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불편한 차베스

[칼럼] 차베스와 볼리바리안 혁명

체 게바라가 1960년 평양을 방문했던 것처럼, 1999년 차베스는 한국을 방문해 김대중과 만났다.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모른다. 하지만 김대중은 차베스의 친구가 아니었다. 적어도 차베스의 관점에서 미국 제국주의의 똘마니였다. 농담 삼아 가정해서 김대중이 차베스의 동맹자가 됐다면, 아마도 한국 운전자들은 지난 10여 년간 반값 석유를 즐겼을지도 모른다.

왜곡과 편파로 점철된 한국의 언론과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대중에게 차베스는 먼 나라의 돈키호테 같은 독재자였다. 그의 돌발적 언행은 국제뉴스보다는 해외토픽의 단골코너였고, 그의 죽음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흥밋거리로 다룰 뿐이다. 이른바 진보언론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차베스가 그다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자 정치지도자이기 때문이다.

[출처: http://links.org.au 화면 캡처]

문제적 인간 차베스

우고 차베스보다 더 많은 적을 가진 정치적 지도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정권을 빼앗긴 베네수엘라 기득권세력은 그들이 소유한 언론을 통해 차베스를 악마화 했고, 미국 정부 역시 뒷마당을 빼앗은 차베스를 용서하지 않았다. 다만 물리적 증거가 부족해서 악의 축, 테러국가에 포함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게다가 쿠데타 전력을 가진 군인출신 정치인의 이미지는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보다는 포퓰리즘 선동정치인에 어울리기에, 역대 미국정부는 교묘한 이미지 조작으로 차베스를 독재의 화신으로, 선동정치인으로 몰아붙이는 국제적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차베스가 누구인가? 그는 기죽지도 않고 주눅 들지도 않고 미국과 신자유주의에 맞섰다.

개인으로서 차베스는 지금까지 어떤 역사책에도 존재한 적이 없는 스타일의 인간이었다. 군인이 혁명가의 길을 선택한 것은 다른 사례가 있다고 해도, 쿠데타의 실패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책임을 감당하면서 대중적 아이콘으로 등장했고, 정치나 운동에 아무 연고 없이 맨몸으로 나서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모두 예외적인 사례였다.

그리고 집권 후 대통령으로서 그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미국이든 주변국 우파정권이든 가리지 않고 부딪혔고, 거리의 민중과 함께 수다 떨고 노래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에게 자기 생각을 떠들어댔다. 과두세력의 언론독점으로 유일하게 이용 가능한 국영방송에서 대중과 소통할 기제로 ‘알로 프레시덴테(안녕, 대통령)’라는 프로를 만들어 몇 시간 동안 대중과 대화했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민중과 볼리바리안 혁명의 지지자들을 제외하면 좌우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제기하고 갈등을 만드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그는 반란자였고, 혁명가였다. 발로 뛰면서 사회를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켰다. 그의 생애 58년은 단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이 그렇게 흘러갔고, 이 에네르기 덩어리의 막강한 육체적 활동력은 오직 암세포만이 중지시킬 수 있었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와 라틴 아메리카의 계급투쟁, 사회변혁의 과정과 함께 변화하고 성장했다. 차베스의 적들은 볼리바리안 혁명과 21세기 사회주의를 끊임없이 폄하했지만, 차베스는 1998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제3의 길 노선에서 출발해서, 2002년 쿠데타, 석유사보타지, 2003년 소환투표에 이르는 투쟁의 과정에서 대중과 더불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진화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21세기 사회주의 프로젝트로서의 '볼리바리안 혁명'이었다.

돈키호테 차베스가 이룩한 변화들

우고 차베스의 개인적 스타일을 넘어, 그는 베네수엘라 민중과 함께 거대한 역사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이후 차베스 없는 볼리바리안 혁명의 운명과 관계없이 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첫째, 차베스 혁명은 기존 정치체제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푼토피호 체제(1958년 형성된 연합정치)의 두 주역인 좌우 정당(민주행동당AD과 기독사회당COPEI)은 흔적 없이 소멸했고, 새로운 정치지형이 창출됐다. 이른바 야당은 누구인가? 기존 제도정당의 잔당들과 그 주변세력의 잡탕이며, 미국과 석유수입에 기생하여 현재의 부를 유지하는 세력들이다.

둘째, 차베스혁명은 20세기 좌파의 딜레마였던 선거혁명 불가능론을 불식시켰다.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피노체트 쿠데타로 붕괴하자, 전세계 좌파는 선거혁명 불가능론을 설파했고, 제도정치에 갇힌 좌파 역시 선거를 통한 혁명적 좌파의 집권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1998년 대선부터 2012년 대선까지 차베스는 박빙의 표차이로 실패한 2008년 개헌 국민투표를 제외하면, 모든 선거와 투표에서 승리했다. 오히려 이른바 야당세력이 선거무용론의 옹호자가 됐다.

셋째, 차베스혁명은 미국의 전매특허인 반동쿠데타를 뒤집었다. 2002년 쿠데타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와 전세계를 휩쓸었던 CIA 주연의 정권교체 드라마의 반복이었지만, 1998년에서 2002년에 이르는 동안 투쟁으로 각성한 베네수엘라 민중의 힘으로 차베스를 미라플로스 대통령궁으로 복귀시켰고, 이는 쿠데타가 더 이상 반동적 우파와 제국주의의 무기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 역사적 사례였다. (2008년 온두라스와 2010년 파라과이의 쿠데타는 이 흐름의 역전시킨 불행한 사례이다.)

