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일 연구자의 세 번째 글 '죽은 논리학과 살아있는 정치학'에 대해 금민 전 대표가 다시 '이행의 정치학에 대한 비판'을 제목으로 세 번째 글을 보내왔다. 이 글을 포함해 둘 사이에 주고받은 글은 모두 여섯 편으로 아래와 같다.
- 진보의 재구성,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 (이광일. 1월17일)
-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고 있다 (금민. 1월21일)
- 금민 씨에 대한 답변 : ‘현자와 바보’(이광일. 1월23일)
- 사회적 공화주의, 달과 손가락 (금민. 1월25일)
- 금민 씨에게 : ‘죽은 논리학’과 ‘살아 있는 정치학’(이광일. 1월28일)- [편집자 주]
사회적 공화국으로의 경로
이광일 씨는 두 번째 글에서 “사회적 공화국과 민주공화국이 ‘이행의 관계’가 아니라 한다면, 필자는 그것을 하나의 해석으로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도 “필자를 포함하여 그 강령과 해설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과연 금민 씨처럼 독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고 의문을 달았다. 즉 이광일 씨처럼 ‘역사적 선행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통상적이지만 ‘논리적 가능조건’이라는 주장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두 번째 글에서 강령과 강령 풀어쓰기의 해당 구절을 인용하면서 어떻게 그 구절이 이광일 씨처럼 이해될 수 있을까를 되물었다. 여기에 대해 이광일 씨는 사회적 공화국으로의 “경로를 강령에 반영하는 것은 여전히 당면한 핵심과제”로 남아 있으며 “한국사회당 강령에 비어 있는 가장 커다란 한계로 지적한 사안”(이광일 2)임을 지적했으나 금민은 “강령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다시 인용하면서 (...) 다시 특유의 논리학강의를 하고 있다”(이광일 3)고 비난한다.
지난 글에서 내가 강령을 인용한 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이광일 씨처럼 사회적 공화국을 민주공화국의 역사적 선행형태로 이해할 독자는 많지 않음을 강령의 문구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두 번째는 “대안사회의 구성원리로서의 ‘탈배제 운동’의 목표는 ‘꼬뮨’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에 대해 한국사회당의 강령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이광일 2)는 주장에 대해 강령은 “배제 없는 통합”이라는 분명한 구성 원리를 말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이광일 씨의 세 번째 글에서 큰 논점을 형성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이제 이광일 씨는 내가 사회적 공화국으로의 ‘경로’를 한국사회당 강령이 담고 있지 않다는 그의 지적에 대해 답하기는커녕 강령 인용과 ‘논리학 강의’만 했다며 비난의 초점을 옮긴다. ‘사회적 공화국’으로의 경로 또는 수단은 목표가 열거된 강령이 아니라 수단과 경로를 구체화해야 하는 정책의 형태로, 즉 한국사회당의 복지정책, 대선 공약 중의 복지선언 및 국민기본소득제, 5대 영역의 개별 복지정책에 나타난다. 이는 내가 첫 번째 반론에서 이미 말했던 것인데, “사회적 공화주의는 모자이크식 강령으로 ‘자기의 내용’이 빈곤하다”는 이광일의 첫 번째 비판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광일 씨는 여기에 대해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해 구체적인 정책이 없다고 비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정책은 있으나 정치가 빈곤하다는 비판을 하였을 뿐”(이광일 2)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 번째 글에서 이광일 씨는 사회적 공화국으로의 경로가 강령에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 내가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지 않은 채 논리학 강의만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경로 혹은 수단이 선거강령이나 당면 과제에 대한 중앙위원회의 의결도 아니고 당의 기본 강령에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광일 씨 말대로 질문이 “주권자를 주권자일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보장하는 모든 국민의 국가로서의 ‘사회적 공화국’이 ‘민주공화국 그 자체’이고 ‘전략’이라면, 그것이 어떤 현실 관계, 정치 속에서 실현가능한 것인지 답변해 줄 것을 재차 물었던 것”(이광일 3)이라면 그 답은 정책 공약에 있다고 이미 답했다. (한국사회당 대선 공약이 과연 질문에 대한 정답인가, 아닌가의 문제와 무관하게) 논쟁은 경로와 수단이 강령에 표현되어 있다 혹은 없다가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 공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어야 한다. ‘사회적 공화국’으로의 경로 또는 수단을 문제 삼으려면 이광일 씨는 차라리 한국사회당의 복지선언 및 국민기본소득제, 5대 영역의 개별 복지정책들을 문제 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사회적 공화국의 실현을 판단할 준거의 목록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것 또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주권자를 주권자일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보장하는 모든 국민의 국가로서의 사회적 공화국은 금민 씨의 ‘논리학’ 안에서는 구체적일지 모르지만, 필자의 정치학에서 그것은 그야말로 추상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이광일 3)
