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철거민 정영신 씨가 맞는 추석

법정에서 남편과 사탕 주고받는 8개월 생이별 이야기

“휴정하겠습니다. 오후 재판은 2시 30분부터 하겠습니다”
한양석 부장판사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방청객들은 법정 밖으로 나가는 피고인들의 손을 잡기 위해 방청석 앞으로 나간다. 교도관 사이로 정영신 씨와 이충연 씨는 사탕을 주고받는다. 30일 용산 참사 재판에서 정영신 씨는 이충연 씨에게 조그만 비타민C와 사탕을 받았다. 감옥 안에서 가져온 사탕은 밖으로, 밖에서 가져온 사탕은 안으로 들어간다. 결혼 하고 8개월 만에 생이별을 한 둘은 그 후 8개월은 법정과 감옥에서 만났다. 둘은 사탕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충연 씨는 지난 1월 20일 용산 철거민 망루 진압 당시 철거민 대책위원장이었다. 그는 그 사건의 주동자로 구치소에 있다.

공판이 시작되면 정영신 씨는 남편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재판을 꼼꼼히 기록하느라 맨 앞자리에 앉지만 그래도 좀 더 남편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둘은 가끔 눈이 마주치면 눈짓과 손짓으로 마음의 대화를 한다.

정영신 씨는 그렇게라도 신랑을 보니 좋다. 처음엔 물도 전해 줬는데 지금은 법정에 물을 반입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도 사탕이라도 줄 수 있고 얼굴을 볼 수 있어 좋다. 헤어진 지 8개월이 됐는데 더 애틋해졌다. 남편의 몸도 많이 좋아져서 안심이다. 정 씨는 남편이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감옥 안에서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남편이 수면제를 먹는다는 얘기를 듣고 밖에 나오면 할 일도 많은데 약에 의존하지 말고 운동 열심히 하라고 당부했다. 그녀는 거의 매일 용산 투쟁이 없으면 남편 면회를 간다.

30일 재판은 추석을 앞둔 마지막 재판이었다.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법정에 찾아온 가족들에게 ‘추석 잘 쇠라’고 웃으면서 격려의 말을 던지고 간다. 가족들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법정을 나선다.

  지난 26일 추모제에서 추모 영상을 보다 눈물을 흘리는 정영신 씨

이충연 씨는 재판을 앞두면 잠을 잘 안 온다. 그래서 수면제를 먹기도 한다. 경찰특공대의 살인적인 진압이 있고난 후 8개월 내내 화재로 인한 고통 때문에 진통제를 복용해 왔다. 그는 법정에서 항상 웃는 얼굴을 보여 준다. 그는 체구가 작았고 오른쪽으로 6:4 가르마를 해 단정했다. 돌아가신 아버지 고 이상림 씨의 장례를 치루지 못해 검정색 양복에 흰 와이셔츠, 검정 넥타이를 하고 왼쪽 가슴엔 근조 리본을 달았다. 양팔엔 목발을 짚고 서울중앙지법 311호 피고인석에 앉는다. 30일 날 부인 정영신 씨는 그가 앉은 곳에서 10시 방향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아내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언이 나오면 환하게 웃거나 손짓이나 눈짓으로 말을 건다.

그는 지난 1월 20일 용산의 남일당 건물 옥상의 망루화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불붙은 망루에서 뛰어내린 후 물구덩이에 박혀서 살았다. 그가 떨어진 곳은 레아 호프 방향 모서리 부근이었다. 그가 어느 순간 눈을 떠 보니 바로 앞 축대가 새 빨갛게 달궈져 있었다. 죽을 것 만 같았다. 머리를 쳐 박고 정신을 잃었다.

부인 정영신 씨는 특공대가 망루에 진입할 때 남일당 옆 레아호프 3층에 있었다. 그러다 망루 밑에서 연기가 나서 사람들이 떨어지는데 신랑이 보이지 않았다. 아차 싶어 놀라 뛰어 나갔다. 시어머니 전재숙(고 이상림 씨 부인) 씨는 아들이 죽은 것 같다고 했지만 침착하라고 어머니를 달랬다. 시어머니는 울다 곧 실신했다. 정 씨는 참사현장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경찰과 싸웠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아무도 남편의 행방을 모른다 했다. 그래도 우리 신랑을 살았을 거다. 워낙 작은 체구라 어떻게든 탈출했겠지. 실 낱 같은 희망을 품었다. 그러다 누군가 중대 병원으로 갔다는 말을 해 병원에 달려갔다. 그녀는 누워있는 신랑을 봤는데 진짜 죽은 줄 알았다. 옷을 벗겼는데도 살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죽겠구나 싶었다. 그런 신랑이 살아났다.

