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형빈] 이화여고

대학평준화를 상상해보세요

[기고]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 출범에 즈음하여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도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 유하, <학교에서 배운 것>

200명의 아이들이 도로를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오. 골목 끝 좁다란 문에는 오직 1명만이 통과할 수 있소. 그 문의 이름은 ‘서울대’요. 아이들은 모두 무섭다고 비명을 지르오. 하지만 그 질주를 멈추지 않소.
- 이상의 <오감도>를 패러디하며

대학평준화를 상상해보세요.
일류대학도 삼류대학도 없는 세상
아이들은 목숨을 끊을 필요도 없고
부모들은 사교육비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아마 당신은 날 몽상가라 말하겠지요.
언젠가 많은 사람이 함께 동참하게 될 거에요.

- 존 레논의 <이매진>을 패러디하며

참 이상한 일이 있다. 우리 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이 과도한 입시교육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도한 입시교육이 대학서열화와 학벌사회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대부분 인정한다. 그런데 대학서열화를 없애는 것은 곧 대학평준화라는 말에 대해서는 상당수가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심지어 노골적인 반감을 보인다.

대학평준화. 가능하다. 그리고 상당수의 나라에서 이미 현실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방안이고 유일한 대안이다.

초등학생 입시 지옥을 없애기 위해 1969년도에 중학교 입시를 없애고 중학생 입시 지옥을 없애기 위해 1974년 고교 평준화 정책이 도입되었다. 고등학생 입시 지옥을 없애려면 대학평준화가 지극히 현실적이고 유일한 대안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상식인 것이 우리나라에서만 상식이 아닌 것 중의 하나가 대학평준화이다. 부르주아적 기준의 IMD 순위에서조차 학문경쟁력 1위를 자랑하는 핀란드는 자일리톨의 나라가 아니라 100% 국립대 평준화의 나라이다. 세계적 석학을 배출한 철학과 교양의 나라 프랑스도 대학평준화 체제이다. 호주는 아예 대학입학자격고사 없이 고교 졸업장만 있으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원조 미국의 대학도 소위 아이비 리그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공립대학은 평준화 체제에 가깝다. 우리나라처럼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여 전국의 모든 대학이 한 줄로 서 있는 나라는 일본 정도이다. 그러나 일본도 우리나라 정도로 심하지는 않다.

대학평준화의 개념은 사실 단순하다. 대학평준화란 모든 대학이 균등한 교육 여건을 갖추는 것, 그리고 입시의 문턱을 없애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정한 자격을 갖춘 학생이라면 누구나 가까운 대학에 가도록 하는 것, 누구나 원하는 학과에 입학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나왔느냐에 따른 사회적 차별을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대학평준화는 혁명적 상황에서나 가능한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 나라의 중학교, 고등학교 평준화는 대통령의 말 한 마디로 시행되었다. 그래서 그 시대는 독재시대였다. 지금의 대학평준화는 폭발 직전에 이른 대중의 요구, 그리고 그 요구를 구체적인 실천으로 상승시키는 운동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 프랑스의 대학평준화는 좌파 정부의 정책이 아니라 우파 정부의 정책이었다. 다만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68혁명이라는 시대적 흐름이다. 완벽한 무상교육과 평준화의 나라 북유럽의 대학체제는 90%에 가까운 노동조합 조직률, 그리고 진보정당의 안정적 집권의 산물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평준화는 가능한가? 중학교 평준화가 가능했고 고등학교 평준화가 가능했듯이 대학평준화도 가능하다. GDP 규모나 교육재정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 나라는 이미 OECD 가입국가 중 경제력 11~12위의 나라이다. 과거의 중학교, 고등학교 평준화가 독재 권력의 정치적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면, 대학평준화는 ‘승자독식의 무한경쟁사회로 갈 것이냐, 사회적 연대의 정신에 입각한 공동체 사회로 갈 것이냐’에 대한 사회적 결단의 문제가 될 것이다.

최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연예인들의 잇따른 학력위조 사태로 학벌사회의 폐해가 공론화되고 있다. 민주노동당 대선 예비후보들은 물론이거니와 원희룡, 정동영, 김두관, 천정배, 한명숙, 유시민 등도 이러저러한 형태의 완화된 대학평준화 방안을 자신의 공약으로 제출했다. 체계적인 대학평준화 방안인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의 저자 정진상 교수는 8월부터 9월까지 한 달 동안 ‘입시폐지, 대학평준화’의 깃발을 꽂고 전국을 자전거로 일주하며 경유지마다 강연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9월 20일,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상상력, 그리고 그 상상력을 현실화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다. 지배층은 끊임없이 우리의 상상력을 좁디좁은 현실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 왔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경쟁의 논리를 내면화했고, 경쟁에서 승리한 자를 칭송하며 패배자를 경멸해 왔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해 왔다. 그리고 스스로 상상력의 날개를, 구체적 실천의 의지를 꺾어 왔다.

대학평준화를 상상하라. 아이들은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며 꿈을 펼칠 수 있다. 대학평준화를 상상하라. 노동자 민중들은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 야근 잔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 대학평준화를 상상하라. 지방대가 살아나고 지역사회가 활성화될 것이다. 대학평준화를 상상하라. 대학들은 서열이 아닌 학문 특성에 따라 재구조화될 것이다. 대학평준화를 상상하라. 학벌이 아닌 인간 자체로 인정받는 사회가 될 것이다. 대학평준화를 상상하라. 승자독식의 야만적 신자유주의의 기세를 꺾고 아름다운 연대 사회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싶은 자,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에 동참하라. 완벽한 정책과 운동의 경로를 요구하지 마라. 구체적인 현실을 맞닥뜨리며 함께 지혜를 모을 일이다. 회원 가입은 아주 쉽다. 홈페이지(http://www.edu4all.kr)에 접속하면 된다. 회비 낼 데가 많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 회비는 만 원 이상 형편껏 한 번만 납부하면 된다. 지금 접속하라. 그리고 소통하라. 주변을 조직하라. 우리의 실천 여부에 따라 입시폐지, 대학평준화는 10년 이내에 현실이 될 수도 있고, 영원히 먼 미래의 과제로 유보될 수도 있다.
덧붙이는 말

이형빈 님은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준) 정책교육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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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평준화 , 입시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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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

    대학평준화 지지합니다!!

  • 좌공

    대학평준화에 소위 '운동권'조차 허무맹랑하다고 씹어대는 걸 여기저기서 보았다. 얼마나 '경쟁'이 내면화되었으면, 해방과 자율을 대의로 하는 운동권조차 저럴까 싶어 한심하다기 보다 측은지심이 발동했다.

    여전히 '환상속의 그대'들이여...(누구?)
    '평준화'란 말만 들으면, 저 부르조아(그 이데올로그들까지)들이 직싸리 뇌까렸던 '(비교)하향적' 관점에서 벗어나라!
    낱말의, 형식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부르조아의 말장난과 이데올로기의 그물에서 놓여나지 않는한 '정글 속 죽음경쟁'법칙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그러나 어찌할꼬,,,이시간에도 우리의 어린 중딩과 고딩들이 '자살의 비수'를 가슴에 품고 야자에, 입시지옥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 서리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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