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측의 한미FTA(자유무역협정) 재협상 요구 질문에, 정부가 'Yes!'의 카드를 들었다.
미 무역대표부(USTR)은 지난 16일 미국의 신통상정책을 반영한, 구체적인 협정문 형태의 내용을 한국 정부에 전달하며 재협상을 요구해 왔고, 정부는 19일 경제부총리 주재 하에 진행된 관계부처장관회의에서 재협상에 응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관계부처장관회의에는 부총리를 비롯해, 산업자원부, 노동, 복지, 해수, 환경, 통상교섭본부 장차관 등이 참석했다.
정부는 21일 미 대표단 방한 시, 미 측으로부터 제안 내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청취하고 확인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한 "미국 측이 제안한 노동과 환경분야를 비롯, 7개 분야의 내용은 지난달 10일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발표한 ‘신통상정책’과 유사한 내용인 것으로 파악"했고 "노동과 환경을 제외한 의약품과 정부조달, 투자 등 나머지 5개 분야는 기존 협정문의 내용을 명확히 하는 수준"이라며 정부가 재협상에 응하는 근거를 밝혔다.
정부는 "미 측 제안의 범위나 수준에 대한 잠정 평가, 우리 측에 실질적으로 미칠 영향, 협상의 균형에 미칠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정부의 입장을 정할 것"이라고 덧붙이며, "추가협의는 서두르지 않고 충분한 검토시간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존에 타결한 협상 결과의 균형을 유지해 나간다는 기본원칙을 견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연, 기존협정문을 확인하는 수준인가
한미FTA 미 의회 비준, 필수 코스의 수문장인 샌더 레빈 미 하원 세입위원회 무역소위원장은 일전에“한반도 역외가공지역 위원회(OPZ)’ 조항 삭제"를 요구한 바 있다. 미국이 보낸 재협상 협정문에 'OPZ 삭제'나 '자동차'와 관련핸 내용이 반영되지 있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까.
미국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이후 국내 반대 여론을 이유로 재협상을 진행해 노동과 환경 분야에 관련 부속서를 첨부 시킨 전력이 있다. 재협상은 국내의 독소조항 논란도 '선진화' 정책이라고 포장하는 한국과 달리, 국내 여론을 이유로 자신의 이익을 관철 시키는 미국의 통상협상 전술 중 하나인 셈이다.
지난 5월 협정문 공개 이후, 협정문 속의 독소조항들, 그리고 그간 정부가 의도적으로 은폐해온 독소조항들이 세이프가드 발동 조항, 자동차 배기량 세제 원천 금지, 허가특허 연계의 지적재산권, 투자자국가제소(ISD) 등 관련 조항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가운데 미국측이, 미국의 신통상정책을 반영한 내용을 담은, '협정문 형태'의 재협상 요구서를 한국에 보내왔다. 정부의 말대로 "신통상정책과 유사한 내용"일 순 있으나, "기존 협정문을 명확히 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노동, 환경의 경우 재협상 요구가 있을 것으로 미리 예상했던 분야이다. 현재 한미 양국은 노동과 환경 분야는 효과적 집행에 실패했을 때만 분쟁해결 절차에 회부하도록 하고, 위반국에 벌과금을 부과하고, 이를 위반국의 노동·환경 제도 개선 등을 위해 쓰도록 하는 ‘특별 분쟁해결 절차’에 합의한 상황이다.
그러나 미 측의 요구 내용은 기존 협정문에서 이 조항을 삭제하자는 제안이고, '특별분쟁해결절차'가 아닌 '일반분쟁해결절차'에 적용하자는 것이다.
노동과 환경분과에서 '일반분쟁 해결절차'가 도입되게 된다는 것은 노동, 환경 규정을 위반하면 무역보복의 대상이 되거나 상대국에 금전적 보상을 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한국에 유리한 내용도 아니고, 기존의 조항을 확인한 수준도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조달 분야의 경우도, 당사국이 정부조달 참여 기업에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GPA)에 따라 '근본적인 노동권, 산업 안전보건, 근로시간, 최저임금 관련 수용 가능한 근로조건 충족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자는 내용이 첨부됐다. 기존 협정문에 없는 조건을 추가해서 반영하자는 요구다. 이는 한국 기업의 미국조달시장 참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투자 분야의 경우, '미국내 외국인 투자자가 미국 투자자에 비해 더 강한 보호를 부여받지 않는다는 '역차별 금지'의 선언적 규정을 전문에 반영'할 것을 요구했다. '역차별 금지'의 내용을 '협정 전문'에 반영하라는, 설령 미국에 한국 자본이 진출한다 해도 미국 투자자를 최우선으로 보장하겠다는 정신을 '전문'에 반영해 달라는 것이다.
반면 의약품 제안 내용은 ‘세계무역기구(WTO)의 지적재산권 협정(TRIPS)과 공중보건 선언상 의무’를 확인하는 정신 확인하는 수준에 의미를 두고 있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강제실시, 자료독점과 관련한 주요 내용이 이 선언에 담겨 있음을 두고 이를 유의미하게 평가했다.
그러나 미국의 신통상정책에는 허가특허 연계조항과 같은 독소조항을 삭제하는 긍정적 내용이 포함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요청한 재협상에는 그런 구체적인 내용들은 빠져 있다. 노동,환경, 투자 부문에서의 구체적인 요구들이 들어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행태이다.
현재 정부가 공개한 미 측의 재협상 요구 내용만 봐도, 사실상 단순히 기존의 협정문을 확인한 수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정부가 미 측의 설명을 듣고 추가 판단하겠다고 시간 차를 둔 것은 1차적으로 6월 30일의 서명 기한에 대한 타진, 미 측의 일방적 요구에 대한 한국 측의 요구 반응에 대한 시간 벌기로 해석된다.
한국 정부가 지금처럼 '기존의 협정문을 확인하는 수준'이라고 애써 축소하면서 미측의 요구를 전격 수용하지 않는 이상, 한미FTA 서명과 재협상이 분리 진행될 것이 더욱 명확해진 상황이다. 과연 재협상의 과정과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좀더 지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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