위의 인용문에서 이광일 씨가 한국사회당의 대선 공약에 대해 과연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과연 읽기나 한 후에 비판하려는 것인지조차 의문이 든다. 이광일 씨가 말하는 "준거의 목록"은 '국민기본소득제 및 5대 영역 복지정책'을 통한 제반 사회권으로 제시되었다. 논쟁이 되려면, 그와 같은 목록들의 성격에 대해서, 실현가능성에 대해서, 경로 및 수단으로서의 적합성에 대해서 논쟁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학 강의
이광일 씨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치’에 실패했으니 ‘사회적 공화주의’는 이제 무용지물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물론 이광일 씨는 간접적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가 말하길, “이런 맥락에서 (금민은) ‘논리학 강의’에는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정치학 강의’에는 확실히 부적절하다.”(이광일 3) 비슷한 말은 두 번째 글에서도 나온다. “정책은 있으나 정치는 빈곤하다”(이광일 2) 그냥 득표에 실패한 정치인의 언설이니 실패한 것이라고 싸잡아 말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는 ‘논리학 강의’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넥타이는 신사의 전제조건이다”에서 전제조건은 ‘역사적 선행형태’가 아니라는 반박은 첫 글과 두 번째 글에서 모종의 이론적 전제와 연관되는 것 같아서 길게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첫 답변과 두 번째 답변에서 모두 사회적 공화주의는 현실 노선이었으며, 나는 이를 “방어 옹호하는 데에 관심이 없고”(금민 1.2), 현실 분석이 달라지거나 과거의 현실 분석이 틀린 것이라면 “폐기, 수정, 보완될 수 있다”(금민 2)고 밝혔다. 두 번째 글에서 나는 현실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논쟁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 분석으로부터 출발하자는 제안도 했다.
결국 이와 같은 제안이 또 다시 ‘논리학 강의’가 되는 이유는 이광일 씨의 선입관, “필자는 ‘무언가 겉도는 이 논쟁의 과정’을 통해 금민 씨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사회적 공화주의’로 상징되는 강령을 그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논리적 완성태’로 확신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다”(이광일 3)는 선입관 때문이거나, 이광일 씨의 문제제기가 현실로부터 촉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특유한 ‘이론’으로부터 촉발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행기 국가형태
“사회적 공화국은 민주공화국의 실현을 위한 전제인 만큼 그것은 이른바 ‘이행기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사회적 공화국이 실현되면, 최소한 ‘민주공화국다운 공화국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 문제는 한국사회당의 ‘최대 강령’이 ‘민주공화국’의 건설이고 그 ‘현실 강령’이 ‘사회적 공화국’의 건설이라고 할 때, (...) ‘민주공화국’, ‘사회적 공화국’의 건설이라는 최대, 최소강령은 ‘새로운 진보’를 자임하는 한국사회당의 ‘차별화된 정체성’을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각인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이광일 1)
“사회적 공화주의는 자신들의 추구하는 미래의 사회상을 ‘꼬뮤니즘’, 혹은 그에 상응하는 그 어떤 개념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민주공화국’으로 표현될 뿐이다.”(이광일 1)
“그렇기에 필자는 금민 씨가 강조하는 ‘사회적 공화국’이 ‘민주공화국’ 그 자체, 전략일 수 있음을 ‘선험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지만’, 여러 사회적 관계들과 조건, 거기에 담겨 있는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한 현실의 정치를 고려할 때, 그것은 ‘미래의 목표인 꼬뮨’으로서의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는 ‘이행기형태’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이광일 3)
이광일 씨는 첫 글에서 민주공화국은 최대 강령이고 사회적 공화국은 최소 강령이라고 말했다. 첫 글에서 이광일 씨는 민주공화국을 꼬뮨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 번째 글에서는 자신이 첫 글에서 사회적 공화국을 “미래의 목표인 꼬뮨으로서의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는 이행기형태”로 해석한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어떻게 근대 국가의 일반적 형태인 민주공화국에 ‘꼬뮨’의 원리가 담길 수 있는지 모르겠다. 비록 그 형태에 대한 논의는 매우 다양할 수 있겠으나 아무튼 ‘꼬뮨’은 근대 국가와 근대성의 정치를 넘어선 정치공동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민주공화국이나 급진적 민주주의를 어떻게 파악하든지 상관없이 나는 민주공화국의 통상적인 개념에 따라 어떻게 사회적 공화국이 민주공화국을 향한 이행기 국가일 수 있는가를 문제삼았다. 게다가 첫 글에서 이광일 씨는 ‘민주공화국’을 부정할 정치 세력은 아무도 없기에 ‘민주공화국’의 이행기 형태인 ‘사회적 공화국’은 진보 정당의 강령으로 부적절하다고 썼다. 이광일 씨의 첫 글의 내용이 “미래의 목표인 꼬뮨으로서의 민주공화국”을 부정할 정치 세력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는 말은 아닐 것이기에 그 진의는 고작 ‘민주공화국’의 이행기 국가에 불과한 ‘사회적 공화국’은 진보 정당의 강령으로 부적절하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부적절하다고 답변했다. 비록 이광일 씨는 ‘논리학 강의’에 불과하다고 비웃었지만...