이충연 씨는 한 소방관 때문에 살았다. 불타는 망루 옆에 정신을 잃고 있다가 “여기 망자가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소방관들이 그가 죽은 줄 알고 그를 들 것에 묶어 내려갔다. 한 소방관이 그의 가슴을 만져보고 나서 “이 사람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병원에 급하게 실려 왔다.

그러나 정영신 씨의 시아버지 이상림 씨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끝내 시아버지 생사가 확인이 안 되자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 정영신 씨가 기억하는 시아버지 이상림 씨는 10월에도 계곡물에 한 시간씩 수영을 할 정도로 건장했다. 추진력이 강하고 의협심도 강했다. 그래서 시아버지는 걱정도 안했다. 수배자라서 경찰에 잡혀 조서를 받으러 갔을 거라 생각했다. 설마 돌아가실 줄은 생각도 못했다. 시아버지 시신을 봤을 때 정 씨는 “우리 아버님이 아니다. DNA검사를 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의식을 차린 남편도 뉴스를 보고 “뛰어내리면 산다는 것을 아는데 죽었다니 말이 안 된다”고 믿지 못했다.

그렇게 남편 이충연은 죽다 살아났다. 결혼한 지 8개월 만에 죽다 살아난 남편은 병원에서 경찰에 잡혀갔다. 그리고 구치소에 들어가 생이별을 한지 벌써 8개월이 흘렀다. 그러나 정영신과 이충연은 법정과 감옥에서 애틋하게 8개월을 이어갔다. 둘은 결혼 전에 6년 동안 연애를 했다.

정 씨는 남편이 법정에 설 때마다 이해가 안됐다. 저기 왜 저러고 있어야 하는지. 시간이 거꾸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이도 상준데 무슨 죄가 있다고 살인죄를 뒤집어 쓰고 있는지 싶었다. 내가 좀 더 현명 했으면, 신랑을 좀 더 도왔으면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그래도 마음을 다 잡았다. 신랑이 가장 힘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충연 씨는 다 자기로 인해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동지이자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자기는 감옥에 있는데 어머니와 부인은 밤낮으로 울부짖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뉴스로 보니 안쓰러울 따름이다.

면회를 가면 이충연 씨는 아내에게 “너한테 짐을 져 준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한다. 그런 충연 씨를 보고 영신 씨는 “자기가 제일 힘든데도 옆에 같이 못 있어 미안 하단다”며 그 마음 씀씀이에 위로를 받는다.

이충연 씨 평소 성격은 한 장소에 30분 이상 앉아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위원장을 할 때도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얘기를 했다. 용산 4구역엔 할머니들이 많아 이해를 잘 못하면 이해가 될 때까지 얘기 했다. 정영신 씨는 그런 그를 참 따뜻하고 정이 많은데다 마음이 여리다고 했다. 일엔 저돌적이지만 꼼꼼하다. 오죽했으면 그런 이충연을 두고 동네 선후배들이던 용역들이 충연이만 없으면 된다고 했다.

이충연 씨는 자기를 별로 생각 안했다. 그래서 영신 씨는 속이 상했다. 충연 씨는 자신을 떠나 같이 하는 할머니들을 더 억울해 했다. 충연 씨가 어려서부터 용산 4구역에 살아 동네 선배들이 용산4구역 재개발 조합 이사들이다. 용역들도 동네 선배들이었다. 정영신 씨가 6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같이 밥도 먹고 했던 선배들이 재개발 앞에서 추악한 실체를 보여줬다. 직업도 없던 그들이 용역이 되고 나서 체어맨 승용차를 끌고 다녔다.

영신 씨는 그를 알기 때문에 충연 씨에게 위원장을 하지 말라고 말렸다. 위원장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고소나 주먹질을 더 당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충연 씨는 “나 아니면 누가 하냐”고 했다. 정 씨는 그때 더 세게 말리지 못한 걸 후회했다.

