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소가 몰려온다"는 한미FTA 반대 단체들의 경고가 현실화됐다. 농림수산식품부는 18일 미국과의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개정 협상과 관련해 "1단계로 30개월 미만 소에서 생산된 갈비 등 뼈 포함 쇠고기 수입을 허용하고, 2단계로 미국이 국제수역사무국(OIE)이 광우병 교차오염 방지를 위해 권고한 강화된 사료조치를 공포할 경우 30개월 이상의 소에서 생산된 쇠고기도 수입을 허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미국산 쇠고기 시장 개방은 단순히 통상정책의 문제가 아닌 국민건강권과 직결된다. 미국 정부는 자국 쇠고기에 대해 '광우병 위험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를 뒤집는 증거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지난 10일 미국에서는 광우병에 감염된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인간광우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때문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국내 여론도 반대가 압도적이다. 지난 해 말 우윤근 통합민주당 의원이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국민 1천5백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미국산 쇠고기 인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5.3%가 '수입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또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 여부에 대해서도 75.9%가 '안전하지 않다'고 답했고, 7.9%만이 '안전하다'고 응답했다.
"국민건강권 내다 팔았다" vs "한미관계 강화되면 좋은 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한미FTA 반대진영은 이번 협상결과를 '조공협상'으로 규정하며 "정부가 국민건강권을 팔아넘겼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정부가 한미FTA 체결을 위해 미국 측의 쇠고기 수입 개방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했다고 지적했다.
김동원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은 이번 협상 결과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한미FTA 비준에 혈안이 되어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은 눈밖에 내놓았다"며 "국민들의 생명까지 무역거래 대상으로 삼았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이지안 진보신당 부대변인도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확대함으로써 한미FTA 걸림돌을 제거하고 연내비준을 밀어붙일 태세"라며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건강을 방미 선물로 내다 팔았다"고 비판했다.
보건의료단체연합도 논평을 통해 "30개월 연령제한 해제 조치는 아직까지 일본, 중국, 홍콩 등 어떤 아시아 국가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은 조건으로 지금까지 99%이상의 광우병이 30개 월 령 이상의 소에서 발생했다"며 "이런 점을 볼 때 이는 명백한 국민생명의 포기행위"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일본은 20개월 이하로 미국 수입 소의 연령제한을 하고 있고, 30개월 미만의 뼈 없는 쇠고기만을 수입하고 있는 나라도 우리를 포함하여 15개국이나 된다"며 "이런 상황에서 이번 협상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제한 없이 받아들인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국가의 책무를 무시한 행위"라고 맹비난했다.
한편, 한미FTA 반대진영의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이번 쇠고기 협상을 담당한 민동석 농림수산식품부 농업통상정책관은 18일 "한번도 이명박 대통령의 방미 또는 한미FTA를 생각하면서 협상을 해본 적이 없다"며 "내가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내 스스로 협상력을 약화시키는 것일 뿐"이라고 한미FTA와 쇠고기 협상 연계 가능성을 일축했다.
민 정책관은 이어 "쇠고기 문제는 한미 간 신뢰관계를 지난 2년 동안 가장 뿌리 깊게 저해해왔고, 불신을 야기해왔던 요인 중에 하나였다"며 "쇠고기 문제가 해결돼서 전반적으로 한미관계 강화에 보탬이 됐다고 하면 그것 자체로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예고된 굴욕, '실용외교'는 없었다
이번 협상 결과는 어느 정도 예견되어 왔다. 지난 해 6월 당시 한미FTA 협상단 수석대표였던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쇠고기 검역은 FTA 협상과는 별개"라고 자신했지만, 미 행정부와 의회 지도부는 그간 '쇠고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미FTA 비준도 없다'며 다양한 경로로 한국정부를 압박해왔다.
지난 2월에는 웬디 커틀러 미 무역대표부 대표보가 직접 방한해 쇠고기 시장 개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당시 커틀러 대표보는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를 만나 "소고기 시장 개방이 (미 의회의) 승인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키포인트"라고 직접적으로 정부여당을 압박했다.
그러나 한미FTA와 연계한 미국 측의 이 같은 쇠고기 시장 개방 압력에 대한 한국정부 및 정치권의 대응은 무기력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해 온 '실용외교'의 진가는 이번 협상 과정에서는 발휘되지 않았다.
그간 정부와 정치권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미FTA를 조속히 비준해야 한다'는 '조급증'을 대내외적으로 드러낼 뿐이었다. 국민건강권과 관련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 술 더 떠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지난 2월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출석해 "우리 쪽에서 조기에 (한미FTA) 비준을 하는 것이 미국에 압력을 넣는 것"이라며 "한쪽은 했는데, 다른 쪽은 통과시키지 못하면 당연히 압력을 받는다"는 논리를 펴며 한미FTA 비준동의안의 조속한 국회 비준을 촉구하기도 했다.
'한국이 먼저 비준을 해서 미국 의회를 압박해야한다'는 논리다. 심재철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표도 지난 15일 "미국에서 8월부터는 대선체제로 넘어가서 의회자체가 열리지 않게 된다"며 "그래서 우리가 빨리 (한미FTA 비준안) 처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한국정부와 정치권은 '한미FTA 비준'에 '올인'했고, 미국은 철저하게 '한미FTA 비준'을 쇠고기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했다. 결국 과거 노무현 정부가 그토록 부정했던 이른바 '한미FTA의 4대 선결조건'의 하나인 쇠고기 문제는 미국의 요구대로 일단락됐다.
이제 남은 건 양국 의회에서의 한미FTA 비준. 광우병에 대한 위험부담까지 떠안고, 쇠고기 시장을 통째로 내어 주게 됐지만, 과연 한국 정부의 바람대로 미 의회에서 한미FTA 비준안이 일사천리로 통과될 지는 미지수다. 최악의 경우 쇠고기 시장만 먼저 내주고, 미 의회에서의 한미FTA 비준은 실패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과거의 사례나 진행전망, 전략을 종합적으로 본다면 가정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성은 별로 없다"고 잘라 말한 바 있다.
이 대통령, "한미 협상단, 잠결에 합의한 것 같다".. ‘흐뭇’?
한편, 미국을 순방 중인 이 대통령은 이날 미 상공회의소 주최 '최고경영자 라운드 테이블' 자리에서 쇠고기 협상결과를 보고 받았다. 이 대통령은 회의 도중 쇠고기 협상 타결 소식을 참석자들에게 전했고, 함께 자리한 미 재계 관계자들과 수행원들은 박수와 환호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는 "쇠고기 협상이 타결돼 박수를 친 것이 아니라 한미FTA 타결 가능성이 한층 높아져 박수를 친 것"이라고 해명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또 이 대통령은 이날 "양국 대표들이 어젯밤에 한숨도 안 자고 밤을 새서 협상을 했다고 들었다"면서 "새벽에 두 사람이 잠결에 합의한 것 같다"고 농담을 던졌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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