넷째, 차베스혁명은 베네수엘라의 국경 안에 머물지 않고, 라틴아메리카의 반제국주의 범 라틴아메리카주의를 부활시켰다. 1967년 체 게바라의 사망으로 사라진 라틴아메리카 해방의 꿈이 현실로 등장했고, 특히 ALBA(라틴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바르 대안), 방코델수르(남미은행), 텔레수르(중남미 텔레비전 방송네트워크) 등 미국의 뒷마당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자주적 발전의 길을 위한 토대가 닦였고, 정치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고립에서 탈피한 쿠바와 함께, 볼리비아,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등 역사적 좌파정권의 등장과 라틴 좌파블록이 형성되는 역사적 성과도 낳았다.

다섯째, 차베스혁명은 전세계적으로 반신자유주의-반제국주의의 선봉이었다. 특히 9.11 사태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서 반신자유주의-반제국주의 블록의 형성에 차베스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난 15년간 차베스의 등장과 함께 베네수엘라가 경험한 정치사회적 변화는 전지구적 신자유주의의 전일적 지배구조 아래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포스트 냉전체제의 미국중심의 패권구도 아래서 거의 유일한 진보적 변화이며, 그 중심에 차베스와 볼리바리안 혁명이 있었다.

[출처: http://aporrea.org]

좌파에게도 불편한 차비스모(Chavismo)

자칭 좌파들에게도 차베스는 불편한 존재였다.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일삼고, 특히 리비아의 카다피나 이란의 아마디네자드와 동맹을 맺어 미국에 맞선 차베스의 현실주의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더욱이 21세기 사회주의란 이름으로 좌파의 라이선스마저 가져가자 적지 않은 좌파들이 분노했고, 격렬한 논쟁이 불붙기도 했다.

골방 극좌파들은 차비스모가 포퓰리즘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자랑스럽게 제국주의의 편에 가담했다. 차베스의 반노동자적 작태를 폭로하고, 21세기 사회주의가 개량주의라는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압도적으로 차베스에게 표를 던지는 베네수엘라 대중이 언젠가 사이비 사회주의세력인 차베스정권을 타도할 투쟁에 나설 것이라는 극히 주관적인 소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차베스와 차비스모(차베스 사회주의)에 대한 좌파적 비판이 모두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좌파가 국내외적으로 이론과 실천에서 정체하고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베네수엘라의 혁명은 기존의 이론적 프레임으로 설명하기 힘든 수많은 딜레마를 제기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마치 준비된 전위가 일사분란하게 계급투쟁과 봉기를 수행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반동계급을 숙청하는 1917년 시나리오의 반복에만 기대하는 것은 스스로 유토피아적 망상병자임을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볼리바리안 혁명은 차베스 개인에 대한 의존, 주체로서의 조직/당의 문제, 사회주의적 재편전략 등에서 많은 한계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그 자체로 고정된 한계라기보다 진행 중인 혁명의 과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차비스모에 대한 비판의 상당 부분은 마치 천재 칼 맑스가 20세기 자본주의를 잘못 예측했기 때문에 오류라고 비판하는 것처럼, 근거 없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며, 오직 하나의 해결책과 답이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 맹신을 가정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좌파운동 역시 자유롭지 않다. 1991년 쿠데타 당시 혁명군과 협력하기로 했던 민간 운동세력은 거사 당일 잠수를 탔고, 1994년 석방 이후 차베스는 모든 운동세력에게 협조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1998년 대선에 돌입하면서 차베스가 유력한 후보로 등장하자 일부 세력이 동참했지만, 혁명 이후의 과정에서도 이른바 전통적 좌파는 대중운동의 성장 속에서도 성장하지 못했고, 베네수엘라 통합사회주의당(PSUV) 안팎에서 또는 심지어 야당진영에서 소수파로서 존속하고 있다.

죽어서도 불편한 차베스

삶과 죽음의 문제는 언제나 난해하다. 우고 차베스 프리아스의 육체적 죽음이 베네수엘라 사회에, 라틴 아메리카에, 전세계에 어떤 파장을 가져올까?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반동세력은 그의 죽음에 기뻐한다. 그 반대편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혁명수호를 외치는 차비스모의 지지자들이 있다. 그 사이에서 혼란스런 감정으로 침묵하는 다수가 있다.

운동과 현실정치를 넘나들면서, 베네수엘라 사회와 라틴 아메리카를 뒤흔든 돈키호테는 죽어서도 불편한 존재다. 만약 볼리바리안 혁명이 실패하고 과두적 반동세력이 복귀해서 그가 이룩한 성과가 사라진다면? 아마 그 때에는 차베스의 힘과 성과가 가시적으로 실체화될지도 모른다.

차베스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는 죽어서도 죽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문제적 인간이다. 어떤 면에서 우고 차베스는 육체적 소멸로 볼리바리안 혁명에 새로운 과제를 던져준 것 같다. 외형상의 변화나 지표가 아니라 지난 15년간 형성되어 단련된 민중권력이 베네수엘라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고, 설사 혁명이 단기적으로 실패한다고 해도 차비스모의 기억은 차베스에 의해 시몬 볼리바르가 부활하듯이 해방과 혁명의 신화로 끊임없이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항상 불편하다. 지배엘리트를 생산하는 공장인 한 국립대학의 교훈이 ‘진리는 나의 빛’(verita lux mea)인 상황에서, 상아탑 속의 진리는 사기다.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진실은 대면해야 한다. 차베스와 볼리바리안 혁명은 지구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연결되어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추모나 평가가 아니라, 공동의 과제로서 21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치열한 모색과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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