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의 살아가는 이야기

더블린에서 런던 지나 체코까지

[김규종의 살아가는 이야기] 따뜻한 음악영화 <원스>를 뒤늦게 보고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빛바랜 창안에 여인이 망연히 앉아있다. 창밖을 힘없이 응시하는 그녀에게서 애수와 그리움이 흠뻑 묻어난다. 방금 피아노 연주를 마친 그녀 가슴속에 무엇인가 잔잔하지만 강렬하게 꿈틀거리는 게 있는 듯하다. 오래도록 숨을 참으며 어디 먼 곳을 보는 그녀에게서 슬픔과 아련한 향수가 묻어나온다. <원스> 마지막 장면이다.

뒷북을 쳐도 너무 늦게 치면 욕먹기 딱 좋다. 그래도 “아주 안 가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가는 게 낫다”는 러시아 속담에서 용기를 낸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구한다. 작년 추석 무렵 개봉한 영화 <원스>를 세 번째 계절에야 비로소 만났다. (대구에서는 지난겨울 ‘동성 아트홀’ 딱 한군데서 개봉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게을러서 가지 못하였다.)

<원스>는 많은 화제를 몰고 다니는 영화다. 3주 만에 1억 원도 들이지 않고 만든 저예산영화. 아일랜드의 인디밴드 리드보컬 출신 초짜 영화배우 글렌 핸사드. 그와 함께 작업한 스무 살 난 체코 출신 여가수 마르케타 이르글로바. 개봉한지 반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볼 수 있는 영화. 4만장 가까운 오에스티 (OST) 앨범이 팔리는 전설을 남기고 있는 영화.

어느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재미난 통계자료가 있다. <원스>를 추천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 숫자다. 추천에 904명, 반대에 39명. 나는 이렇게 압도적인 찬성표가 나오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고, 다시 한 번 영화를 찬찬히 되짚어보고자 이 글을 쓴다. 마르케타의 노래 <당신이 날 원한다면 If you want me>을 들으면서.

노래와 삶이 조화로운 영화

거리에서 노래하는 가수 글렌 핸사드. 그는 10년 세월 사랑했던 여인을 잃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낮에는 유명 가수들의 노래를 부르고, 밤이면 자기가 만든 노래를 한다. 인적이 거의 끊긴 밤거리에서 홀로 노래하는 그가 적잖게 안쓰러워 보인다. 노래 말고도 그는 고장난 진공청소기를 수리하는 일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에게 어린 여인이 다가선다. 겨우 10센트 주고 노래를 신청하는 그녀가 마르케타 이르글로바다. 꽃을 파는 여인 마르케타. 바이올린 악사였던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던 체코 여인. 그녀는 핸사드의 음악을 이해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청중이다. 핸사드 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가슴에 품은 여인 마르케타. 그녀의 눈이 참 맑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더블린 거리에서 그렇게 만난다. 가난하지만 맑고 투명한 영혼을 가진 그들. 그들에게 음악은 삶의 위로이자 청량제이며, 꿈이자 목표다. <원스>를 보다가 자연스레 임순례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떠올랐다. 음악만 꿈꾸다가 장렬하다 못해 비참하게 몰락해가는 상우를 통해 지독하게 자학적인 미학을 선보였던 임순례.

<원스>의 그들은 상우와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장미를 팔고, 청소기를 수리하면서도 그들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자기들만의 노래를 만들고, 그것을 세상과 소통시키려고 백방으로 애쓰는 그들은 아름답다. 끝없는 추락과 패배를 고스란히 감수하면서까지 현실에 투항하는 상우와는 딴판이다. 그래서 <원스>는 슬프지만 힘 있는 영화다.

아일랜드와 체코가 더블린에서 만났을 때

<원스>를 풍성하게 하는 것은 역시 노래다. 노래의 힘은 곡도 중요하지만, 가사에도 방점이 찍힌다. 나 같은 음악 문외한은 노랫말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어디 하나 버릴 게 없는 노래가 객석을 뒤덮는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음악과 사람과 사랑을 숨죽이며 들여다보는 관객들의 숨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이쯤에서 아일랜드와 체코를 생각한다.

여러분은 아일랜드에서 무엇을 떠올리시는가.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인가, 아니면 아일랜드 공화국 군대인 IRA인가. 나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와 극작가 존 밀링턴 싱을 떠올린다.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훗날 독립국가 아일랜드의 원로원의원을 지낸 예이츠. 그런 시인과 극작가가 있는 나라가 아일랜드다.

