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교섭 ‘비판론’은 타당했다. 그리고...

[노동운동,어깨를펴고](8) - 노사정위원회와 사회적 교섭 전술이 남긴 것

일단락 되지 않은 사회적 교섭 논란

지난 해 9.11 노사정대표자회의의 로드맵 ‘합의’는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사회적’ 합의였다. 우리 노동정치에서 사회적 합의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넘어왔으나 이번 합의는 1996년의 날치기 노동법 개악, 1998년 2월의 정리해고 합의와 버금가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의 합의 실험 이래 꼭 10년이 되는 해에 이루어진 ‘합의’였던 점도 상징적이었다. 말하자면 이 땅에서 노사정 당사자가 합의라는 ‘선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가라는 실험에서 중요한 실험 결과가 드디어 나온 것이다.

그 합의 결과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 그 세세한 내용을 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로드맵 합의에 반대하는 한국노총 소속의 노동자들이 한국노총 위원장 사무실을 점거하고 감옥에 간 사실에서 답은 명료하게 나온다. 또 수많은 공공부문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점도 판단을 쉽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합의에 상대적으로 의미를 부여했던 민주노총 지도부가 배제된 과정도 그렇다. 요컨대 지난 10년 간 사회적 교섭과 합의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이 금번 로드맵 합의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따라서 이 경험은 사회적 교섭과 합의를 비판하고 반대했던 '비판론'이 현실에서 타당함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사회적 교섭 전술 논란이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한 필자의 판단은 섣부른 것이었음을 아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합의의 여파가 계속되고 있었던 지난 해 10월 말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는 사회적 합의에 관한 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었다. 거기서 필자는 10여 명의 가까운 토론회 참석자 중 유일하게 사회적 합의의 가능성과 의미를 부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으나 그것이 현재 우리 운동의 조건이자 현실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회적 합의 ‘옹호론’의 핵심 논지를 들을 수 있었다. 단적으로 ‘대안이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었다. 또 여기에는 향후에도 정부의 노동통제전략의 기조가 여전히 합의를 요구하고 강제할 것이라고 보는 정당한 지적도 포함된다. 노사정위원회의 명칭과 기구 형식을 부분적으로 바꾸는 변화에 따라 다시금 그것이 논란이 되리란 점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무조건 반대'는 가능하지도 않으며 대책이 아니라는 반(反)비판의 무게를 다시금 절감하였다.

필자는 사회적 합의를 전술적인 수준에서 원칙적으로 반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옹호론’의 주장처럼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노동개혁을 하여 신자유주의 광풍을 막고 ‘사회통합적인’ 노사관계를 건설하겠다는 데 반대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지금도 반대할 의사가 전혀 없다. 아니 국가와 자본이 그럴 전략적 의지라도 충실히 보여준다면 비판하거나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노무현정권의 노사정위원회와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그리고 비정규법안과 로드맵에 관한 노사정대표자 합의는 매우 중요한 준거였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사회적 교섭과 합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판단 기준 필요

비정규직을 확대하고 ‘무늬만의’ 보호조치로 비정규노동자를 기만하려는 정책에 대해, 그리고 정부 스스로 수 년 동안 로드맵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던 복수노조 허용 문제를 하루아침에 뒤집는 허위에 어떻게 ‘합의’해줄 수가 있는가 말이다. 필수공익사업 직권중재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정책이 대체노동을 합법화하는 역공으로 탈바꿈하는 데 어떤 노동개혁이 있는가 하는 너무나 상식적인 의문인 것이다. 그 합의 전후로 비리 공작을 포함해서 민주노총 최고위급 간부를 마구 구속, 수배하는 탄압에 대해서 애써 눈을 감더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노조운동은 향후 다시 부각될 사회적 교섭과 합의 문제에 대해 이제는 분명한 판단 기준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대안이 없더라도’, 심지어 노동운동이 더 심한 고립화, 위기에 빠지더라도 현재까지 줄곧 되풀이되어 온 ‘반노동자적인 합의’에 손을 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교섭에 참여 여부와 관련된 판단 기준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와 비정규직의 확대를 막을 수 있고, 최소한의 자율적 노사관계를 이룰 수 있는 실질적 개혁을 합의가 담보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것은 민주노조의 요구이기 이전에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이루겠다며 정권이 스스로 주장했던 개혁 사안이다.

