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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는 과연 우리의 미래인가

[김규종의 살아가는 이야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혼란과 스산함, 그리고 막막함

글을 시작하면서

도무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견디기 어려울 만큼 뒷맛이 고약하다. 끝나긴 끝났는데 끝난 것 같지 않다. 무엇에가 홀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시간이 걸린다. 하나 둘 관객이 일어서고, 소리 없던 영사막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코엔 형제감독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인상은 혼란과 스산함, 그리고 막막함이다.

영화는 2008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코엔 형제는 미국 영화계의 비주류로 알려져 왔고, 오히려 할리우드 바깥에서 훨씬 큰 명성과 영예를 누렸다. 조엘 코엔은 1991년 <바톤 핑크>로 제44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동생인 에단은 <바톤 핑크>의 제작을 맡았고, 조엘과 공동으로 각색하였다.

공식적으로는 조엘이 감독을, 에단이 제작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바톤 핑크>에서 보여준 것처럼 시나리오를 포함한 모든 작업을 함께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을 나눠 생각할 수는 없다. 뉴욕대학 영화학과 출신 조엘과 프린스턴 대학 철학과 출신 에단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호흡이 이제는 주류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영화의 형식: 서부극이냐 스릴러냐

나무 한 그루 찾기 어려운 황량한 사막. 바람이 분다. 멀리 무리지어 있는 영양들. 콧수염을 기른 건장한 사내가 망원렌즈로 영양 한 마리를 겨냥한다. 그가 숨죽이며 날린 탄환은 영양의 심장을 제대로 꿰뚫지 못한다. 그는 피를 흘리며 도주하는 영양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다.

1979년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디어 헌터> 마지막 장면. 사이공에서 친구인 닉이 러시안 룰렛을 하다가 죽고, 마이클은 돌아와 사슴사냥에 나선다. 망원렌즈로 포착된 사슴은 새끼를 배고 있다. 마이클은 사슴을 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친구를 잃고 귀환한 월남파병 병사의 생명존중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하지만 코엔의 영화는 전혀 다르다.

영양을 쏜 르웰린 모스. 모스도 월남전에 참전한 병사였다. 미국과 멕시코의 경계지역인 텍사스에 거주하는 모스. 그는 200만 달러가 걸려있던 마약밀매 현장에서 널브러진 주검들을 본다. 짧은 순간의 본능적인 선택이 이제 그의 인생 전체를 뒤흔든다.

영화는 현대 미국에서 찾을 수 있는 개인화기 전시장 같다. 전쟁영화가 아니라면, 이토록 많은 종류의 총기가 어디에 필요하단 말인가. 이 영화는 무엇인가. 테러, 마피아 그도 아니면 복수영화.

자발적인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누군가가 모스를 쫓는다. 쫓기는 모스를 도와주려고 보안관 벨이 끼어든다. 여기 더하여 모스의 추적자를 죽이려는 킬러가 고용된다. 쫓고 쫓기는 자들과 정의를 대표하는 총잡이 보안관의 얽히고설킨 관계. 영화는 모스의 운명을 따라가면서 추적자와 킬러를 따라가며, 또 다른 한편으로 보안관의 행적을 뒤쫓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황량한 공간을 배경으로 총잡이들이 등장하는 서부극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헐거운 외형에 불과하다. 서부극에 특징적인 음악도, 악당을 쳐부수는 영웅의 권선징악도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영화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연쇄살인이다. 스산하고 끝 모를 죽음의 행렬이 우리를 기다린다.

쉬거는 누구인가: 누가 쉬거를 막을 수 있는가

모스를 쫓는 추적자 안톤 쉬거. 쉬거를 죽이려는 킬러 칼슨.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욕망이다. 모스는 200만 달러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다. 조직에서 문제인물로 지목한 쉬거를 죽이려는 칼슨이 노리는 것도 돈이다. 그렇다면 쉬거 또한 돈 때문에 모스를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돈이 그들의 행동을 규정하는 알파이자 오메가인가.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관객에게 던지는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쉬거는 왜 사람을 죽이는가. 보안관 벨은 후배 동료에게 말한다.

“20년 전에는 사람 죽이는 이유가 분명했어. 그런데 요즘은 알 수가 없다니까. 왜 사람을 죽이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쉬거는 등이 구부정하고 무표정하다. 짙은 쌍꺼풀과 퉁퉁한 얼굴, 덥수룩한 머리의 느끼한 인물이다. 그에게서는 초원의 청소부이자 근면한 학살자 하이에나 냄새가 난다. 시속 60킬로미터 속도로 목표물을 정도로 끈질기게 추적하여 마침내 죽음의 향연을 즐기는 하이에나. 그가 지목한 희생자뿐만 아니라, 관객도 그가 던지는 질문에 매우 당황스럽다.

