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라고 써져있는 붉은 글씨 위에 삼지창을 들고 눈이 찢어진 사악한 악마를 한 번 쯤은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 혼자 외롭게 투병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모습이 방송에 나갈 때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끔직하다" "자신이 잘못했으니 자신이 책임질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한국에서 에이즈를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죽음과 공포, 혐오를 연상하게 한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누군가에게 '침입'하고 '타격'을 가하며 '점령'한다(Susan Sontag, 1988)라는 표현을 듣는 것은 매우 익숙한 일이다. 무엇보다 나와 내 나라와는 상관없는 질병으로 여겨지고 있고 언제나 타자화되어 다른 사람(집단), 다른 나라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되어 진다. 에이즈가 만들어내는 이런 다양한 은유들은 감염인들이 한국에서 숨쉬는 것조차 버겁게 만들고 있다.
동성애자로서 에이즈 말하기
동성애자로서 에이즈를 말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HIV/AIDS는 동성애 커뮤니티에 전혀 낯선 단어가 아니다. 94년 동성애자 운동이 등장하고 그로부터 11년이 지났지만 에이즈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꼬리표였다. 그것은 동성애=AIDS 고위험집단 이라는 빛바랜 낙인을 지우기 위한 활동들이 동성애 운동에서 여전히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 역시 동성애 운동을 시작하며 에이즈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고,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AIDS 감염인 환자 회원들의 건강과 안부를 묻는 것이 나의 활동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에이즈 환자에 대한 편견과 반인권적인 한국 상황을 뼈져리게 경험한 것도 동성애자인권연대 감염인 회원이 기회질환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면서 부터였다.
하지만 동성애자로서 에이즈 운동을 건설하고 감염인들과 함께 투쟁을 조직하는 문제는 결코 쉽지 않다. 한 보건의료 활동가가 지적했듯이 동성애자들이 감염인 문제를 전면에 들고 나왔을 때 오히려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고착화시키는 역효과가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우려와 아이러니하게 감염인 단체, 개인들이 과연 반길 것인가 - 그것은 아마도 어느 한 사람이 HIV 양성 판정이 나왔을 때 어떤 경로로 감염되었는가에 주목하기 앞서 그가 '동성애자라면' 그럴 수 있지 하며 인정하는 시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분열은 에이즈 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특히 정부가 여전히 고위험 집단을 중심으로 한 예방정책에 단호한 반대를 위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콘돔만이 동성애자들을 에이즈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가?
2004년 11월에 개최된 'AIDS를 바라보는 동성애자의 입장' 토론회에서 동성애 단체들은 한결같이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한 에이즈 예방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미 ISHAP - 한국에이즈퇴치연맹 소속 동성애자 에이즈 예방단체 -과 같이 보건복지부의 지원을 통해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에이즈 예방활동을 전개하는 단체가 존재하기도 한다. ISHAP은 동성애자들에게 50만개 이상의 콘돔을 배포했다고 자신들의 성과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것은 동성애 운동 단체조차도 동성애자 고위험군이라는 논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한 에이즈 예방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에이즈 예방'은 동성애자로서 피해갈 수 없는 주요한 운동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콘돔배포를 중심으로 한 에이즈 예방운동의 패러다임은 변화되어야 한다.
첫째, 정부와 동성애자 운동단체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한 콘돔배포가 필요하다고 공통된 주장을 하고 있지만 이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동성애라는 성정체성을 항문성교라는 성행위와 동일시하며 동성애자들을 고위험군 규정한 정부정책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편견과 낙인을 고착화시킬 뿐 근본적인 에이즈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구집단 1%의 사람이 폐암에 걸릴 위험이 있다고 역학적으로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수치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위험 그 자체로 인식하게 된다. 즉 정부의 에이즈 예방정책은 위험한 사람들과 일반대중 사이 경계를 형성하고 소수 위험집단은 좀 더 다르게 혹은 특별히 취급되어야 한다고 하는 인식을 만든다. 반면 Grossman의 『Homophobia : A cofactor of HIVdisease in gay and lesbianyouth』을 보면 反동성애적인 사회 환경으로 인해 노출될 수 있는 위험요인들( 사회적 고립, 소외감, 절망, 자살, 약물과 알콜 등 )이 그들로 하여금 HIV 더 쉽게 노출될 수 있다고 하였다.
둘째, 라이프스타일만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만으로 동성애자들을 에이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비켜가는 것이다. 콘돔은 에이즈 예방활동의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콘돔에 대한 강박증은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만을 변화시킨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1980년 초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고 사회보수화를 추진한 미국에서 에이즈라는 무기로 동성애자 집단을 공격하였을 때 지배계급들은 동성애자들의 라이프스타일만을 문제 삼았다. 그것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 동성애 단체들이 택한 주요 활동은 상담을 하고 콘돔을 권장하는 캠페인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에이즈에 대한 공포심은 자살로 이어졌고, 성관계가 단순한 성교가 아닌 일종의 연쇄로 취급되어 성에 대한 극심한 보수화가 추진되었다. 이후 미국의 동성애자들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89년 Act-Up과 같이 동성애자를 중심으로 한 전투적인 에이즈 운동 단체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택한 첫 행동은 정부의 올바른 에이즈 정책을 촉구하며 벌인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봉쇄한 항의행동이었다.