사실 말리기 어려웠다. 남편이 자기만 생각했으면 위원장을 안했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부인이 용역에게 욕을 먹고, 전철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만나기만 하면 눈 깔라는 소리를 듣고 다니는 걸 아니까 자기 속이 제일 상한 것이다. 정 씨는 “양아치들이 가게에 와서 저렇게 못살게 구니 그만 하자”는 말도 했다. 그런데도 충연 씨는 “우리는 젊어서 딴 데로 갈수라도 있는데 10년, 20년 이곳에서 살았던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어디 가서 살 데가 없다”고 했다. 이해해달라고 했다. 못 그만 둔다고 했다. 그렇게 위험 하지 않다고도 했다. 살자고 하는 건데 조심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말리지 못했다.

  지난 26일 추모제에서 참가자들은 용산문제 해결을 염원하는 풍등을 날렸다.

정영신 씨는 재판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봤다. 재판을 할수록 경찰 진압의 잘못이 드러났다. 철거민들은 계속 “무고한 시민에게는 안 던졌다. 우리를 죽이려 하는 용역과 경찰에 던졌다. 망루내부에 인화물질이 많은데 왜 화염병을 던지냐”고 말했지만 검찰은 자기들이 짠 대로 짜 맞추기 수사를 계속했다. 검찰 수사기록 3천 페이지도 재판과정에서 나왔다. 그런데 새 변호인들이 선임되고 재판이 진행되면서 특공대들도 화염병을 못 봤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그러나 법원을 완전히 믿지는 못한다. 많은 특공대원들이 공소사실을 부정하는 증언을 해 봤자 화염병을 든 농성자에 혐의를 둔 채 경찰의 잘못은 아직 시인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3천 페이지가 더 궁금하다.

지난 26일 추석을 앞둔 추모제에서 영신 씨는 서럽게 울었다. 평소엔 어머니들 앞에서 웃음을 짓는 그였지만 그날 만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영상이 상영되자 8개월 동안 그 힘들게 살아온 어머니들의 모습이 너무 서러웠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경찰의 방해가 없는 추모제가 기쁘기도 하고 너무 서럽기도 했다. 정 씨는 그날 오전에도 남편을 면회하고 왔다. 그 자리에서 충연 씨는 그날도 “같이 못 있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8개월 동안 싸움한 영상을 보고 있으니 그 영상을 혼자 보는 게 너무 맘이 아팠다.

정영신 씨는 용산범대위 상황실과 장례식장으로 쓰던 순천향 병원에서 나올 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병원에서 나올 때는 장례를 치르고 나오고 싶었다. 어머니들이 용역들과 마주칠 상황을 생각하면 맘이 더 아프다. 남일당 부근으로 옮긴 거처에선 24시간 대기상태다. 그래서 밤에 전화만 오면 늘 긴장한다. 그냥 안부전화가 와도 무슨 일이 났나 싶다.

10월부터 다시 철거를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10월 12일에 법원에서 현장 검증이 끝나면 망루가 있는 남일당 건물마저 철거하려 들까 걱정이다. 어머니들은 8개월 동안 악만 남았다. 이젠 우리하나 죽는 골을 봐야 해결되려나 보다는 심정도 든다. 요즘은 경찰도 유족을 때린다. 맘이 좋지 않다. 정운찬이 빨리 사과를 하고 문제가 해결 돼 어머니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정영신 씨 소망은 돌아가신 철거민 열사들의 염원과 같다. 임시시장과 임대상가 보장이다. 그냥 더 장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거다. 그것 때문에 농성을 했고 그걸 이뤄내지 않으면 죽음은 헛된 거다. 그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투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정 씨는 이번 추석에도 설처럼 용산현장에서 보내야 한다. 신부님들이 현장을 지킬 테니 모두들 편히 지내라 했지만 지금은 그곳이 집이다. 시어머니 전재숙씨도 남편은 죽고 아들은 구치소에 있는데 어딜 가겠느냐고 한다. 다른 어머니들도 신랑들이 여기 다 있는데 어디를 가겠느냐며 다들 현장에 있을 예정이다. 추석 땐 맘 편히 제사상을 차려드리고 싶었지만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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