재삼 말하지만, ‘사회적 공화국’은 ‘민주공화국’으로의 이행기 국가도 아니고 ‘꼬뮨’으로의 이행기 국가도 아니다. ‘사회적 공화국’은 ‘민주공화국’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에 불과하고, ‘진정한 민주공화국’ 그 자체이다. ‘사회적 공화국’은 ‘배제 없는 통합’의 사회를 향한 탈배제 운동의 일환이며, 현 시기의 중요 과제일 뿐이다.
이행 전략
이렇게 설명하면, 또다시 이광일 씨는 거기에는 ‘논리학’은 있을지언정 ‘이행 전략’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가 신학화 하는 ‘이행 전략’이라는 용어가 과연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그와 같은 용어가 성행했던 시대가 있었다. 세계사적으로 대표적인 경우가 있다면 반독점 민주주의 개념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반독점 민주주의가 ‘어떤 종착점을 향한 경로’의 의미에서 이행 전략의 위상을 지녔던가? 그 당시의 분석을 그대로 따르면서 비판을 하더라도 반독점 민주주의는 평균이윤율 형성의 법칙이 현실에서 관철되는 ‘이념적 평균의 자본주의’를 복원하는 것뿐이며, 실제로는 이념적 평균으로서는 늘 작동하는 범주인 평균이윤율에 대한 잘못된 표상에 근거한 범주 오류였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도달한 반독점 민주주의의 상태로부터 - 이광일 씨가 말하는 - ‘꼬뮨’으로의 이행 경로는 전혀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독점 운동으로 도달한 ‘평균이윤율 자본주의’로부터도, 반독점 운동으로 고양되고 급진화한 ‘민주주의’에 의해서도, ‘꼬뮨’으로의 ‘필연적 도정’은 제시될 수 없다. 길은 반독점 민주주의에서 멈춘다.
물론 나는 이광일 씨가 반독점 민주주의와 같은 이행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또는 내가 반독점 민주주의는 - 그것이 ‘이행 전략’이냐 아니냐를 떠나 - 무의미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행 전략’이라는 용어의 무의미성을 드러내는 그저 하나의 예로 차용한 것일 뿐이다.
‘이행 전략’이라는 용어는 ‘단계론’을 함축한다. 또한 ‘단계론’은 언제나 역사적 단계론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대단히 기계적인 반대는 일거에 모든 가치나 지향을 어거지로 실현하겠다는 1단계론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경향은 반자본주의 정치학의 반자본주의 윤리학화로 귀착되기 쉬우며, 자본주의적 사회화 형식의 매개 범주를 소거하는 무매개적 직접적 통일로 나타난다. 그러나 ‘단계론’에 대한 극복은 무매개적 직접적 통일이 아닐 것이다.
