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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한 세상과 작별하기

[김규종의 살아가는이야기] 자연법칙과 유리되는 인간

비가 개이고 얼마 지나면 거리에 지렁이 주검들이 나뒹굴곤 한다. 온몸에 물이 가득 찬 채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그들의 사체에 파리며 개미들이 모여들어 잔칫상을 벌인다. 하지만 그들도 크고 작은 새들의 표적이 된다. 더욱이 개미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구두나 운동화에 깔려 불귀의 객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자연의 이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연법칙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계다.

인간은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의 거주자가 아니다. 옛날에는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야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들판에 담을 치고 스스로 자연과 유리되었다. 인간만을 위한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폴리스’의 광장(‘아고라’)이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나는 들판의 수목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직 폴리스의 인간들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 (<대중의 반역>, 210쪽.)

광장을 지배하는 법칙은 문명의 법칙이고 인간중심의 법칙이다. 먹고 먹히는 관계가 아니라, 공존과 공생의 사회관계가 나타난다. 직접적인 방식의 공격과 살육이 아닌, 간접적인 행동방식과 상생을 추구한다. (물론 ‘이라크 침략전쟁’과 같은 야만적인 형태의 예외가 있다.) 문명과 역사가 진보함에 따라 인간의 존재양상은 보다 복잡해지고 변화무쌍해졌으나, 본질적인 면은 변하지 않았다. 야만과 문명의 가늠자는 공존과 상생에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는 위험하다. 금도(襟度)가 무너진 지극히 무도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추석 지난 고속도로 갓길이나 각종 축제가 끝난 뒤 행사장에 넘쳐나는 쓰레기. 비상등 켜놓은 채 주인 없이 도로에 방치된 승용차. 인도를 뒤덮는 가래침과 담배꽁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24시간 무단횡단. 일상화된 층간소음과 막무가내 식의 권리주장. 사회 전체에 만연된 정치적-경제적 한탕주의. 나와 가족만을 생각하는 야만적인 가족주의. 편법과 탈법을 무릅쓰고 실현되는 가진 자들의 투기와 위장전입과 치사한 변명까지.

국제통화기금(아이엠에프) 사태 이후 우리 사회는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다. 양극화와 도덕적 불감증, 1970년대 성장신화 예찬과 박정희 향수, 시장만능과 무한경쟁, 서울의 비대화와 지방의 공동화,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의 무한확대, 1% 국민이 소유하고 있는 57%의 사유지, 후안무치한 대기업 총수들의 행동양식.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유럽은 68혁명으로 이런 사회적인 중증질환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87년 6월 항쟁으로 획득한 최소 한도의 민주주의마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민중의 생존이 보장되지 못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미래를 꿈꾸며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의 기본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회는 야만이다. 야만과 무도를 종식하려면 깨어있는 시민의식과 그것의 자주적인 확장과 구체적인 실현이 필요하다.

이제 일어서서 주위를 돌아보자. 나와 가족이라는 1차원적인 관계를 넘어서 사회구성원 모두 얼굴을 맞대고 ‘지금’과 ‘여기’에 기초하여 ‘미래’와 ‘공동체’를 구상해보자. 미래는 시간의 가장 본질적인 차원이며,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의 공간은 최고의 연대가 만들어내는 가치의 정점 아니겠는가.

지렁이의 주검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분해 작업을 생각한다. 크고 작은 이해관계에 억척스레 매달려 있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름다운 자연을 예찬하고, 자랑스러운 문명을 노래하려면 우리부터 욕망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결국 삶이란 야만과 무도를 이겨내고 문명과 상생에 터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말

김규종 님은 경북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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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 미래 ,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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