 추진하면서 ‘FTA'에 대한 대중적 저항을 무디게 만듦과 동시에 'FTA 대세론’을 퍼뜨려 여론을 호도하면서 이미 관련 국내법 상당수를 제개정하는 방향으로 한국사회의 운영시스템을 이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내용과 구조로 전환 중에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무대 위에서는 한미FTA라는 초강력 스펙타클을 전개하여 국민적 관심을 주목시키는 동안 무대 뒤에서는 신자유주의의 전면화를 가속화하는 관련법제 개편을 거의 완성해 가고 있는 이중 플레이 전략이 문제의 핵심인 셈이다. 전 국민을 현혹하는 국가적 ‘마술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술쇼’는 아직 클라이막스에 이르지 않고 있다. 10월 2일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화룡점정’의 순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9월 2일 제네바 북미실무협의를 통해 북한은 ‘핵불능 시한’을 연내로 확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9월 7일 불능화에 상응하는 5개국의 보상조처가 현실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9월 11~15일에 미국.중국.러시아 핵전문가들의 영변 핵시설 방문.협의를 수용하여 핵시설의 ‘속살’을 공개하기로 전격 발표한 가운데, 같은 날 시드니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가 “김정일 위원장이 핵무기를 검증 가능하도록 폐기한다면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는 평화조약을 김정일 위원장과 공동 서명하겠다는 뜻을 평양에서 열릴 남북 정상회담에서 전해 달라”고 공표함으로써 9월 17일로 예정된 2단계 6자회담의 순항을 예고하고 있다. 이에 따라 10월 초로 연기된 남북정상회담은 여유 있게 평화체제 선언과 남북경협 확대의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고, 대선 지형에서 여당에게 유리한 역전의 계기가 마련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이 때문에 정상회담 연기의 배경 논란이 있지만, 결국 전후 맥락을 따져 보면 남북정상회담을 연기한 것은 북한이고, 그 이유는 남북정상회담 이전에 미국의 승인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고, 언제나 그러했듯이 결국 남북관계는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 주도하고 있고,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에 종속되어 있으며, 또 북미관계의 진전은 결국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큰 형님의 승인 없이는 아무 일도 되는 게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남북경협 등 남한에 실질적 진전이 있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남한이 미국에게 빚을 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에 따른 실질적 대가를 남한이 지불해야 할 것임을 인지하는 것이 현실적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6자회담 및 이후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가시화될 남북관계의 진일보에 대한 보상을 쇠고기와 자동차 분야에서 얻어내려 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예상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이런 식의 주고받기 과정은 이미 한미FTA 협상을 개시했던 지난해부터 예상했고, 또 그대로 진전된 일이지만, 한미FTA 저지운동의 주력 부대인 민주노총 등의 주요 대중조직들은 이를 차단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북핵 위기 해소에 급급하여 한반도 위기를 담보로 삼은 초국적자본의 경제적 밀실거래라는 복잡한 방정식에는 눈을 감았다.

물론 이들의 행보가 단순한 인식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미FTA 저지를 위해 총력을 다 해도 모자라는 시점에서 진보적 사회운동 전체의 연대체인 ‘민중연대’를 해체하고, ‘순수하게’ 민족주의 진영만의 새로운 연대체인 ‘한국진보연대(준)’ 결성에 열을 다한 것은 무지의 소치라기보다는 오히려 한미FTA를 계기로 재편될 북미-남북 관계의 새로운 방정식의 일부를 구성해가는 적극적 행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미FTA라는 새로운 동반자의 성공을 매개로 해서만 진전될 ‘한반도 평화체제’로의 전환은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분기점이 될 것이며 이를 대비하여 새로운 정치적.사회운동적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새 패러다임의 ‘형식’이 아니라 성격과 지향점이다.

한반도 평화체제인가 한미FTA인가 라는 양자택일적 질문은 이 성격과 지향점을 흐리게 만든다. 후자가 불가피하다면 전자라도 진전시켜야 한다는 착각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판단이다. 후자가 불가피한 대세도 아닐뿐더러 한미FTA를 담보로 한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의 진전은 민중적 입장에서는 결코 환영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자본의 이익을 위한 일방적인 한미FTA를 조건부로 이루어지는 한반도 평화체제와 확대된 남북경협의 시작은 사실상 미국-한국의 대자본 연합에 의한 흡수통일이자 한반도 전체를 새로운 양극화 체제로 재편하게 될 새로운 개발주의의 파괴적 행진의 서곡에 다름 아니다.