단계론에 대한 극복은 현존 사회의 구성 원리의 출발점인 ‘사회적 매개’를 소거하는 운동이 아니어야 한다. 현존 사회의 구성 원리가 매개를 통해 이루어지는 ‘배제적 통합’이라면, 현존 사회에 대한 반대 운동 역시 ‘매개를 통하여 탈배제’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단계론’의 극복은 현실의 ‘매개 위에서 전개되는 탈배제 운동’이며, 그것은 현실의 매개인 국가 영역, 경제사회 영역, 시민사회 영역에서의 탈배제 운동의 총체이다. 물론 다양한 층위에서의 탈배제 운동에 ‘총괄적인 목표와 좌표’를 부여해야 하며, 적합성 여부를 떠나서 그저 국가 영역에서 그와 같은 목표와 좌표로서 부여된 것이 ‘사회적 공화국’일 뿐이다. 그 자체가 전략이며 목표이며, 그 너머는 그 속에 내장되어 있다는 말은 바로 이를 뜻한다. 또한 그 너머가 그 속에 내장되어 있다고 할 때, ‘내장’의 의미는 ‘탈배제를 위한 새로운 매개’가 그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의미이지 ‘현실의 매개를 뛰어 넘은 궁극 목적’에 대한 경로나 ‘이행 전략’이라는 말은 전혀 아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내가 이광일 씨의 ‘역사적 선행형태론’에 대해 “모종의 (이론적) 입장”을 전제하지 않는가라고 되물은 이유이다. “모종의 입장”이란 당면 맥락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혹시 이광일 씨가 [x량의 상품A=y량의 상품B]를 [x량의 상품A=1000원]의 역사적 선행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아닌지를 되물었던 것이다. 나는 이광일 씨가 혹시 ‘범주 역사주의’에 빠진 것 아니냐는 질문도 했다. 그것은 “새로운 관심법”이 아니라 대개 이와 같은 논쟁에서 20세기 주류에 안주한 좌파들로부터 제기되는 낯익은 사례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 분명 결코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다.
창조한국당 만세라고?
“금민 씨의 ‘탈배제운동’은 그것을 ‘꼬뮨’이라고 하든 그 무엇이라고 하든 실제로 ‘미래의 목표’와 단절되어 있기에 ‘현존하는 배제관계들’- 금민 씨에게 이것은 ‘허울뿐인 공화국’으로 상징된다 - 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자 하는 운동, 혹은 정치와 관련된 그 어떤 세력과의 연대도 배제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 이번 대선에서 한국사회당이 창조한국당에 대해 환호작약한 비밀이 담겨 있다. (...) 금민 씨가 해석하는 ‘탈배제 강령’은 ‘이행의 정치’가 필요 없기에 정책의 친화성과 차별성만이 연대를 위한 유일한 준거가 된다. (...) 바로 이렇기에 오직 무수한 정책들만 있는 “사람중심 진짜경제”를 내세운 창조한국당에 환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광일 3)
문국현 선본에 과연 “사람중심 진짜경제”를 위한 “무수한 정책”들이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실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 문국현 후보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본 사람들이라면, ‘영성(靈性) 자본주의’에 해당되는 ‘착한 CEO론’, 사내교육정책, 과로체제 해소론 이외에 무엇이 더 있었는지 갸우뚱할 것이다. 문국현 선본은 경제대안을 제출하지 않았다. 문국현 선본에 과연 무엇인가가 있었다면 그것은 “사람중심 진짜경제”라는 프레임, ‘착한 CEO’를 상징하는 문국현이라는 상품성 있는 후보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나는 문국현 선본의 “사람중심 진짜경제”는 내가 주장한 “사람중심 탈배제 경제”의 가치 지향을 오버래핑하고 있으며 정치지형상 “사람중심 탈배제 경제”의 정치적 파워를 축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통상적으로, 이런 경우에 필요한 전략은 네거티브 캠페인이 아니라 비교 캠페인이다.
“기우에서이지만 필자는 불균등하게 전개되는 이런저런 탈배제운동들과 연대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연대할 것을 그 동안 주장해 왔다. 그렇다면 창조한국당은 왜 안 되는가. 그것은 ‘자본의 당’이기 때문이다.”(이광일 3)
이광일 씨는 “불균등하게 전개되는 이런저런 탈배제운동들과 연대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서 혹시 내가 그를 그렇게 몰아붙인다면 그것은 “기우”라고 말한다. 나도 이광일 씨처럼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국현 선본의 경우는 좀 다른 케이스인 것 같다. 나는 이광일 씨가 선거기간 중에 한국사회당 발언에 별로 진지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한국사회당 선본은 일관되게 문국현 후보와의 차별성을 밝혀 왔다. 알다시피 한국 선거제도 하에서 어차피 선거에서의 연대란 한 후보가 사퇴하지 않는 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이광일 씨가 정책적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같은 '류'안에서의 종차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며 창조한국당은 ‘자본의 당’이라고 공격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자본의 당’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단정이 아니라 분석이 필요하고, 후보의 경력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공약이 무엇인가에 대해 대중에게 분석적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효과를 떠나서 그것은 민주주의 정치에 요구되는 미덕이다.
