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토가 한일 두 나라의 친선을 저해하고 동양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이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지, 자객으로 그를 살해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이등 박문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결연한 의사표명이다. 안중근은 러일전쟁 (1904~1905) 때까지는 ‘일본맹주론’을 주장하였다. <경시청신문>에서 그는 “동(東)으로 뻗는 서방세력의 침략에 대응해 동양은 일본을 맹주로 하고 조선, 청국과 정립(鼎立)하여 평화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백년대계를 그르칠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황인종이 백인종에게 승리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안중근이 주장했다고 알려진 ‘동양평화론’은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 폭넓게 퍼져있던 사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동양평화를 깨뜨리면서 조선을 병탄하는데 혈안이었고, 러일전쟁 후 조선과 대륙침략을 노골화한다. 안중근은 일본의 배신행위와 조선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최후의 방법으로 이등 박문의 사살을 선택한다. 동양평화에 대한 안중근의 구상은 옥중에서 고등법원장에게 밝힌 5개조에 담겨 있다.
“첫째, 여순(麗順)을 삼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고, 삼국이 이곳에서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한다. 둘째, 삼국공동의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화폐를 발행한다. 셋째, 삼국공동의 군대를 편성하고 타국의 언어를 가르친다. 넷째, 한국과 청국은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한다. 다섯째, 한ㆍ청ㆍ일 3국의 황제가 로마교황을 방문해 협력을 맹세하고 왕관을 받아 세계인의 신용을 얻는다.”
우리는 의병장 안중근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사형집행을 목전에 두고 ‘동양평화론’을 구상한 평화주의자 안중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조선과 청나라, 일본으로 이루어지는 동아시아 3개국의 공존공영을 추구한 ‘동양평화론’ 구상은 웅대하고 장쾌한 것이다. 서구열강의 동양침략이 일상화되던 시기에 동양 삼국이 상호 연대하여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격파하려는 의지가 ‘동양평화론’에 생생하게 담겨있는 것이다.
공용화폐와 공동의 군대, 상대국 언어교육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안중근은 삼국을 하부구조로 두는 거대한 공동정부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그 위세를 떨치고 있는 ‘유럽연합’ 구상과 전혀 동일한 궤적을 가지는 것이다. 걸출한 의병장이자 뛰어난 평화주의자이자 전략가로서 안중근의 면모가 약여하게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2009년 8월 30일 일본 총선거에서 50여년 넘게 유지돼온 자민당 지배체제가 종식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이루어진 정권교체였다. 총리로 지명된 하토야마 유키오는 미국과 대등한 외교를 주장하고, 한국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대륙과 보다 근원적인 대화와 관계설정을 천명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이다. 이것은 멀리는 안중군의 ‘동양평화론’에 뿌리를 두는 것이고, 가까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일본 제국주의가 선언한 ‘대동아공영권’의 아류(亞流)일 수도 있다.
21세기 세계는 자연국경과 언어, 종교와 민족을 초월하는 초국가 시대의 양상을 보여준다. ‘유럽연합’은 물론이려니와 ‘메르코르수르’ (남아메리카), ‘아세안’ (동남아 10개국), ‘아프리카해방동맹’, ‘북미자유무역협정’ (미국, 캐나다, 멕시코 3국) 등이 그것이다. 영토와 문화, 역사로 묶여있던 개별 국민(민족)국가의 견고한 장벽을 넘어서 공동의 번영과 안녕을 추구하는 지역공동체 건설이 세계 곳곳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거나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하토야마 총리의 발언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그 하나는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며, 그 둘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자세이다.
21세기 유일 분단국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남한과 북한이 대립과 반목을 뒤로 하고 평화체제로 이행해야 ‘동아시아공동체’는 가능할 것이다. 공동체 내에 분열과 투쟁을 일삼는 집단이 공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의 역사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거대집단이 분열된 채 더 큰 지붕 아래서 평화롭게 살아가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분단과 질시,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온전한 하나로 ‘국격(國格)’을 먼저 갖출 일이다.
중국은 진시황 이래로 거대한 원심력을 과시해왔다. 그들의 이른바 ‘천하사상’ 혹은 ‘중화사상’은 21세기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티베트와 위구르 지역의 소요로 드러나는 소수민족 문제는 중국의 여전한 시한폭탄이고, 극심한 빈부격차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뇌관이다. 그런 중국이기에 하토야마의 구상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언제고 그들은 막강한 문화와 역사전통을 가지고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동남아시아까지 포섭하려고 들 것은 분명하다. 한반도 통일을 달성하고, 중국을 적절하게 견제하며, 일본을 ‘평화공동체’로 인입하는 작업은 어렵지만 매우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1930년 <대중의 반역>에서 ‘유럽연합’ 구상을 처음으로 밝힌 오르테가 이 가세트보다 20여년 앞서 ‘동양평화론’을 구상한 안중근의 역사를 바라보는 혜안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면서 우리가 당면한 숱한 난관과 과제를 떠올린다. 언제 우리는 제대로 된 나라와 정부와 역사의식과 세계시민의식을 가지게 될 것인지, 그것이 참으로 궁금하다. 혹여 이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을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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