어찌되었든 한반도의 운명을 새로운 방향으로 결정지을 ‘주사위’는 던져졌다. 현재 정국을 주도하는 정치세력들은 해방 60년 역사의 향방을 새롭게 바꿀 이 주사위의 주변에서 떡고물을 줏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대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큰 이변이 없는 한 이번 대선은 자본에게는 새로운 미래를 열겠지만 민중에게는 희망을 닫는 장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과거와는 성격이 전혀 판이한 정치게임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한미FTA-전략적 유연성-한반도 평화체제로 엮인 반민중적 보르메오 고리를 끊어낼 가능성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태에는 명암이 있게 마련이다. 이번 대선으로 20년에 걸친 자유주의 헤게모니는 막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민주화 운동’의 외피 아래에서 대중운동을 말아먹어온 ‘허구적 진보’의 진면목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번 대선은 지난 이십년 간 ‘비판적 지지’의 그늘 아래 가려져 있던 진보운동에게 자립할 것을 강제할 것이다.

물론 자립이 쉬운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의지했던 지팡이를 버리고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를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유를 부릴 시간도 없다. 오랫동안 정교하게 기획된 ‘FTA체제’가 이미 가동 중에 있기 때문이다. 한미 자본.국가 간의 새로운 합동 전략은 아래로부터 확산된 대중적 저항에 타협하기 위한 ‘수동적 혁명’의 산물이었던 ‘87년체제’와는 정반대로 위로부터의 적극적인 중장기 기획이라는 점에서, 또 국내적 차원을 넘어서는 미국의 초국적 자본.군산복합체와의 명시적인 전략적 동맹 하에서 추진되는 남북관계 및 동북아시아의 국가 간 체계의 친자본주의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거시전략이라는 점에서 한국사회는 이미 대대적인 성격 변화를 겪기 시작하고 있다.

‘87년체제’가 자유민주주의의 헤게모니가 견지되는 가운데 국가에서 자본으로의 권력 이동이 점진적으로 진행된 시기를 총칭하는 것이라면, ‘97년체제’는 강제된 개방과 구조조정의 대세 속에서 초국적자본을 등에 업은 자본이 국가를 매개로 신자유주의를 확산해가면서도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표방할 수밖에 없었던 과도기였다. 그러나 이제 한미FTA를 계기로 전면화되기 시작하는 ‘FTA체제’는 초국적자본의 일방적 지배 하에서 시장 논리가 민주주의를 압도하고 표출되는 대중적 저항을 강압.봉쇄하는 형태로 신자유주의의 노골적 지배를 관철해갈 ‘신자유주의 경찰국가 체제’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고 있다. 외환은행 불법매각을 수년간 방치하는 방식에서나 조폭 중의 조폭 정몽구 회장을 집행유예로 석방하는 태도에서 이미 국가장치의 친자본적 성격이 유례없이 노골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도 아직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한미FTA 협정 서명이 발표된 직후인 지난 4월 5일 삼성경제연구소는 “한미FTA 협상 타결과 한국경제의 미래”라는 제목의 이슈페이퍼를 통해 ‘FTA 활용 전략’으로 몇 가지 굵직한 충격적 주문을 내놓은 바 있다. 그동안 대기업은 치열한 구조조정을 이루었기에 이에 대해서는 규제완화를 추진하고, 낮은 경쟁력에도 불구하고 정부지원을 계속해 온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과감한 구조조정을 추진할 것, 저지출.저규제의 영미계 국가들이 고성장.저실업의 거시경제 지표를 보이는 것과 달리 고지출.고규제의 남유럽 국가들이 저성장.고실업으로 경제활력이 떨어지는 것을 거울삼아, 작고 강한 정부를 지향하면서 미션 중심으로 정부 조직을 슬림화, 민영화하거나 민간위탁, 분권화를 추진할 것, 세입 확대가 어려우므로 고등교육 등 인적자원 고도화와 안보/치안/안전 지출을 합리적으로 확대하면서 다른 지출을 줄이도록 정부지출의 우선순위를 조정하라는 것이 그 주요 골자이다.

그나마 힘이 없는 중소기업에 대한 추가 구조조정과 군사안보와 치안 예산의 증대를 요구하는 것은 향후 ‘FTA체제’가 왜 ‘신자유주의 경찰국가 체제’일 수밖에 없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자본에게는 날개를 달아주고, 중소자본과 민중에게는 족쇄를 채우다보면, 양극화 심화와 사회적 저항.불안의 증대가 불가피하기에 치안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허용에 따른 국방비 증가 역시 불가피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구도 하에서 이루어질 남북경협의 확대는 남한 민중에게 어떤 이득을 제공할 것인가, 또 국방비/치안비용이 급증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평화체제’로의 전환은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 구축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앞으로 가짜 진보와 진정한 진보를 구별하고 싶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말

심광현 님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진보전략회의 회원으로 일하고 있다.

태그

한미FTA , FTA체제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