만일 이광일 씨의 비난이 문국현 후보에 대한 ‘분석적 비판’을 ‘자본의 당’이라는 ‘종합적인 결론’으로 총괄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라면, 나는 지난 대선이 ‘자본의 당’과 ‘노동의 당’의 투쟁으로 형성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하고 싶다. 오히려 가치 지향, 구체적 정책, 선거 활동을 통해 그러한 판으로 형성할 수 있는가가 문제였을 따름이다. 한국사회당과 금민 후보의 힘은 - 득표가 웅변하듯이 - 한참 미약한 것이었다. 왜 ‘자본의 당’이라고 싸잡아 비판하지 않았냐는 반론이라면, 그런 비판은 무매개적인 정치 공세의 전형일 뿐이다. 정치는 매개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치는 현실의 매개에 근거한 매개적 개입일 뿐이다.
만약 레토릭에서 왜 문국현 후보에게는 관대하고 권영길 후보에게는 박했는가를 묻는 것이라면, 나는 권영길 후보는 ‘유일한 진보 후보’를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문국현 후보는 진보 후보가 아니라고 스스로 말했으며 나는 그를 ‘민주개혁세력의 후보’라고 말했다. 지금은 손학규 대표의 브랜드가 되어 버렸지만 나는 그 당시에 ‘새로운 진보’를 내걸었기 때문에 권영길 후보의 공약이 진보적 공약이 아니라는 주장에 비판을 집중해야 했다. 만약 권영길 후보의 공약들이 진보적이지 않다고 말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면, 내 관심사가 권영길 후보인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이광일 씨가 내가 “창조한국당에 대해 환호작약” 했으며 그 비밀은 “탈배제 강령은 ‘이행의 정치’가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에 나는 어안이 벙벙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일관되게 꿰는 이광일 씨야말로 - 20세기적으로 형해화된 - ‘체계 철학’의 대가이겠지만, 나는 사실 관계에 관해서든지 혹은 탈배제 강령과 문국현 후보에 대한 태도라는 두 가지의 연관성에 관해서이든지 이광일 씨의 주장에 단지 놀랄 따름이다. 나는 이광일 씨가 생각하는 방식의 ‘연역적 논리학자’가 아니며, 층위가 다른 언설들 사이에는 간극이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탈배제 강령’에 동의하더라도 국가 영역에서의 당면 과제를 ‘사회적 공화국 수립’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탈배제 강령’과 ‘사회적 공화국 수립’ 모두에 동의하더라도 한국사회당 금민 선본의 정치지형 판단과 선거 전략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어차피 ‘상품과 화폐’ 장의 저자와 다른 장의 저자 사이에는 간극이 있으며, ‘자본’의 저자와 정치저작물의 저자가 생물학적 동일인이라도 거기에는 심연과 같은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둘의 연관은 연역이나 도출논리적인 필연성의 관계가 아니다.
나는 학문을 하는 이광일 씨가 층위가 다른 두 종류의 비판을 뒤섞지 말았으면 할 따름이다. 물론 나는 이광일 씨의 비판 각각에 대해 내 나름대로 답변을 했지만, 나를 가장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각각의 층위 사이에 일체의 간극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단선적 인과관계론에 입각한 이광일 씨의 ‘혐의두기’이다.
철인정치인
“지금 필자가 금민 씨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많은 교육과 계몽의 기회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을 교도(敎導)하라는 것이 전부일 수밖에 없다.”(이광일 3)
이광일 씨는 내가 자신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철인정치인’이기 때문이라면서 내게 ‘교도’의 사명(?)을 부여한다. 이 말은 그의 두 번째 글에서도 등장했던 말이다. 나는 나의 마지막 반박 글을 그의 ‘철인정치인’ 비난에 대한 평으로 마치고자 한다.
대중정치인은 현실에의 작용, 효과, 결과에 대하여 책임진다. 나는 대선 결과를 책임지고 당 대표직을 사퇴했다. 사퇴의 이유는 강령부터 선거운동,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주어진 결과’로부터 출발하여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전제에 대한 의문시'로 나아가는 이광일 씨 류의 ‘정치학 강의’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반응하며 책임지는 대중정치인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이광일 씨 류의 ‘정치학 강의’에 꾸준히 답변하는 이유는? 그것 역시 내가 대중정치인이고자 하기 때문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 나는 이광일 씨의 글들이 특별히 이론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았으며, 실천적 좌표를 제시한 것도 아니라고 판단한다. 그 글들을 따라가며 답변을 하는 형태일 수밖에 없는 나의 글들도 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마찬가지로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내가 시간을 들여 세 번째 글을 쓰는 이유도 내가 대중정치인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연구자로서 나는 이제 피차에 드러낼 만큼 드러냈으니 이 논쟁 아닌 논쟁을 그만 접었으면 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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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민 님은 한국사회당 전 대표로, 17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출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