여기에는 당장 개선되어야 할 여러 가지 쟁점들이 포함된다. 작업장 단위 복수노조의 전면적 허용과 전임자 임금의 노사 자율 결정, 사유제한을 포함한 비정규직 관련 법안의 전면적 개선과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노동자성 인정, 손해배상 가압류에 대한 엄격한 법적 규제, 공무원 교수 노동기본권의 온전한 보장과 탄압 중지, 산별노조 조직과 산별 중앙교섭을 제도화하기 위한 법적 대응 조치, 특히 단체협약 효력 확장제도의 개혁, 대체노동의 투입 등 소위 사용자대항권이라는 억지를 포기하는 것 등 법제도 측면의 개혁 사안들이 우선 제시될 수 있다.

구체적인 정부 정책의 전면적 전환도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사회적 양극화를 제어하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저임금을 현실화하는 문제, 중소 영세사업장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4대 보험 적용을 전면화하고 그 수급액을 상향 조정하는 문제, 재벌 대기업과 하청 기업 간의 원하청 불공정 거래를 전면적으로 바로잡고 구조를 민주화하는 문제 등 이미 과거의 과제가 된 개혁의제들은 넘치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대등한 노동-사회정책으로, 국가 전략의 근본적인 전환 요구

특히 노사관계 측면에서 정부의 정책 실행에서는 전략적 의지만 있다면 변화의 여지는 많다. 무엇보다 정당한 쟁의를 공권력 투입과 구속 수배로 진압하지 않는 것, 보수 여론을 동원하여 노동운동을 왜곡 비방하거나 여론을 조작하는 행태를 버리는 것, 재정 지원 비리 수사 등을 매개로 해서 노동운동 내부의 분열을 획책하거나 자주성을 침해하는 행태를 포기하는 것, 노사 간에 중립적인 노동행정 관행을 수립하는 일 등은 정상적인 노사정관계로 가기위해 너무나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다. 또 합의기구 운영과 관련해서 운영의 자주성의 보장하는 일, 그 구성에 있어 노사 간에 대표성을 보장하며 합의 이행을 온전히 보장하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혹자는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원히’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냐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정당한 반론이며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답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이다. 먼저 대체로 보아 이들 중 절반 정도에 대해서 개혁적 정책을 내놓는 것이 참가 판단의 일차적 준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절반의 절반일지라도 그것의 실제로 정부가 책임을 갖고 끝까지 추진할 정책적 의지를 보여주는가에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경제 성장이나 한미FTA 체결 혹은 부동산 가격 안정 등에 최근 정부가 보이는 바와 같은 정책적 적극성을 노동개혁에 일관되게 그리고 진정으로 보여주는가가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가 추진해온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대등한 사회정책으로 그리고 그 폐해를 제어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으로 노동-사회정책을 위치지우는 일이며, 국가 전략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권과 자본의 입장에서는 매우 어려운 선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컨대 노사정위원회를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로 회칠하는 수준으로는 참가하기 힘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물어 볼 수 있다. ‘대안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모두가 실제로는 그 답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본다. 당연히 대안은 ‘있다’. ‘전노협’ 시절에 대안이 있었듯이 ‘산별노조’ 전환을 시작하고 ‘정치세력화’의 주요한 국면에 들어선 민주노조운동에 어찌 대안이 없을 수 있는가?

[기획] "노동운동, 어깨를 펴고"

1회차(1월10일) 시론 : 노동운동의 의제설정 과제
2회차(1월10일) 산별과 지역(1)
3회차(1월11일) 비정규법안과 로드맵 이후 대응
4회차(1월12일) 산별과 지역(2)
5회차(1월15일) 민주노총 연대운동 짚어보기
6회차(1월16일) 사회연대전략 어떻게 할까
7회차(1월17일) 연금 개악 대응은
8회차(1월18일) 노사정위원회와 사회적 교섭 전술이 남긴 것
9회차(1월19일) 민주노조운동의 혁신
10회차(1월22일) 현장에서 지역으로, 지역에서 현장을
덧붙이는 말

노중기 님은 한신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

* '노동운동,어깨를펴고' 보도 순서가 필자의 사정으로 일부 바뀌었습니다. 이 점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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