그동안 사회보수화가 추진될 때마다 동성애자와 같이 사회적 약자들은 에이즈라는 무기로 꾸준히 공격받아왔다. 이주노동자들은 감염사실이 확인될 때마다 강제 추방되어야 하고, 성매매여성들은 본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강제검진을 받아야 한다. 동성애자 역시 AIDS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같은 현실은 콘돔을 쓰자는 캠페인이 벌어질 때도 마찬가지다.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이 그동안 콘돔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모든 동성애자들이 콘돔을 사용한다고 해서 정부가 동성애자를 고위험군으로 규정한 예방정책은 철회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에이즈를 동성애자들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매우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이 진정으로 에이즈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섹스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反동성애적인 사회 환경을 변화시키는 활동을 확대해야 한다.
소수자운동에서의 연대의 의미
'당신은 AIDS 감염인이 될 수 있는가?'
당신은 AIDS 감염인이 될 수 있는가? 이 말은 당신이 반드시 AIDS 감염인 이어야만 AIDS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AIDS 감염인들에 대한 공격이 강화되었을 때 비감염인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방어하는 것은 매우 소극적인 행동일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2005년 이화여대 동성애자 모임이 학교에서 문화제를 개최하려 했을 때 보수기독인들은 노골적인 반대행동을 벌였다. 많은 이화 동성애자들은 아웃팅 문제로 전면에서 이들과 싸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화이성애자들 - 여기에 한기연 등 진보적인 기독인들이 함께했다. - 을 중심으로 한 동성애 방어 캠페인이 학교에서 벌어졌고 기독인들과의 논쟁에서도 '내가 동성애자다' 라고 강조하는 효과적인 주장으로 많은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성소수자와 마찬가지로 AIDS 감염인들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까 무척 두려워한다. 성소수자 운동에서도 이성애자들의 지지는 성소수자들로 하여금 자신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며 조금씩 거리로 나오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에이즈 운동을 건설되어 지는 지금 비감염인들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다.
감염인, 이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운동의 중심에서 배제한다면 운동의 성장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빈곤한 사람들만이 운동에 설 필요는 없다. 장애인 운동을 성장시키는데 비장애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이주노동자들이 투쟁에 한국노동자들의 연대는 매우 필요하며 효과적이다. 만약 당신이 질병을 가진 환자들의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과감히 "난 AIDS 감염인이다! 그래서 어떡하겠다는 건데?" 라고 과감히 외쳐라!
반격하라! 에이즈
' 인권을 말하기 시작한 감염인들'
2003년 한 감염인 단체가 발족할 때 초대를 받아 찾아간 적이 있다. 10명 남짓한 감염인들과 천주교 수녀, 신부님들이 자리한 그 자리에서 한 감염인에게 단체명에 '인권'이라는 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모임 회원들과 발족하기 전 단체명에 대한 토론을 하고 여러 관계자들에게 조언을 들었는데 현실과 맞지 않아 뺐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한국사회가 가지는 AIDS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이 감염인, 환자 스스로에게 나는 '비윤리적이고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이라고 최면을 걸고 자신의 병력으로 인해 가족, 사회로부터 버림받는 현실은 나의 잘못이기 때문에 응당 치러야 할 댓가로 여기게끔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권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이 사회를 살면서 감염인, 환자들에게 '인권'이라는 말은 절대 꺼내지 말아야 하는 금지된 언어와 같았다. 하지만 최근 보건복지부의 병력정보 제공 계획 철회를 위한 투쟁에 감염인, 환자들은 투쟁의 주체로 서기 시작했다.
비록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착용해 실물을 전혀 알아볼 수 없게 행동에 참여하고 있지만 한국감염인연대, 한국감염인협회, LOVE4ONE, 세울터 등 감염인 단체들은 질병관리본부 앞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직접 준비해온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질병관리본부 방역센터장과의 면담도 성사시켰다. 2005년 12월6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개최된 기자회견에서도 10명 남짓한 감염인들이 참여하였고 거리캠페인과 단체회원들에게서 받은 222명의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것은 매우 큰 성과이다. 에이즈 인권모임 나누리+ 활동가들 - 나누리+는 대표를 제외하고 2004년 에이즈 운동에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비감염인 중심의 단체이다. 2005년 꾸준하게 감염인 단체들과의 접촉하며 '진료거부'에 관한 문제를 사회적으로 폭로하였고 많은 감염인들과 소통하기 위해 감염인 캠프 - 비록 관변단체가 준비하기는 하였지만 - 에도 참여하였다. 에이즈운동의 불모지와 같은 한국에서 비감염인들의 헌신적인 에이즈 운동 건설 노력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 의 헌신적인 노력과 감염인 단체들의 적극성이 없었다면 3일 만에 222명을 모으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어쩌면 한국에서 감염인, 환자들이 참여하는 에이즈 운동 자체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자신의 건강 상태와 생계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감염인들에게 추운 겨울날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곤욕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감염인들의 적극적인 연대는 그들을 꿈틀거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감염인으로 살아오면 겪었던 차별의 경험과 그에 대한 분노가 끓기 시작했고, 인권이라는 말을 당당히 구호로 외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처한 현실을 토론하고 단체마다 회원들을 설득하는 지금의 모습은 앞으로 에이즈 운동이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2005년 11월25일에 개최된 나누리+ 주최 에이즈 토론회에서 한국감염인연대(.KANOS) 사무국장은 '병원을 생명수와 같다'고 하며 진료조차 거부당하는 현실을 폭로했다. 에이즈운동을 한국에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연대'라는 생명수가 필요하다. 병력정보 계획 철회를 위한 진정서에 비록 222명이 참여했지만 이는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2천명이 되고, 2만명이 되었을 때 여전히 숨어서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감염인들은 자신의 인권을 위해 투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반격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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