“자, 동전의 앞면이야? 뒷면이야? 골라. 선택은 내가 해. 그것이 네 운명이야.”

만일 당신이 이런 질문을 던지며 총을 겨누는 자 앞에 서 있다면 어떻겠는가. 도대체 누가 그에게 그런 권리를 준 것일까. 아니, 왜 쉬거는 그런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코엔 형제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끝까지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다. 쉬거를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지상에 없다는 느낌이 드는 까닭은.

하이에나가 표적을 노리는 것은 자기생존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쉬거에게는 그런 목적도 없다. 그래서 더욱 궁금하다. 왜 그가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지.

마치 파리를 죽이듯 인간을 살해하는 그에게서 연민이나 동정 같은 감정은 완전히 실종되고 없다. 학살자 쉬거는 그런 인간적인 감정을 불필요한 사치나 약자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더욱 절망적이다. 누가 쉬거를 막을 수 있겠는가. 보안관인가, 자비로운 신인가, 아니면 세상 모든 이에게 절대적으로 공평한 시간인가.

누가 노인인가: 노인에 대하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것은 제목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가 말하는 ‘노인들’이 누구란 말인가. 영화의 철학적이며 인간학적인 면모를 대변하는 인물인 벨에게서 어느 정도 대답을 들을 수 있다. 그는 이미 황혼의 나이에 접어든 보안관이다. 이제 죽음과 과감하게 맞설 나이의 인간이 아니란 얘기다.

그가 팔순의 삼촌과 나누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삶과 시간의 덧없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본다. 후배 보안관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던지는 벨의 말 속에 아메리카의 현주소가 담겨있다.

“개목걸이를 목에 두르고 알몸으로 거리에 뛰쳐나와야 겨우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어. 늙은이들에 대해서 누구 하나 관심이 없잖아.”

소외되고 살해되며 방치된 노인들의 나라 아메리카. 독립영화 감독 출신의 코엔 형제는 영화에서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너무도 빤한 설교조의 이야기에 관객들은 얼마나 냉담하게 반응하는가. 그래서 코엔 형제감독은 쉬거의 끝을 알 수 없는 살인행각과 쫓기는 모스의 사건을 영화의 전면에 부설하고, 그들의 배후에 벨을 배치한 것이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절망과 함께 다가오는 것은 현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쉬거와 대면하는 소년들을 떠올려보시라. 그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아메리카의 암담하고 우울하며 출구 없는 미래상 아닌가. 지금과 여기의 현실을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코엔 형제는 아메리카의 노인문제를 무섭도록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소년들이 자라나면 칼슨이나 모스처럼 될 것이며, 나이를 더 먹으면 쉬거처럼 성장할 것이다. 그러다 때가 오면 벨이나 그의 삼촌처럼 노인이 되어 시들어가다 죽을 것이다. 자연의 필연적인 이치다. 쉬거가 두려운 것은 자연의 섭리를 인간의 힘으로 거역하기 때문이다. 쉬거는 시간의 흐름을 제멋대로 뒤흔들어대는 저승사자이기 때문이다.

글을 맺으면서

쉬거는 냉담하고 무정한 사형집행인이다. 그는 자신이 신 혹은 악마의 대행자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가 표적을 앞에 두고 동전으로 삶과 죽음을 갈라놓을 때 내뱉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라.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의 앞날을 미리 결정함으로써 누구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운명 아닌가. 다른 사람의 운명을 절대자처럼 결정하는 쉬거.

“인생은 매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어느 순간 당신은 선택을 했어. 다 거기서 초래된 일이지. 결산은 꼼꼼하고 조금의 빈틈도 없어. 그림은 그려졌고 당신은 거기에서 선 하나도 지울 수 없어. 당신 뜻대로 동전을 움직일 수는 없지. 절대로. 인생의 길은 쉽게 바뀌지 않아. 급격하게 바뀌는 일은 더구나 없지.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처음부터 정해졌어.”

소름끼치도록 섬뜩한 쉬거의 말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자유로운 총잡이들의 나라 아메리카에는 총기난사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아메리카는 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아닐뿐더러, 어린이나 젊은이들을 위한 나라도 더 이상 아닌 듯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더욱 스산하고 암담하다. 아메리카는 과연 우리의 미래인가.
덧붙이는 말

김규종 님은 경북대 노어노문학 연구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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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코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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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다

    이 영화는 원작소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용에 대한 부분을 코엔형제의 능력이라 이야기하는 건 좀 무리가 있을 것 같네요. 내용의 효과적 전달이나 각색능력 같은 것들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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