체코는 어떤가. 1990년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로 회귀한 나라. 슬로바키아와 연방제를 하다가 1995년 평화롭게 분리한 나라 체코. 반체제운동과 인권운동을 전개하면서 체코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극작가 뱌츨라프 하벨이 있는 나라. 하벨은 새로운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고, 1995년 분리된 이후 체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시인과 극작가들이 세상의 중심에 서있는 나라 아일랜드와 체코. 그들의 후예 글렌 핸사드와 마르케타 이르글로바가 더블린 거리에서 만난 것이다. 그래서 <원스>는 남자와 여자, 원주민과 이주민, 서유럽과 동유럽, 기타와 피아노가 손에 손을 맞잡은 영화다. 그들의 화음과 눈길이 교차할 때 객석에는 작은 한숨소리가 터진다. 환청이나 탄식처럼.

그들의 얼굴

사람의 얼굴은 많은 것을 말한다. 그가 살아온 내력도, 살아가는 방식도, 그의 미래까지도 얼굴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얼굴에서 눈은 가장 많은 것을 드러낸다.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절대로 속일 수 없는 눈의 표정. 그래서 우리는 말할 때 상대방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말하는 것이다. 우울하거나 거짓말할 때를 빼면.

<원스>의 두 사람 얼굴은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가올 날들을 온전하게 드러낸다. 아주 편안하고, 다정하며, 부드러운 얼굴들이 화면에 가득하다. 그 가운데 한 장면.

마르케타가 틈나면 들어가서 피아노 치는 집이 있다. 핸사드를 이끌고, 고장난 청소기를 끌면서 마르케타가 가게로 들어선다. 피아노 앞에 앉아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는 마르케타. “늘 배고프다”던 마르케타 얼굴이 물든 단풍잎처럼 고요하고 환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핸사드의 눈망울과 표정은 어떤가. 천상의 소리를 듣는 자의 얼굴 아닌가.

그런데 그들만 그런 게 아니다. 청소기 수리점을 운영하는 핸사드의 아버지. 손녀딸 이본느를 돌보며 집안 살림하는 마르케타의 어머니. 그들의 집으로 텔레비전 보러 오는 체코 출신 이민자들. 핸사드처럼 거리에서 연주하는 악사들. 하다못해 음악을 녹음하는 작업장의 프로듀서까지. 그들 모두의 얼굴은 아일랜드와 체코의 부드럽고 편안한 얼굴이다.

<원스>는 이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거기에는 사랑의 아픔도 있고, 이별의 슬픔도 있으며, 고단한 일상의 피로와 그늘도 있다. 아주 가난한 현재의 삶도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꺾이지도,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삶의 한가운데로 똑바로 걸어들어 간다. 그래서 영화가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언제쯤 우리는

그렇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쯤 우리도 저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나 <천년학>은 좋은 영화다. 하지만 판소리는 더 이상 우리네 정서를 담아내지 못한다. 대중과 무관하게 소수의 마니아를 위한 귀족음악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는 들을만한 창작곡이 없다. 실연의 상처에 소금 뿌리는 노래들로 그득하다. 우울한 눈물과 한숨이 독한 소주와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유령처럼 끈질기게 떠도는 영화 아니던가.

그렇다면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아마데우스>는 어떤가. 혹은 <오페라의 유령>이나 <카핑 베토벤>은 또 어떤가.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영혼과 육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쁨과 슬픔, 시간의 질주와 불가능한 저항이 노래와 춤, 오페라와 만나는 영화. 그럴 때 우리는 뮤즈와 만나거나, 생의 감춰진 비의를 오래도록 생각하는 것이다.

왜 우리에게는 <원스> 같은 영화가 없는 것일까. 음악영화를 만들 만한 가수나 감독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우리에게는 시인이나 소설가, 극작가가 없다.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드러내고, 치유하며 세상과 만나게 해주는 사람들이 아주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들이 아직도 그늘에, 어둠 속에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중심에는 돈이 자리한다.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은 돈에서 비롯하여, 돈을 지나서, 돈으로 끝난다. 아직도 우리는 문학과 예술에게 완전한 제자리를 찾아주지 못하고 있다. 거리에 서면 사람들은 음악과 미술, 건축을 보고 듣지 않는다. 시인의 쓸쓸한 뒷모습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쫓는다. 도저히 잡히지 않는 나폴레옹의 무지개처럼.

그래도 희망을 가져보기로 한다. 허기가 가셔야 세상이 바로 보이는 법이니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 허다한 예술혼을 배출한 우리 조상님들 아니셨는가. 그러니 조금 더 인내하면서 기다리기로 한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원스>를 예찬하노니, 아직 보지 않은 분들은 서둘러 왕림하시기 바란다. 밀루유 테베! (너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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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 원스 , 더블린 , 마니아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뱌츨라프 하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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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바라기

    잘 봤습니다.
    생각하게 하네요.

  • hill

    잘 읽었어요~~많이 공감 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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